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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산리 전투가 우리측에서 전과를 부풀린게 맞나요?
게시물ID : history_19233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워썬더
추천 : 0/4
조회수 : 1750회
댓글수 : 5개
등록시간 : 2015/01/05 12:11:06
독립운동사를 연구하시는 분들의 저서에서 다루고 있는 이른바 1차사료들은 실로 빈약하기 짝이없다. 박은식의 「韓國獨立運動之血史」를 거의 재탕하는 수준에서 한껏 부풀린 전투전과를 그로테스크하게 나열해 놓고 자부심을 가진들 무슨 위안이 될까. 예컨대 북한에서 김일성의 보천보전투를  성전화시키는 미화찬양 작업을 우리가 비난하는 것과 하등의 다를 바가 없는 것이다. 논의에 앞서 한가지 전제하고 싶은 것은 이 필자는 우리 선조들의 고귀한 헌신인 독립운동 자체를 폄훼하고 싶은 마음은 전혀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보다 중요한 것은 무엇이 사실이냐 하는 것이다. 특히 해외에서의 무장투쟁은 본 사람마다 들은 사람마다 말이 다 다르고 구전되어 회자되는 것이 대부분이므로 자료로 삼기에는 상당히 취약한 면이 있다. 현재 일본측 자료의 공개가 상당히 진척되어 있는 상태이므로 당시의 상황과 전투기록을 입수하기는 그리 어렵지 않다.

수천명을 몰살시켰다는 청산리대첩의 기록대로라면 일본측 자료에 간접적으로라도 언급된 그 무엇인가 있어야 했다. 현재 전해져 내려오는 일본측의 교전기록에 따르면 우리가 알고 있는 사실과는 정반대로 당시 청산리전투는 일본측의 승리라고 되어 있다. 뿐만아니라 쌍방간 사상자 규모도 그리 크지가 않다.

예컨대 間島事件鮮支人死傷者調 第十九師團 司令部 大正十年二月二十五日調製에 보면 당시 교전결과 일본측의 戰傷者 숫자와 조선측의 死傷者人名一覽表가 있다. 일본군은 도합 전사 11, 부상 24에 지나지 않았다. 장교 사망자는 없었다. 우리가 알고 있는 사실과는 전혀 동떨어진 보고다. 신용하 교수가 청산리 어랑촌(漁郞村) 전투시 사망했다고 주장한 加納信暉 中佐는 大正 11年 飯島昌蔵와 임무를 교대할 때까지 생존해 있었으므로 신용하 교수의 오류다.

신용하 교수는 패전의 사실을 숨기기 위해 사상자 수를 은폐하거나 날조했을 가능성을 제기하고 있지만 그러는 자신은 정작 승전에 대한 근거를 上海新聞報나 大韓民國臨時政府의 獨立新聞에 의거하고 있다. 피차 믿기 어려운 것은 마찬가지다. 일본측 대외비 군사 보고서가 1차 사료에 준한다고 했을 때 지방신문의 전언형식의 기사가 이를 압도할 수 있는 증거라고 보기에는 어려운 점이 있다.

체포한 야스쿠니 측에서  靈璽簿 혹은 祭神簿를 공개하지 않으므로 당시 전몰자 명단을 구하기가 쉽지 않지만 이를테면 病傷費가 급격하게 증가했다든가 장례비가 증가했다든가 전사자 운구의 본토 후송비가 증가했다든가 최소한 그런 간접 증거라도 나와줘야 할텐데 그런 것이 전혀 없다.

김좌진 관련 일본측 자료를 뒤지다보니 어느 순간 김좌진은 일본측에서 비호하는 인물로 둔갑해있다. 그가 체포된 직후의 일이었다. 좌익계열측에서는 김좌진 암살 이유로 변절을 들고 나왔다. 따라서 단순히 일제의 조작이라 보기에는 어려운 점이 많다. 연구자들의 후속 조사를 촉구하며 관련자료를 몇개 첨부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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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료2: 일본측의 김좌진, 김규식 구제(save)에 관한 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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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료3: 極秘 日本 軍務局 發 間島方面出兵に關する件>

 
적어도 수백명이 죽었다던 이도구 어랑촌 전투결과 실제 일본측 전사자 는 고작 3명
다음은 이를 입증하는 일본측 자료

戰死騎兵ノ墓地代金下付願ニ關スル件

陸海軍墓地及埋葬關係雜件/帝國ノ部 大正11年 11月 18日
在頭道溝 副領事 諏訪光瓊
管內 二道溝 奧地 漁浪村 小字 茂山村 居住 洪鐘呂 토지 56평 매입비용 청구

기병27연대 기병 軍曺 小町谷智
기병27연대 기병 二等卒 鬼頭義高
보병74연대 보병 二等卒 長瀨福太郞 以上 전사자 3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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