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yn.ugyo.net/knowledge/view;jsessionid=C1D643C2479A61629363BAC72F32A745?knowType=research&qCond=&q=&pageIndex=1&pageUnit=20&id=31 대신에 해당되는 정1품 관료는 매달 미(米) 2석(石) 8두(斗)(38斗)와 황두(黃豆) 1석 5두(20두)를 받았던 반면, 최하위직에 해당되는 종9품은 미 10두와 황두 5두를 받았다. 최고위직과 최하위직의 녹봉은 약 4배 정도 차이가 있었다.
이 액수에서 보듯 관료가 녹봉만으로 생계를 이어가기에는 충분하지 않았다. 게다가 규정된 액수대로 지급하지 않는 경우도 많았다. 흉년이 들거나 하면 재정이 곤란하다는 이유로 녹봉의 양을 줄이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므로 녹봉이 관료의 생활보장이라는 의미는 지니기 어려웠다.
10두면 1말(약 20kg)인데, 4인 가족기준으로 딱 1달 식량입니다. 녹봉을 받아서 밥만 먹고 사는게 아닌데 말이죠.
무엇보다 재정운영은 중앙의 왕실과 관청에 대한 상납에만 관심이 있었고 지방재정의 운영은 거의 모두 지방의 관행에 맡겨져 있었다. 단적인 예로 행정실무를 담당하는 향리에게 지급되는 토지나 녹봉이 없었다.
중앙 관청의 경비나 관원과 하인들에 대한 인건비도 최소한으로 책정되어 있었기 때문에 정해진 공물보다 더 많이 수취하여 사용하였다. 이리하여 중앙과 지방의 모든 관청과 직책은 비공식적 수입을 얻을 수 있는 권리를 가지고 있어 거대한 상납의 네트워크를 형성하였다. 현재의 관점에서 보면 명백한 부패행위이지만, 당시의 관행으로는 정당한 수입이었다.
캠브리지 중국사 10권 청제국말
19세기 청나라 하급관리였던 풍계분의 교빈려항의에서 일부 인용
그는 논문들에서 심각한 폐단을 야기한 청조의 완고한 제도를 가차없이 공격했다. 예를 들어 명목상으로는 아주 낮은 관료들의 봉급
풍계분은 현 이하의 가구에서 일하는 하층신사의 지위조차 갖지 못한 '동(향촌 지도자)'은 주민들이 투표로 직접 선발해야 한다고 제안했다.
이러한 민선관리는 각각 임기를 3년으로 하고 매달 "봉급"을 주어야 하며 ( 중략 )
그의 놀랄만한 제안이 받아들여졌다면, 지현 개인의 무거운 업무가 가벼워지고 관리들의 임기가 연장되었을뿐만 아니라 아역의 수많은 폐단이 사라졌을 것이다.
영국이나 프랑스, 일본의 경우를 봐도 별반 차이가 없습니다. 전근대 시기에 어떤 국가도 국가행정의 최말단을 이루는 하급관리들에게 생활을 할 수 있는 정도의 급여가 주어진적이 없습니다. 녹봉외에 별도 수입은 생활유지를 위해 필수적이었고, 이는 전근대 국가의 수많은 병폐의 근본원인이었던 하급관리의 구조적 부패를 조장했습니다.
그런데 이런 구조적 문제가 농업국가의 생산성 한계로 발생하는 것인지, 아니면 조세행정체계의 기술적 한계로 인한 것인지 궁금합니다.
관련해서 참고서적이나 논문, 혹은 개인적 의견도 좋으니 답글 부탁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