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더코아의 詐欺 列傳.
*평진후.주보열전(平津侯.主父列傳)
열전에 리듬이 있다는걸 이제야 발견한듯 하다.
난리가 나고 장수들이 이름을 떨치고 나면 반드시 현명한 문신들이 나온다.
그것을 이제야 알았다고 생각하니 약간은 허무하기도 하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 보니 그것이 열전의 리듬이라기 보다는
오히려 천하가 돌아가는 이치일수도 있다는 생각이 든다.
산을 넘으면 골짜기가 나오고 강을 건너면 평야가 나오는것이 당연한것일진대
역사라 하는것도 항상 태평성대가 다하면 전란과 어지러움이 발생하고
그 혼돈이 다하여 힘과 천명이 한곳에 모이면 다시 태평성대가 오는것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니
이 열전의 리듬이란것이 사마천의 의도한바가 아니고 그저 천명의 순환이 그리된것이란 생각이 든다.
우주만물과 음양오행도 그러하니 음기와 양기가 운행하다가
그 기가 만나 합일 되면 상생.상극하여 물을 이루고 이합집산 하여 다시 기로 돌아가니
이것이 천지 운행의 이치인듯 하다.
사마천은 의도는 하지 않았으되 자연히 그 이치를 깨닫고
사기를 저술하며 그 이치를 글에 녹여 넣어 위대한 문장을 이룩하지 않았을까 생각해 본다.
무제의 치세는 유난히 정벌도 많았지만
그러함에도 국내의 사정은 태평성대였다고 볼수있다.
밖으로 여러 장수들이 국경의 수비를 강화하고 국토를 넓히는 활약을 한 반면
조정에는 많은 현신들이 있어 내치를 가다듬고 한나라 황실을 잘 보필하며 황제의 치세를 돌보았다.
천하가 태평하니 여러 대신과 황족들이 다투어 사치스런 생활을 할때
오직 공손홍 만이 입을것과 먹을것을 절약해 모든 벼슬아치들의 모범이 되었다.
이제부터 평진후 공손홍과 주보언에 대해 알아보도록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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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솔이정 숙감부정(子率而正 孰敢不正)
승상 공손홍(公孫弘)은 제나라 치천국 설현 사람이다.
자를 계 라 하였다.
젊은시절에 설현의 옥리를 했는데 죄를 지었다고 해서 파면 되었다.
가세가 빈한하여 해변에서 돼지를 치며 계모에게 효성을 극진히 다했다.
그는 나이40이 넘어 춘추잡가의 학설들을 공부했다.
건원원년.
효무제가 즉위하여 어진 선비와 문사들을 초빙했다.
이때 공손홍은 60세로 초청 되어 박사관으로 들어갔다.
공손홍이 흉노에 사자로 갔다와서 황제에게 복명했는데 황제의 마음에 들지 않았기 때문에
무능하다는 책망을 들었다.
그는 병이라 핑계대고 벼슬을 버리고 낙향했다.
원광5년.
황제가 다시 조칙을 내려 천하의 학자들을 초빙했다.
치천국에서는 다시 공손홍을 추천했다.
공손홍이 사양하여 말했다.
"나는 일찌기 칙명에 의해 상경했다가
무능하다는 낙인이 찍혀 낙향한 사람이니 원컨대 다른사람을 추천해 주십시오."
그러나 치천국 관리들이 한사코 그를 추천해서 할수없이 길을 떠나 서쪽으로 들어가
태상을 만났다.
태상이 영을내려 소집한 유사들에게 각기 책문을 지어 바치도록 했다.
공손홍은 100여 명 중에 꼴찌에 가까웠다.
그러나 모든 답안지를 꼼꼼히 살펴본 황제는 공손홍의 책문을 장원으로 뽑았다.
황제가 공손홍을 불러 만나본즉 그 인품이 매우 고귀해 보여 즉석에서 박사관으로 임명했다.
이당시 한나라에서는 서남방의 오랑캐들과 교통하기 위해 길을 내는 공사를 하고 있었는데
그로인해 파,촉의 백성들은 부역에 시달리고 있었다.
그러한 탄원이 조정으로 계속 올라오자
황제는 공손홍을 시켜 상황을 직접 시찰하게 했다.
공손홍이 돌아와 황제에게 보고했다.
"서남의 오랑캐와 통해봐야 하등의 이익이 없을듯 합니다."
그러나 황제는 공손홍의 의견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공손홍은 비범하고 박식한데다 견문도 매우 넓었다.
그는 항상 이렇게 말했다.
ㅡ임금으로서의 최대 결점은 광대하지 않다는것이고
신하로서의 최대 결점은 검소.절약하지 않는것이다.ㅡ
그는 스스로 포의를 입었고 밥상에는 한가지 이상의 고기를 놓지 못하게 하였다.
그러면서도 계모가 죽자 꼬박 3년상을 치렀다.
그는 어전회의가 열릴때면 자기 의견을 말하는 대신 판단의 단서가 될만한 자료만 내 놓았다.
그래서 황제 스스로 판단하여 선택하게 했으며
굳이 남의 의견을 면전에서 논박하는 일이 없었다.
그렇게 되자 황제는 공손홍의 행실이 매우 돈후하며 변론이 너그럽고
법조문에 정통하며 관리능력도 뛰어나다고 보았다.
황제는 그를 몹시 좋아하여 2년이 채 못되어 좌내사에 임명 되었다.
그는 정사를 상주할때 재가를 얻지 못하더라도 변론하는 법이 없었다.
언제나 주작도위인 급암과 함께 한가한 틈을가려 황제에게 나아가
그 또한 급암에게 먼저 말하게 하고 자신은 그것을 찬성하는것으로 끝냈다.
황제는 항상 기뻐하며 상주하는바를 모두 들어 주었다.
황제는 나날이 공손홍을 친애했고 그의 의견을 존중했다.
어느날 어전회의때 공손홍은 어떤 안건에 대해 미리 짜고 들어간적이 있었다.
그런데 공손홍은 대신들과 말을 맞춘것을 저버리고 황제의 의견을 따르고 말았다.
화가난 급암이 어전에서 소리쳐 공손홍을 비난했다.
"제나라 촌놈주제에 순 거짓말 쟁이로군.
우리와 미리 짜놓고 들어와서 약속을 어기다니?"
황제가 놀라 그 까닭을 물으니 공손홍이 대답 했다.
"황송하옵니다.
신을 아는 자들은 신을 성실하다하고 신을 모르는 사람들은 신을 불충하다고 합니다."
그 후로 대신들이 공손홍을 헐뜯을때마다 오히려 황제는 공손홍을 두둔했다.
원삭3년.
어사대부 장구 가 면직 되어서 그 자리에 공손홍이 임명 되었다.
이무렵 한나라에서는 서남방으로 오랑캐와 개통하고 동쪽으로 창해군을 설치 했으며
북방으로는 삭방군의 성새를 축조하고 있었다.
공손홍이 간하였다.
"이는 중국을 피폐하게 할 뿐입니다.
불모의 땅에 노력과 재산을 투입하는 작업은 중지 하셔야 합니다."
그러자 대신 주매신이 삭방군을 설치하면 유리한점 열가지를 조목조목 설파했다.
황제와 대신들은 공손홍이 한가지라도 논박할줄 알았는데
공손홍의 대꾸는 그게아니었다.
"저는 산동의 촌놈이라서 그것이 그리도 유익한줄 정말 몰랐습니다.
그렇다면 서남이와 창해군의 일은 중지하고 삭방군의 일만 힘써 경영하는것이 좋겠습니다."
그러자 황제는 공손홍의 말을 들어주지 않을수 없었다.
급암은 또 다시 화를 냈다.
"폐하.
공손홍은 삼공의 지위에 있으며 막대한 봉록을 받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포의를 걸치고 다니니 이는 자기만 검소한척 하는 위선의 행동입니다."
황제가 그것이 사실인지 묻자 공손홍이 대답 했다.
"그러합니다.
지금 대신들중에 신과 가장 친하게 지내는것이 급암입니다.
그러한 그가 오늘 조정에서 저를 힐책하니 이것은 진실로 제가 잘못하고 있는것입니다.
무릇 삼공이 포의를 입고 다니는 행위는 거짓을 꾸며 이름을 얻으려는 행위입니다.
그러나 제가 듣기에 관중은 제나라의 상국을 하면서 삼귀를 소유하고 있어
그 사치가 군주와 같았다고 했습니다.
후에 관중의 보좌로 패자가 된 환공 역시 천자의 권위를 엿보는 참람한 짓을 저질렀습니다.
그러나 안영은 제경공의 상국이 되었으나 두 가지 이상의 고기를 반찬으로 먹지 않았으며
그의 아내마저 비단 옷을 입지 않았으나 제나라는 역시 잘 다스려 졌습니다.
지금 신의 직위는 어사대부가 되어 포의를 입고 다니며
구경 이하 소리에 이르기까지 직위의 고저와 귀천의 차이를 없애버렸으니
진실로 급암의 말이 맞습니다.
만일 급암의 충성된 말이 없었다면 폐하께서는 어찌 이런 말을 들을 수 있었겠습니까?"
이 일이 있은후 황제는 공손홍이 매우 겸손한 인물이라 생각되어 더욱 그를 후대했다.
결국 그를 승상으로 삼고 평진후에 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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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손홍은 겉으로는 관대해 보였으나 곧잘 남을 의심하고
질투심이 강한 냉혹한 인간으로 평가 되었다.
그와 틈이 생긴 사람들에 대해 밖으로는 사이가 좋은척 하면서도
자신을 비방한 자들에 대해 반드시 복수를 했기 때문이었다.
이를테면 주보언을 죽이고 동중서를 교서로 이주시킨것도 공손홍의 힘이 작용한 때문이었다.
그렇지만 그는 한가지의 고기반찬과 현미밥 만을 먹었으며
친구나 빈객들이 도움을 요청하면 그는 봉록을 털어 그들에게 주어 버렸기 때문에
집안에 남는것이라고는 도무지 없었다.
선비들은 이러한 그를 현명한 인물이라고 평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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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남.형산의 모반이 발각되어 그들 일당에 대한 문초가 진행될때
마침 공손홍은 중병으로 누워 있었다.
그때 그는 스스로 생각했다.
"공로도 없으면서 봉을 받아 관위가 승상에까지 이르렀으면
마땅히 군주를 보좌해 국가를 안정시키고 위로해 만민으로 하여금
천자의 신하이며 자식이라는 도리를 다 할수 있도록 할 책임이 있는것이다.
그러나 지금 제후들이 반역을 기도 했으니
이는 모두 내가 재상으로서의 직분을 다하지 못한 탓이니
아마도 이대로 앓다가 죽으면
책임을 다하지 못했다는 비방을 면키 어려울것이다."
그래서 공손홍은 병중에도 다음과 같이 상서했다.
"신이 듣기에 천하는 다섯 가지 도가 있고 그것을 행하는 데는 세 가지 덕이 있다고 했습니다.
즉 군신.부자.형제.부부.장유 등의 질서가 통용되는 도이며
지.인.용 의 세 가지는 천하에 통용되는 덕으로 도가 행해지게 만드는 수단인 것입니다.
그래서 힘써서 행하는 것은 인에 가깝고
묻기를 좋아하는 것은 지에 가까우며
수치심을 아는 것은 용에 가깝다고 합니다.
이 세 가지를 아는 것은 스스로를 다스릴 줄 아는 것이며
스스로를 다스릴 줄 아는 자는 다른 사람을 다스릴 줄 알게 됩니다.
천하에 자신을 다스리지 못하는 자가 남을 다스릴 수 있는 경우는 아직껏 없었습니다.
그것은 백세가 되어도 변하지 않는 도입니다.
지금 폐하께서는 몸소 큰 효를 행하시고
삼왕을 본받으며 주나라의 도를 일으켜 주문왕과 무왕의 지혜와 덕을 겸비하셨습니다.
현명한 사람을 격려하고 봉록을 내리시고 능력을 헤아려 벼슬을 내리십니다.
오늘 신 홍은 아둔한 자질에 한마지로 의 공도 없음에도
폐하께서는 졸개들 중에서 파격으로 신을 발탁하시어 열후에 봉하시고
마침내 승상의 자리에까지 오르게 했습니다.
진실로 신의 능력과 행실은 말할만한 가치가 없으나 평소에 부신지병 이 있어
구마지심 을 행하기도 전에 먼저 구학 이 되어
폐하로부터 입은 은덕에 보답하지도, 책임을 다하지도 못할까 두렵습니다.
원컨대 후의 인수를 바치오니 해골을 돌려주시어 어진 사람을 위해 길을 열도록 해 주시기 바랍니다."
천자가 읽고 답했다.
"옛날에는 공이 있는 자에게 상을 주고 덕이 있는 자는 표창 하였다.
성취한것을 지킬 때는 문을 숭상하고
변란을 만났을 때는 무를 존중한 도리는 결코 바뀔 수 없는 것이다.
짐은 지난 날 요행히 보위에 오른 이래 나라를 안녕하게 만들지 못할까 두려워했음으로
오로지 여러 대신들과 함께 천하를 다스릴 생각만 했다.
이는 공도 잘 알고 있는 일이다.
자고로 군자는 선을 좋아하고 악을 싫어한다.
그대의 근실한 행동을 짐이 잘 알고 있으니
공이 불행히 상로지병 에 걸렸으나 어찌 회복되지 못할것을 걱정 하는가?
그런데 이제 상소를 올려 고향에 돌아가기 위해 사직한다고 하니 이는 짐의 부덕을 드러낸 것이다.
이제 조정의 일이 조금 한가해졌으니 그대는 근심을 잊고 정신을 모아 의약으로 몸을 보전하도록 하라."
황제는 공손홍에게 휴가를 주고 소고기와 술과 비단을 하사해 위로 했다.
몇 개 월 후 공손홍의 병세가 다소 호전 되었으므로 다시 정사를 돌볼수 있었다.
원수2년.
공손홍이 병이 들이 결국 승상의 직에 있다가 운명했다.
그의 아들 공손도가 직위를 계승해 평진후의 작위를 이었다.
공손도는 산양태수로 10여 년 재직하다가 법에 저촉되어 후의 작위를 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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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보언(主父偃)은 제나라 임치 출신이었다.
처음에는 전국책사의 장단설인 합종과 연횡의 술법을 배웠으나
만년에는 주역.춘추 및 제자백가의 학설을 배워 제나라 여러 학자들과 교류 했는데
그를 후하게 대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제나라 학자들이 서로 짜고 그를 배척하는 바람에 제나라에서 용납되지 못했다.
집이 가난하여 돈을 빌리려 해도 빌려주는 이도 없었다.
하는수 없이 북쪽 연.조.중산 등으로 떠돌아 다녔는데
그 어디에서도 그는 대접 받지 못했다.
그래서 그의 객지생활 역시 몹시 곤궁했다.
효무제 원광원년.
주보언은 제후국에서는 벼슬을 할 길이 없다고 판단하여
드디어 서쪽 관중으로 들어가 대장군 위청을 만났다.
위청이 그를 황제에게 여러번 추천했으나 웬일인지 황제는 그를 부르지 않았다.
그는 노자도 없는 신세라서 그곳에서 만나는 빈객들도 대부분 그를 싫어했다.
궁지에 몰린 주보언은 마침내 황제에게 직접 상서했다.
상서한 내용은 9개조로 되어 있었는데 그중 8개조는 율령에 관한 것이고
나머지 1개조는 흉노정벌의 불리함을 충고한 것이었다.
주보언의 상서문은 매우 길며 또한 명문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러나 그 내용을 모두 옮겨야 할것 같지 않아서 그 내용을 요약해 보겠다.
ㅡ자고로 진시황 은 재상 이사가 반대하였으나 몽염을 시켜 흉노를 정벌하고 장성을 쌓았지만
소득은 없었으며 결국 천하가 진나라를 배반하는 동기가 되었다.ㅡ
ㅡ고조역시 어사 성진이 반대 했으나 군대를 이끌고 흉노를 치러 갔다가
평성에서 포위되어 큰 곤욕을 겪고 후회한 일이 있다.ㅡ
ㅡ결국 흉노를 정벌해도 얻는것은 없고 국가의 재정만 소비되니 흉노정벌을 중지해야 한다.ㅡ
주보언의 상서를 읽던 황제는 크게 놀라 주보언을 불러들이도록 명 했다.
주보언으로서는 아침에 상서하여 저녁에 입궁하는 격이었다.
그때 황제는 서악과 엄안의 상서문도 함께 읽었다.
서악은 토붕(土崩)과 와해(瓦解) 라는 말을 이용하여 국가 안위를 이야기 하고
성왕의 도를 따를것을 설파했다.
엄안은 옛 주나라 시대부터 춘추 전국시대의 사세를 설명하고
현재의 제후왕과 군현의 태수들의 권한이 너무 커지면 국
가에 변고가 일어날수 있다는 내용으로 상서했다.
황제는 주보언과 함께 서악과 엄안도 모두 궁으로 불러 들였다.
"그동안 공들은 어디에 있었는가?
어째서 서로 만나는것이 이리도 늦었는가?"
그러면서 그들 세사람에게 벼슬을 주어 모두 낭중으로 삼았다.
주보언은 특히 황제를 자주 뵙고 상서하여 정사를 논했으므로
황제는 조칙을 내려 주보언을 알자로 삼더니 곧바로 중대부로 옮겼다.
그후 주보언은 1년동안 네차레나 승진했다.
주보언은 황제에게 상서하여 제후들의 영지가 너무 넓으면 제후들이 교만해진다는 이유로
영지를 삭감할것을 주장했다.
그러나 예전 조착의 경우처럼 법으로 영지를 삭감하면
제후들이 반발하여 반란을 일으킬것을 염려하여 새로운 계책을 내어 아뢰었다.
"지금 제후들의 자제가 수십명이 되어도 적자 하나에게만 봉령이 세습됩니다.
나머지 아들들은 골육임에도 한치의 봉령도 없으니
이래서는 부모로서의 인과 자식으로서의 효가 선양되지 못합니다.
그러니 폐하께서 조칙으로 명하시어
제후들로 하여금 나머지 다른 자제들에게도 봉령을 갈라주게 하시고
그 봉령을 바탕으로 후에 봉하시면 봉령을 얻은자들도 기뻐할것이며
폐하께서는 은혜를 베푼것이 되며
제후들의 봉령을 삭감하지 않고도 그들의 세력을 약화시킬수 있습니다."
황제는 기뻐하며 주보언의 계책을 따랐다.
얼마후 주보언은 또 다른 계책을 올렸다.
"무릉이 비로소 완성 되었습니다.
천하의 호걸들과 부호들, 그리고 민중을 선동해 혼란시키는 자들을 모두 무릉으로 이주 시키십시오.
이렇게 하면 안으로는 경사를 채우고 밖으로는 간사하고 교활한 무리들을 제거할수 있습니다.
이것은 이른바 벌주지 않고도 해로운 자들을 없애는 방법이 됩니다."
황제는 역시 그 계략도 따르기로 했다.
주보언은 위황후를 세우는 일과 연왕 정국의 음행을 적발하는데도 공을 세웠다.
대신들은 모두 그의 입을 두려워 하여 그에게 보낸 뇌물만도 1천금이 넘었다.
어떤사람이 주보언에게 충고했다.
"그대의 횡포는 너무 심합니다."
그러자 주보언이 대답했다.
"내가 성장하여 각지를 떠돌기를 40여년이나 됐지만 영달할수 없었소.
양친은 나를 자식으로 여기지 않았고 형제들도 나를 도와주지 않았으며
친구들은 나를 버렸소.
나는 곤궁한 나날을 보낸것이 너무 오래요.
대장부로 태어나 오정의 미식을 즐길수 있는 신분이 되지 못한다면
차라리 죄를 짓고 죽어서 오정에 팽살 되는게 낫소.
나는 해가 저물어가는데 갈길이 먼 나그네처럼 나이는 많고 할일도 많소.
그러니 도리에 어긋나더라도 마음대로 해 보는것이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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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보언은 또 황제에게 삭방군을 경영할것을 주청했다.
황제가 이 주장을 듣고 공경들에게 내려 심의케 했다.
그랬더니 대부분의 공경들이 불가함을 주장 했다.
더구나 공손홍은 이렇게 반발했다.
"진나라 때에도 일찌기 30만 대군을 파견해 북하에 성을 쌓은적이 있지만
결국 목적을 달성하지 못하고 얼마 안가서 포기했습니다."
그러나 주보언은 재차 그 편리함을 강력히 주장했다.
황제는 결국 주보언의 계책을 채용해 삭방군을 설치했다.
원삭2년.
주보언이 황제에게 이렇게 귀띔했다.
"제왕은 음탕하며 그 행위 역시 간사합니다."
황제가 그 말을 듣고 주보언을 제나라 재상으로 임명했다.
주보언이 재상으로 제나라에 가서 제일먼저 한일은 형제들과 빈객들을 모조리 불러들인 일이었다.
그는 500금을 그들에게 뿌려주며 꾸짖었다.
"전날 내가 빈곤할때 형제들은 나에게 먹을것도 입을것도 주지 않았고
빈객들은 나를 문 안으로 들여놓지도 않았다.
이제 나는 그대들과 절교를 선언하니 다시는 내 문안으로 들어서지 말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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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보언은 슬그머니 사람을 시켜 제왕이 자기 누님과 간통한 사실을 알고있다는것을 비쳐
제왕에게 충격을 주었다.
제왕은 지난날의 연왕처럼 죽음을 피할 길이 없다고 생각하여 스스로 자결하고 말았다.
전날에 주보언이 평민일적에 일찌기 연나라와 조나라에 노닌적이 있었는데
이제 주보언이 높은 자리에 올라 연나라의 비밀을 들추어 연왕을 죽게 만들자
조왕 또한 주보언에 의해 추문이 들추어 질것이 두려워 전전긍긍 하고 있었다.
조왕은 선수를 쳐서 주보언의 비밀을 황제에게 고발하려 했으나
그가 조정에 있어서 감히 고발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주보언이 제나라 재상이 되어 관문 밖으로 나가자 조왕은 즉시로 주보언을 고발 했다.
ㅡ주보언은 제후들에게 뇌물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제후의 자제들이 그로인해 봉토를 받은자가 많습니다.ㅡ
제나라의 관리들도 가만있지 않았다.
ㅡ제왕이 죽은것은 재상 주보언이 공연한 일을 트집잡아 왕을 협박했기 때문입니다.
주보언을 문초해 보시기 바랍니다.ㅡ
황제는 특히 주보언이 협박하여 제왕을 자살케 했다는 사실에 대해 크게 노했다.
그래서 주보언을 소환하여 형리에게 넘겼다.
주보언은 제후들에게 금품을 받은 사실은 복종 했으나
제왕을 협박했다는 죄에 대해서는 반발 했다.
또한 그 증거역시 없었다.
그래서 황제는 주보언을 사형까지는 처하려 하지 않았다.
이때 어사대부 공손홍이 황제에게 간했다.
"제나라 왕은 자살 했고 후사가 없어 봉국은 폐지 되었습니다.
이런 결과는 어찌되었건 주보언이 그 원흉입니다.
만일 폐하께서 주보언을 사형에 처하지 않으시면 천하에 사죄할 길이 없습니다."
황제는 드디어 주보언의 일족을 몰살했다.
주보언이 황제의 총애를 받고 있을때는 그 문하를 드나들던 빈객이 수천 이었으나
일족이 몰살 되자 한사람도 그의 시체를 거두어 주는 사람이 없었다.
그때 오직 한사람.
효현의 공거 라는 사람이 시체를 거두어 매장해 주었다.
후일 황제는 그 소문을 듣고 공거를 덕 있는 사람이라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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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의 말미에 사마천은 다음과 같이 평 하였다.
공손홍은 수양을 쌓아 행동에 의리를 갖추었지만
무엇보다 시운을 탄 사람이라 할수있다.
한실이 흥기한지 80여년이 되니 천자의 마음은 학문쪽으로 향하여
훌륭한 인재들을 불러모아 유가.묵가 의 학문을 퍼뜨리려 했던것이다.
그때 제일 먼저 뽑힌 사람이 공손홍 이었다.
주보언은 그가 요직에 있을때는 여러 공경들이 모두 그를 칭송 했으나
일단 그가 명성을 잃고 주살 되자 선비들은 앞다투어 그의 나쁜점 만을 이야기 했다.
슬픈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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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하에 후세사람이 보충한것이 약간 있다.
그런데 이 글은 지금까지 우리가 본 사마천의 평진후 열전의 내용에서 크게 다름이 없다.
그래서 여기에서 설명하지 않기로 한다.
또한 후한시대의 역사가이며 한서 의 저자인 반고 가
공손홍과 더불어 복식.예관 전을 짓고 논찬한것이 있는데
후세사람이 사마천의 평진후.주보언 열전의 뒤에 덧붙인것이 있다.
그러나 이 역시 당시에 어떠어떠한 인물이 있었다 하는 내용에 불과 하므로
역시 따로 설명하지 않으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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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으로 평진후 공손홍과 주보언의 이야기를 모두 알아 보았다.
공손홍은 젊은시절에 불우했으나 40이 넘은 나이에 공부에 정진하여 늦은 나이로 벼슬에 올랐다.
그는 효성이 지극했고 학문이 깊어서 처음에 제나라의 하급관리였으나
낭중지추처럼 황제에게 발탁되어 박사관으로 임명 되었다.
그의 돈후한 성품은 황제의 눈에 띄기에 충분했고 그의 행실은 검소하며 청렴했다.
그리하여 마침내 일인지하 만인지상의 승상의 위 까지 올랐고
죽는날까지 황제의 신임을 잃지 않고 승상의 자리를 지키며 세상을 떠났다.
살면서 약간의 질투와 복수심.또는 시기하는 마음이 없지는 않았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항상 앞으로 나서지 않으면서 충성된 자세를 지킴으로서 종신안석 했으니
천하를 뒤흔들다가 단 한번의 비운에 비참하게 죽어간 사람들과 비교해서
나름대로 훌륭한 삶을 살았다고 볼수 있겠다.
다른 한편으로는 한나라가 안정되고 무 보다는 문을 숭상하게 되는 전환기에 들어섰던
당시의 사세를 잘 타고 출세가도를 달리게 된 면도 없지 않으니
사람의 운명이란 능력도 중요하지만 시운이란것 역시 무시할수 없다는 생각이 든다.
주보언 역시 젊은시절에 가난하여 남들과 잘 어울리지 못해서 매우 불우한 시기를 보냈다.
기나긴 시간을 천하를 떠돌며 유리걸식 했으나 늙도록 빛을 보지 못했으니
그의 인생은 자칫하면 그대로 이름없는 필부로 끝날수도 있었다.
그러나 한번 황제에게 상서하여 그날로 입궁하여 조정에 나아갈수 있었고
승승장구하여 고위직에 오를수 있었다.
황실을 위해 여러가지 계책을 내었는데
그 계책이란것이 지난날의 조착만큼은 아니더라도
제후들과 공경대신들의 권리를 억압하는것이어서 주변의 반발을 샀다.
춘추시대 만고영웅 오자서의 말대로 ㅡ해는 저무는데 갈길이 멀다ㅡ는 생각으로
다소 무리한 정책을 펼쳐 결국 주변의 반발과 비방을 사게 되었고
결국 공손홍등의 주청으로 주살 당하였으니
죽은 후에는 누구하나 그의 시체를 거두어 주는 사람이 없을 정도였다.
자고로 순천자 흥이요 역천자 망 이라 하였으니
하늘의 도를 거슬러 무리한 행동을 하는자의 말로는 모두 이러한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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흐르는 강물의 길을 인위적으로 막고 돌리려 하면 어디에선가 둑이 터지고 큰 재앙을 당하게 된다.
도도히 흐르는 역사의 물길을 몇몇 권력자들이 자신의 입맛대로 거스르려 하는
지금의 세태에 크게 개탄하지 않을 수 없다.
법의 양심을 지켜야 할 최후의 보루인 헌법재판소는 소위 헌법개판소라는 조롱을 당하게 되었고
재판관들은 개판관이라는 비웃음을 피할수 없게 되었다.
헌법을 유린하는것은 반란이며 반역이니
80년 신군부 시절에 있었던 일처럼
"탱크로 네놈의 대가리를 박살내 버리겠다" 라고 일갈하던 어느 장군의 기개가 그리워 진다.
전두환 만큼이나 번득거리는 어느 재판관의 대가리를 탱크로 날려 버리는 꿈을 꾸며 글을 마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