빨간선이 이른반 대독일주의자들이 주장하던 독일의 통합입니다.
근데 이 대독일주의도 독일과 역사적 관계는 매우 깊지만 다른 분야에서는 이질적인 현재의 체코를 포함하고 있고 티롤지역과 이스트리아 지역도
이탈리아인이 많이 살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또한 저 빨간선 밖에도 독일계가 거주하는 지역이 꽤 있었다는 겁니다... 이런 상황에선
대독일주의도 일종의 이상향에 불과했고 결국 노란색의 오-헝을 제외한 소독일주의가 독일의 통일 방향으로 정해지게 됩니다...
서론이 길었네요. 들어가겠습니다.
구 오스트리아주의와 오스트리아적 대독일주의가 사실 1848년 혁명에 영향을 받아 등장한 개념은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이 두 개념은 빈회의(1815) 이후부터 논의 되었던 시쳇말로 쉰 떡밥이었습니다....
구 오스트리아주의는 오스트리아를 1848년 혁명 위기 이전의 메테르니히(......) 체제로 복귀 시켜야 한다는 입장이었습니다.
이것과 더불어 오스트리아제국이 독일권에서 그동안 행사하던 주도권(이시기에도 이미 프로아센과 이극체제 였습니다.
더욱이 1837년 까지 영국과 동군연합이던 하노버도 독일권에서 오스트리아가 일방적으로 대하기 껄끄러운 존재였습니다.
여기에 더 얹어서 북부독일은 루터교와 장로교 같은 개신교가 우세한 지역이었기 때문에 오스트리아의 영향력이 이미 제한 되던 상황입니다)
이에 반해 오스트리아적 대독일주의는 메테르니히체제로의 재진입은 거부하는 입장이었을 뿐만 아니라 통합독일에 오스트리아의 일부를 포함
시킨다는 대독일주의에도 반대하는 입장이었습니다.
그렇지만 오스트리아적 대독일주의는 제국이 독일권에 행사하던 영향권은 유지해야 한다는 입장은 같았고
이런 두 개념이 대안으로 등장한 것으로 볼때 제국정부가 제국 내에서 제기되던 민족문제의 실상도 파악하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어디까지나 현실유지적인 입장을 견지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3. 제국 내 다른 민족의 대응
이에 반해 제국 내의 슬라브계 정치 지도자들은 보다 적극적인 대책을 제시하는데, 팔라츠키(F.palacky)는
친오스트리아슬라브주의를 제시합니다. 이것이 바로 후에 오스트리아 합중국과도 궤를 같이하고 유럽통합의 선구로 까지
묘사되는 연방체제로의 전환입니다. 제국의 존속과 황제의 존엄을 인정하는 대신에 제국 내 제 민족 혹은 어족의 사회적, 법적 평등을
강력하게 주장했습니다.
물론 이런 주장은 제국 정부와 독일계 정치인들의 반대에 직면했습니다만, 저 주장이 오스트리아-헝가리 이중제국의 탄생과도
궤를 같이 한다고 보기도 합니다. 여기서 흥미로운 점은 제국의 거부에도 불구하고 특히 체코인들은 이런 친오스트리아 슬라브주의를
포기하지 않습니다. (이런걸로 볼때 체코의 합스부르크가에 대한 애정과도 연결시키기도 합니다....미우나 고우나 우리 황제!라는
느낌일까요.)
1850년대에 접어들면서 헝가리인들이 저항이 격렬해지기 시작합니다. 이에 더불어서 발칸반도에서 오스트리아와 같이 구제국으로서
지배제국이었던 오스만 투르크제국이 이른바 슬라브의 해방자라는 러시아에게 하는 전쟁마다 마다 깨지면서
(개별 전투에서는 몇번 이기기도 하는데 오스만 제국의 체제가 워낙 구식이라 전쟁이 장기화되면 버틸 수가 없다! 이런 느낌입니다.)
발칸반도의 슬라브민족이 요동치기 시작합니다.
더욱이 1848년 혁명에도 불구하고 체질개선에 실패한 제국은 여전히 독일통합에도 소극적이고 체제의 개선에도 소극적인
그저 현실유지에만 급급했기 때문에 위기가 점점 고조되었습니다.
더욱이 이런 오스트리아의 태도는 다른 독일권(특히 북부독일)의 부정적인 반응으로 나타났고
이는 결국 1862년 소독일주의를 주장하는 비스마르크의 프로이센과의 프로이센-오스트리아 전쟁에서
눈물나는 실책으로 패배하면서 강제적으로 독일연방에서 축출되고 독일권은 프로이센 주도로 통합되기 시작합니다.
소극적으로 현실유지에 급급하던 제국도 고조되는 발칸반도의 위기와 독일연방에서의 축출을 극복할 방안을 고심하기
시작합니다.
이것이 바로 1867년 대타협으로 이어집니다..
대타협은 할거 없는 크리스마스에..
역게 프로눈팅러로 하려다가 오-헝에 대한 제 팬심을 억누르지 못하고 글을 쓰고 있습니다...
부족한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