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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포] 흉가 마지막입니다...
게시물ID : humorstory_120790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쟈일리톨
추천 : 1
조회수 : 448회
댓글수 : 1개
등록시간 : 2006/06/29 14:30:04
원래는 몇단락씩 끊어서 올릴라고 했습니다...
워낙 글이 길어서... 다올려달라는 분이 있으시니까
이렇게 올립니다... (사실 글올리기가 힘드네요 ㅠ.ㅠ)
참 이글은 이종호님의 흉가 입니다...
글이 길어도 재미있게보시면 후회는 없을겁니다...
제가 장담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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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죽음의 마을(5) 

구반장은 혜경에게 호되게 당한 그날 이후 혜경이 하는 일에 거의 간섭하지 않았다. 그리고 꼭 필요한 말 외에는 그녀에게 말을 건네는 법도 없었다. 구반장의 그런 태도가 혜경에게 다소 부담이 되긴 했지만 시간이 지나면 자연 해결이 되리라고 그녀는 생각했다. 그러한 두사람의 보이지 않는 신경전 사이에서 오히려 가장 불편한 사람은 바로 박호철 순경이었다. 

하루종일 두사람의 눈치만 살피던 그가 크게 기지개를 키곤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그만 퇴근들 않하세요? 벌써 11시가 다 되어 가는데...." 

그러나 두사람중 누구도 그의 말에 맞장구를 쳐 주는 사람이 없자 그는 머쓱하게 창문을 내다보며 다시 중얼거렸다. 

"정말, 징그럽게 오는구만. 비가 이런 식으로 몇 일만 더 내리면 우리 군은 아주 물바다가 되겠는데요? 아참, 그나저나 오늘 서울에서 방송국 다큐맨터리 제작팀이 목촌리 332번지에서 무슨 촬영을 한다고 하던데 비가 이렇게 와서 제대로 촬영을 할 수 있을지 모르겠네?" 

그러자 그의 말에 혜경과 구반장 두사람이 동시에 고개를 번쩍 들었다. 먼저 입을 연 것은 구반장이었다. 

"이봐, 박순경, 방금 뭐라고 했어?" 

뜻하지 않은 구반장의 반문에 박호철이 얼떨떨한 표정으로 말했다. 

"무..... 슨 소리요?" 

"방금 무슨 다큐맨터리팀이 어쩌고 그랬잖아!" 

"아...예, 그 얘기요? 아까 낮에 행정과장님이 그러시더라구요, 서울에서 온 방송국 사람들이 오늘밤 이번에 살인사건이 일어난 332번지에서 촬영을 하기 위해 허가를 내달라고 해서 내 주었다고. 뭐라더라? 그 곳에 귀신이 있는지 없는지를 밝힌데나? 하여간 방송 만드는 놈들......" 

그러나 박호철의 얘기는 더이상 입 밖으로 나오질 못했다. 구반장이 갑자기 책상을 내리치며 소릴 질렀기 때문이다. 

"그걸 이제 얘기하면 어떻게!" 

갑작스런 고함 소리에 박호철이 영문을 몰라 어리둥절하고 있을때 구반장이 다시 소리쳤다. 

"이런 미친놈들, 죽고 싶어 환장을 했나? 모두 몇 명이래?" 

"그.... 그건 잘....." 

박호철의 말에 구반장이 무너지듯 자리에 주저 앉았다. 그의 얼굴이 창백하게 굳어졌다. 돌연한 구반장의 행동에 어리둥절 하기로 치자면 박호철보단 혜경쪽이 더 했다. 다큐맨터리 팀이 332번지에서 촬영을 한다는 박호철의 얘기를 듣고 놀란 것은 오히려 혜경이었다. 아직 사건이 완전히 해결된 것도 아니고 무엇보다 그 곳을 취재했던 기자들이 모두 끔찍한 죽음을 당했다는 사실 때문이었다. 바로 오늘만 해도 이번 살인사건 취재를 했던 기자와 카메라맨이 모두 같은 방법으로 살해당했다는 소식을 시경으로부터 전해 들은 그녀였다. 그런데 구반장이 저렇게 펄쩍 뛰는 것은 그녀로선 도저히 이해가 가지 않는 일이었다. 332번지 일이라면 무조건 빠지려고만 하던 구반장이 아니던가. 그녀는 구반장의 진의를 파악하려는듯 그의 행동을 유심히 살폈다. 그는 몹시 불안한 표정으로 사무실을 서성거렸다. 뭔가 깊은 생각에 빠져 있는게 틀림없었다. 그녀가 이 곳 H군에 배치를 받은 이후 처음 보는 구반장의 모습이기도 했다. 갑자기 구반장이 소리쳤다. 

"지금 출동할 수 있는 인원이 우리 셋 뿐인가?" 

박호철이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네!" 

그는 다시 실내를 서성이기 시작했다. 시종 손을 마주 비벼대며 초조한 기색을 감추질 못하던 구반장이 마침내 어떤 결심이 선 듯 박호철과 혜경을 보곤 무겁게 입을 열었다. 혜경은 지금 그의 표정이 몹시 낯설다는 느낌을 받았다. 

"두 사람 다 당장 나하고 같이 목촌리로 출동할 준비해. 그리고 무기고에서 M16 소총, 권총, 실탄.... 또 뭐가 있지? 하옇튼 있는대로 모두 챙겨, 어서!" 

구반장의 말에 혜경과 박호철 두사람은 동시에 놀라서 입을 벌였다. 

"네? 반장님 방금...." 

"내말 안들려? 어서 서두르란 말야, 시간이 없어! 어서!" 

갑자기 목촌리로 출동하자는 것도 이해가 가지 않는 일인데 무기까지 챙기라니. 혜경은 구반장이 지금 어떻게 된게 아닌가 하는 의심이 들 정도였다. 그러나 구반장의 표정은 긴지하고 잔뜩 긴장되어 있었다. 구반장의 지시대로 세사람이 무기를 챙겨 목촌리로 출발한 것은 11시가 조금 넘은 시간이었다. 세사람 모두 실탄이 장전된 권총을 한 자루씩 차고 있었고 구반장은 M16 소총까지 곧추세워 들고 있었다. 박호철은 운전하는데 여간 애를 먹는 눈치가 아니었다. 칠흙같은 어둠에다 억수같이 쏟아지는 빗물때문에 승용차의 시야는 불과 10미터도 채 되지 않았다. 윈도 부러쉬를 아무리 빨리 움직여도 빗물을 감당하진 못했다. 차안에서 구반장은 한마디도 말이 없었다. 그는 눈을 감은채 깊은 생각에 잠겨 있었다. 박호철이 운전을 하며 연신 룸미러로 구반장의 안색을 살피곤 혜경과 눈이 마추졌지만 영문을 모르긴 두사람 다 마찬가지였다. 무거운 침묵을 먼저 깨뜨린 것은 혜경이었다. 

"저기, 반장님! 저희도 도대체 무슨 일인지나 알고 가야죠. 이렇게 무작정 갈 순 없잖아요" 

그러나 구반장은 여전히 눈을 감은채 아무 말이 없었다. 참지 못한 혜경이 다시 말을 하려고 하는 순간 구반장이 눈을 떴다. 

"윤형사, 332번지 흉가에 대한 수사는 잘 진행되나?" 

"네?" 

"수사에 진전이 있냐고...." 

"뭐, 아직은..... 하지만 몇가지 사실들을 알아내긴 했어요. 그 흉가를 중심으로 한 목촌리 마을의 내력에 대한 것들인데....." 

"그럼, 이번 같은 살인사건이 처음이 아니란 것도 알아냈겠구만!" 

"그럼, 반장님도 알고 계셨어요?" 

"윤형사는 귀신의 존재를 믿어?" 

"귀.... 귀신요?" 

"그래, 귀신!" 

"그.... 글쎄요" 

"우린 지금 귀신과 싸우러 가는거야" 

"그.... 그게 무슨 말씀이시죠?" 

혜경은 놀라 눈을 크게 떴다. 그리곤 구반장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틀림없는 구반장이었지만 그의 눈은 평소 그의 눈빛이 아니었다. 알 수 없는 광기와 형언키 어려운 공포, 그리고 그 너머로 얼핏 보이는 죽음의 그림자. 그런 것들이 그의 눈엔 진하게 베어 있었다. 혜경은 지금 구반장의 눈빛과 비슷한 눈빛을 어디선가 보았다는 것을 기억해 냈다. 그건 바로 목촌리 주민들에게서 공통적으로 느껴지던 눈빛이었다. 


5. 공포의 밤(1) 

노인들은 모두가 마을의 주민들이었다. 그런데 무슨 영문인지 계속해서 촬영팀의 철수를 요구했다. 이영우가 계속해서 노인들을 설득하려 했지만 별로 성과는 없어 보였다. 

"몇 번을 말씀 드려야 아시겠어요? 저희는 분명히 군에서 촬영 허가를 정식으로 받고 온 사람들입니다. 그러니 공연히 시간 낭비 마시고 어서 집으로 돌아들 가세요" 

그러나 노인들은 물러서긴 커녕 더욱 무서운 눈으로 스텝들을 노려보며 소리쳤다. 

"당신들이 오늘밤 이곳에 있으면 많은 사람들이 죽어, 모두..... 모두가 죽을게야. 어서 그 집에서 나오라니깐!" 

"무서운 일이 벌어질거야, 당신들이 상상도 할 수 없는 무서운 일이....." 

한 노인은 눈 앞에 정말 그가 말하는 무서운 일이 벌어지기라도 한 듯 부르르 몸을 떨었다. 보다 못해 해일이 앞으로 나섰다. 노인들이 뭔가 알고 있을 것이라는 생각 때문이었다. 

"사연이야 어찌 되었던 비가 쏟아지는데 그렇게 밖에들 계시지 마시고 이리로 올라 오셔서 저희하고 차근 차근 얘기를 좀 하시죠" 

"우린 안 올라가, 아니, 못 올라가! 그 끔찍한 집으로는 절대 못 올라가" 

"좋습니다. 그럼 제가 내려가죠" 

해일이 대청마루 아래 노인들 앞으로 다가섰다. 가까이 다가 서서 보니 과연 노인들의 얼굴엔 그들의 말처럼 두려움이 가득 했다. 스텝들에게 호통을 치고 있었지만 정작 겁에 질려 있는 것은 그들이었다. 

"저는 정해일이라고 합니다. 촬영팀의 책임자죠. 노인장들이 두려워 하는 것들이 도대체 무엇입니까? 저희도 영문을 알아야 철수를 하든 말든 할 게 아닙니까? 이 집에서 무슨 일이 있었던 거죠?" 

해일이 구체적으로 묻고 나서자 노인들의 얼굴에 동요의 빛이 나타났다. 그들은 두려운 눈길로 해일을 바라보며 뒤로 주춤거리며 물러섰다. 해일은 그들에게서 뭔가 실마리를 풀 수 있으리란 기대로 더욱 다가서며 다그쳤다. 

"이곳에서 얼마전에 일어난 살인사건에 대해서도 알고 계시죠? 그리고 그 해괴한 살인사건이 바로 이 집과 관련이 있는거죠? 그렇죠? 제발 말씀해 주세요. 제 친구도 이 집을 취재 왔다가 여기서 죽은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끔찍한 죽음을 당했습니다. 이 집에서 무슨 일이 일어난 겁니까?" 

그러자 노인들이 더욱 뒤로 물러서며 하얗게 질린 표정으로 소리쳤다. 

"당장 그 곳에서 나오라니까 무슨 말이 그리 많아! 좋아, 정 너희들이 죽기를 원한다면 우리도 별 수 없지. 우린 아는게 아무것도 없어. 그리고 본 것도 들은 것도 없어. 그러니 너희들이 무슨 일을 당하든 우린 모르는 일이야" 

말을 마친 노인들이 싸늘한 표정으로 스텝들을 한 사람씩 바라보았다. 그 눈빛은 마치 사형 선고를 받은 사형수를 보는듯한 눈빛이어서 스텝들은 하나같이 섬?쓺한 기분을 떨쳐 버릴 수가 없었다. 노인들은 천천히 뒤로 물러나 마당을 빠져 나갔다. 그리곤 뒤도 돌아보지 않고 자신이 왔던 길을 되돌아 가고 있었다. 스텝들 모두가 께름칙한 표정으로 사라지는 노인들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모두가 표정이 밝지 않았다. 이영우가 노인들이 사라진 고개쪽을 보면서 말했다. 

"기분 나쁜 노인들일세? 왜 우리보고 자꾸 이 집에서 나오라고 했을까요? 뭔가 사연이 있긴 있는 것 같은데...." 

이번엔 강은영이 나섰다. 

"참, 근데 정PD님 아까 이곳에서 살인사건이 있었단 얘기는 뭐예요? 그리고 뭐 친구 어쩌고 하신 것 같은데, 저는 처음 듣는 얘긴데, 다른 사람들은 알고 있어요?" 

스텝들의 눈길이 일제히 해일에게 집중되었다. 고개를 숙인채 잠시 망설이던 해일이 무겁게 입을 열었다. 

"여러분이 들은 대로입니다. 얼마 전 바로 이 흉가에서 살인사건이 있었습니다. 여러분도 아마 신문에서 보았을 겁니다. 강원도 어느 지역에서 세명의 신문기자와 사진기자가 짐승에 뜯기고 죽창에 찔려 죽었다며 한창 메스컴에서 떠들었던 사건 말입니다. 그 사건이 일어난 곳이 바로 이 곳입니다" 

해일의 말에 스텝들이 술렁거렸다. 특히 강은영은 놀라서 소리를 지르려 다 가까스로 참았다. 

"저.... 정말 이곳에서 그 끔찍한 사건이 일어 났다는 거예요?" 

"아니, 그럼 출발하기 전에 왜 아무 말도 하지 않으셨어요? 그리고 친구 얘긴 또 뭐죠?" 

"아직 경찰에서 공식발표는 하지 않고 있지만 저희 방송국 보도국에 김한수 기자라고 있습니다. 그는 제 친한 친구입니다. 그 역시 이곳에 취재를 왔다가 똑같이 끔찍한 모습으로 살해 되었습니다. 그리고 김감독님의 후배로 김기자와 함께 이곳에 취재왔던 이창수라는 카메라맨 역시 그와 함께 살해 되었고...." 

스텝들의 술렁임이 더욱 커졌다. 

"미안합니다. 이런 사실들을 미리 얘기하지 못해서.... 하지만 행여라도 괜한 선입견들을 가질까봐 말을 하지 않은 겁니다. 중요한 것은 바로 이 곳에 뭔가가 있다는 겁니다. 단순히 우리가 귀신이라고 부르는 그런 것인지 아니면 또 다른 것인지 저는 모릅니다. 하지만 우리가 이곳에 모인 이유는 바로 그걸 알아내기 위해서 입니다" 

아무도 입을 여는 사람이 없었다. 해일은 이럴줄 알았으면 출발전 미리 얘기할걸 잘못 했다는 후회가 되었다. 침묵을 깨뜨린 사람은 의외로 김감독이었다. 

"다들 새삼스럽게 왜들 그래? 지금 귀신이 무서워서 떨고 있는거야? 모두가 여기까지 귀신 찾으러 온 사람들 아니었어? 사실 나는 정PD한테 출발전 모든 얘기들을 들었다구. 그리고 그땐 별 얘기 아니었어. 괜히 여기와서 이상한 노인들 나타나 한번 휘젖고 나니까 엉뚱한 생각들을 하는거지. 어느 흉가나 집에 들어가지 말라는 사람 한명쯤 없는 곳 봤어? 그리고 사람 한두명 안 죽은 흉가봤어?" 

김감독의 말이 끝나자 배영환이 나서서 분위기를 바꾸었다. 

"김감독님 말이 맞아요, 괜히 쓸데없는 공상들 하지 말고 어서 일이나 합시다. 자, 다들 일어나요" 

"그래요, 일합시다. 그나저나 저 비나 좀 그쳤으면 좋겠구만" 

스텝들은 다시 주섬 주섬 자리에서 일어나 각자의 위치로 돌아갔다. 김감독과 박희철은 광으로, 배영환은 비닐에 적외선 카메라를 단단히 싼 다음 비가 쏟아지는 마당으로, 강은영은 김혜진과 함께 각 방을 돌아 다니며 사진을 찍어야 했다. 그리고 해일은 이정우와 함께 전체를 돌아 다니며 촬영을 진행해야 했다. 정각 자정이 되면 광에서 무녀 이정란이 귀신을 부르기로 되어 있었다. 자정까진 10분 밖에 남지 않았다. 

* * * 

"반장님, 길이 완전히 엉망이예요. 온통 진흙탕이라구요" 

앞장 서서 걷고 있던 박호철이 소리쳤다. 빗소리가 워낙 커서 바로 앞에서 외치는 그의 소리조차 잘 들리지 않을 지경이었다. 박호철의 말대로 험한 산길인데다 온통 진흙탕이라 한 걸음 떼어 놓기가 여간 힘든게 아니었다. 박호철의 뒤에 구반장이 있었고 그 뒤를 혜경이 따르고 있었다. 혜경의 손에 들린 렌턴 불빛이 비틀거리는 그녀의 움직임만큼이나 불안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박순경, 그 쪽 말고 아랫쪽으로 돌아가! 낙엽들이 쌓인 쪽이 훨씬 걷기가 나을거야" 

구반장이 목청껏 소리쳤다. 하지만 낙엽이 있는 아래쪽도 걷기가 힘들긴 마찬가지였다. 세사람은 번번히 아래쪽으로 미끄러지곤 했던 것이다. 결사적으로 산길을 오르는 구반장의 뒷모습을 보며 혜경은 많은 혼란을 느꼈다. 구반장이 이번 사건에 대해 자신보다 훨씬 더 많은 것을 알고 있으리란 생각 때문이었다. 그렇다면 반장은 왜 자신이 흉가에서 일어난 사건에 관심을 가지는 것을 그토록 싫어 했을까? 구반장의 얼굴에 나타났던 그 공포와 두려움의 정체는 무엇일까? 그리고 엉뚱하게도 무기를 휴대하라는 이유는? 

의문에 의문이 꼬리를 물고 혜경의 가슴을 두들겨 댔다. 혜경이 거친 숨을 몰아쉬며 구반장을 향해 소리쳤다. 

"반장님, 말씀해 주세요. 흉가에 어떤 비밀이 있는 거죠? 반장님은 이번 사건에 대해 뭔가 알고 계시죠?" 

"..............." 

"말씀해 주세요" 

"목촌리 사건을 취재하던 신문기자나 취재기자들이 모조리 죽어 나간걸 알고 있나?" 

"네, 알고 있어요" 

"그들이 왜 죽었는지 알아? 목촌리는 자신을 세상에 드러내길 싫어해. 세상이 목촌리에 대해 알려고 하는 걸 아주 싫어 한다구! 그래서 그들이 죽은 거야. 목촌리를 세상에 드러내려 하는 자들은 모두 죽게 되어 있어!" 

"그게 무슨 말이세요?" 

"목촌리에는 살아있는 유령들이 있어" 

"유령이라니요? 전 도대체....." 

"그래, 그들은 아주 끔찍한 것 들이야. 그들은 목촌리 사람들 모두가 죽기를원하는 거야. 그것도 아주 교활한 방법으로, 결코 서두르지 않고..... 오랜 세월 고통 받다 죽기를 원하는 거지" 

구반장은 도무지 알아 들을 수 없는 얘기들을 미친 사람처럼 중얼거렸다. 

"이제 목촌리 주민들은 그들의 존재와 자신들의 삶을 운명으로 체념하고 있어. 아무도 거기에 대해 새삼스레 말을 꺼내는 사람은 없지. 보통 사람들이 그저 운명처럼 기다리는 죽음을 그들도 기다리는거야. 다만 방식이 조금 다를 뿐이지" 

"전 도무지 무슨 말인지....." 

"아무리 과학이 발달하고 세상이 달라졌다지만 무엇으로도 설명할 수 없고 변하지 않는 것들이 있지. 목촌리가 바로 그래. 아주 오래전부터 그들은 목촌리에 존재해 왔어. 그들은 목촌리를 알려고 하는 사람들과 목촌리 주민들 모두를 죽이는거야. 나 또한 머지않아 그들이 데리러 올거야. 나도 목촌리 출신이거든!" 

"반장님이 목촌리 출신이라구요?" 

"목촌리 사람들의 운명은 둘중 하나야! 어느날밤 예고없이 찾아온 그들에 의해 죽음을 맞던지, 정신병자가 되어 모든걸 잊어버리던지......" 

"도대체 그들이 누구예요? 왜 막지 않는거죠?" 

"막을 수가 없기 때문이야. 그들은 목촌리 사람들의 삶속에서만 존재하거든. 아마 내 모든 얘길 들으면 윤형사 역시 날 정신병자 취급을 하겠지만 오늘밤 무사히 살아남는다면 모든걸 얘기해 주지. 그땐 윤형사도 이미 목촌리 주민과 한배를 타고 있을테니까. 지금 몇시야?" 

"이제 막 자정을 넘어섰는데요?" 

"젠장! 벌써 거나하게 잔치가 벌어졌겠구만!" 

5. 공포의 밤(2) 

이정란의 몸이 조금씩 떨리기 시작했다. 김감독은 그녀의 모습을 카메라에 담고 있었고 나머지 스텝들은 휴대용 램프 하나를 가운데 밝혀두고 이정란을 지켜보고 있었다. 자정을 넘자 곧바로 그녀는 집안에 있는 귀신을 불러서 이 집안의 내력을 알아 보겠다고 했다. 다른 스텝들에 비해 유독 스크립터 김혜진만이 잔뜩 겁먹은 얼굴로 인상을 찡그리고 있었다. 그녀는 입사한지 얼마 안된 신입사원이었다. 한 두어번 촬영을 따라 다녔다지만 이런 촬영이 그녀에겐 처음 있는 일이었다. 

이정란이 신이 내리면 저절로 움직일 것이라며 자신의 앞에 꽂아둔 신대는 아직 아무런 움직임이 없었다. 이정란은 계속해서 귀신을 불러 들이는 주문을 중얼거리며 외우고 있었고 그녀의 이마엔 땀이 번지고 있었다. 시간이 흐르며 이정란의 중얼거림이 점차 커지기 시작했다. 그러나 무슨 말인지 알아 듣긴 불가능했다. 그것은 주절거림 같기도 했고 신음 소리같기도 했다. 해일은 두려움과 기대가 반쯤 섞인 심정으로 그녀를 지켜보고 있었다. 그 때였다. 이정란의 소리가 갑자기 더욱 커지며 땅 바닥에 꽂아둔 신대의 방울이 딸랑하는 소리를 낸것은. 그것을 지켜본 모든 스텝들이 숨을 멈추었다. 김혜진이 겁먹은 소리로 말했다. 

"어.... 어떻게! 정말 움직였어요" 

이정우가 김혜진을 향해 낮고 위압적인 목소리로 으르렁 거렸다. 

"조용히 해!" 

신대에 매달린 방울의 소리가 점점 커지기 시작했고 신대는 눈에 확연히 보일 정도로 요동을 치며 흔들리고 있었다. 신대의 흔들림 만큼이나 이정란의 몸이 더욱 무섭게 떨리고 시작했고 그녀의 중얼거림 또한 더욱 커졌다. 전 스텝들의 긴장감이 최고조에 달할 때였다. 김감독이 흥분된 목소리로 해일을 불렀다. 

"저.... 정PD!" 

그는 창백한 얼굴로 카메라의 화인더를 가리켰다. 해일이 카메라의 화인더를 보았을때 그 안에선 놀라운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육안으론 전혀 보이지 않던 이상한 기운이 그녀를 감싸며 그녀의 주위를 에워싸기 시작한 것이다. 시퍼런 연기같기도 한 그것은 이정란의 입을 통해 몸속으로 들락거리고 있었다. 그리고 그때마다 이정란의 얼굴은 고통으로 일그러지고 있었다. 그러자 몇 초 후 이정란의 신음 소리가 급격하게 불규칙해지더니 마침내 울먹임으로 변해 버렸다. 고통으로 일그러진 그녀의 얼굴엔 확연히 드러날 정도의극심한 공포심이 드러났고 고통스런 울먹임은 금방이라도 숨이 넘어갈 것 같았다. 해일이 뭔가 잘못되어 가고 있다는 막연한 불안감을 느낄 즈음 그녀를 주의깊게 관찰하던 오세창이 당황한 목소리로 외쳤다. 

"이.... 이게 아니예요" 

스텝들이 모두 오세창을 바라보았다. 

"뭐....뭔가 잘못 됐어요, 중지 시키고 이선생을 깨워야 해요, 어서!" 

갑작스런 그의 말에 스텝들이 술렁거렸다. 

"내 말 안들려요? 그녀를 깨워야 한다구요!" 

비로소 해일이 다급하게 소리쳤다. 

"물 갖고 와요, 물!" 

비로소 다른 스텝들이 사태의 심각성을 깨닫고물을 찾아 허둥대고 해일과 오세창은 달겨들어 이정란을 잡고 흔들었다. 

"정신 차려요, 이선생, 정신 차려요!" 

스텝들이 떠온 물을 이정란에게 끼얹었다. 그러나 그녀는 전혀 깨어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그녀의 몸은 더욱 심하게 떨릴 뿐이었다. 다시 누군가가 소리쳤다. 

"빨리 어떻게 좀 해봐요, 저러다 사람 잡겠어요!" 

"광에서 끌어내요, 밖으로 끌어내라구!" 

모든 스텝들이 순식간에 혼란에 빠져 허둥거렸다. 두서없는 외침소리가 난무했다. 그러나 이정란을 끌어내기란 결코 쉽지 않았다. 해일을 비롯한 이정우, 오세창, 박희철등 네명의 장정들이 달겨들었지만 그녀의 몸은 땅에 박힌듯 꼼짝도 하지 않았다. 마침내 그녀의 눈동자가 하얀 흰자위를 드러내고 입에서 거품을 풀기 시작했다. 김혜란이 울음을 터뜨렸다. 

"꼼짝도 안해요, 밖으로 끌어낼 수가 없다구!" 

"도대체 어떻게 된거야, 무슨 일이야!" 

"방법을 찾아야지, 방법을!" 

여기 저기서 흥분한 외침 소리들이 튀어 나왔지만 상황은 조금도 나아지지 않았다. 어느 순간 이정란의 신음이 찢어지는 듯한 비명으로 바뀌었다. 그리고 이정란을 붙잡고 있던 사람들이 믿을 수 없는 강한 힘에 의해 한꺼번에 그녀의 몸에서 밀려났다. 그녀는 더욱 고통스런 비명을 질러댔다. 모든 스텝들의 표정이 하얗게 변했다. 그 때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이정란의 몸이 서서히 공중으로 떠오르기 시작한 것이다. 순식간에 비좁은 광 안에는 숨 막히는 공포와 전율로 가득 찼다. 모두들 겁에 질린 눈으로 그녀를 올려다 보았다. 그때였다. 찢어지는 비명소리와 함께 그녀의 왼쪽팔이 무엇인가에 물러 뜯기듯 제멋대로 요동을 치더니 그녀의 흰색 한복이 붉게 물들며 뜨거운 핏줄기가 솟구친 것은. 

"으악!"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여기 저기서 비명 소리가 터져 나왔다. 누군가 뭐라고 외치고 있었지만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그러는 동안에도 이정란의 몸은 계속해서 무엇인가에 물어 뜯기고 있는 듯 했으며 그녀의 고통스런 비명소리는 더이상 들을 수 없을만큼 처절하게 변해가고 있었다. 순식간에 광안은 지옥으로 변해 버렸다. 차마 눈뜨고 볼 수 없는 처참한 광경이 그들의 앞에서 벌어지고 있었다. 가장 먼저 광을 뛰쳐 나간 사람은 김혜진이었다. 그녀는 거의 정신 나간 사람마냥 비명을 지르며 광을 뛰쳐 나갔다. 그 뒤를 이어 또 누군가가 뛰쳐 나가고, 또 나가고..... 해일은 숨조차 쉴 수 없는 공포로 이정란의 죽어가는 모습을 지켜 보았다. 해일의 머릿속에 악마의 포식이란 어느 책 제목이 떠올렸다. 그리고 거의 동시에 그의 귓전으로 죽은 김한수의 절규가 들려왔다. 

'흉가에 가지마! 놈들은 끔찍한 괴물들이야, 무서워, 해일아! 무서워!' 

해일이 검붉은 피를 온몸에 흠뻑 뒤집어 쓴 채 마지막으로 광속에 뛰쳐 나왔을때는 그 역시 이미 제정신이 아니었다. 먼저 나온 스텝들이 마당에서 김혜진과 강은영을 진정시키느라 애를 먹고 있었다. 강은영은 배영환에게 안긴 채 부들 부들떨고 있었고 김혜진은 비가 쏟아지는 마당 한가운데서 계속 비명을 지르며 발버둥치고 있었다. 이정우가 그녀의 따귀를 때리며 소리를 질러댔다. 

"정신 차리란 말야! 제발 조용히 좀 해!" 

모두들 마당 한가운데 얼이 빠진 모습으로 주위를 두리번 거렸다. 그들에겐 자신들의 온 몸을 두들기는 굵은 빗방울조차 느낄 겨를이 없었다.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에 대해 생각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모두의 머릿속에는 어서 이 끔찍한 곳을 벗어나야 한다는 본능 뿐이었다. 해일은 사람의 뇌가 갑자기 그 움직임을 멈춘다면 바로 이런 기분일 것이라는 생각을 했다. 그야말로 머리속은 텅 비어 버렸다. 절망적인 기분으로 주위를 둘러 보았다. 어디를 보아도 칠흙같은 어둠뿐이었다. 배영환이 더이상 참지 못하겠다는듯 발작적으로 일어서며 소리쳤다. 

"뭣들 하는 겁니까? 어서 이 곳을 벗어나지 않고, 난 무서워요. 단 1초도 이 곳에 머무르고 싶지 않다구요!" 

배영환의 말에 강은영이 정신없이 악을 써 댔다. 

"어서 이 곳을 빠져 나가자구요! 난 정말 무서워 죽겠어요, 어서요!" 

다들 공포에 질린 얼굴로 광 쪽에서 시선을 떼질 못했다. 광에선 무슨 일이 있었냐는듯 아직도 휴대용 램프의 희미한 불빛이 평화롭게 새어 나오고 있었다. 그때 해일이 낮게 소리쳤다. 

"다들 조용히!" 

그의 한마디에 모두의 숨이 멎었다. 

"저 소리..... 저 소리 들려요?" 

모두의 눈길이 광쪽으로 쏠렸다. 

5. 공포의 밤(3) 

분명 그 소리는 광에서 들려오고 있었다.빗소리에 묻혀 전해오는 그 소리는 응얼거림 같기도 하고 짐승의 울음소리 같기도 했다. 강은영이 쥐어짜는 음성으로 울먹였다. 

"제발! 난 더이상 못 참겠어요. 어서 여기서 나가요, 어서!" 

"뭔가 있나봐요! 뭔가 있다구요!" 

흥분과 두려움이 섞인 외침소리가 여기저기서 튀어 나왔다. 그때 해일은 그들의 주위를 둘러싸며 다가오는 어떤 것을 보았다. 안개였다. 다시 불꽃처럼 김한수의 외침이 뇌리를 스쳤다. 

'으으으..... 놈들이 왔어, 안개가 보이면 놈들이 온거야. 제기랄! 도망 갈수 없어! 살려줘!' 

온몸에 피가 곤두서는 섬뜩함. 해일은 더듬거리듯 간신히 소리쳤다. 

"다.... 다들 어서 이곳에서 나가야 해요. 이곳을 나가야 한다구, 어서!" 

비가 쏟아지는 진흙탕 속에서 그들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마을쪽을 향해 달아나기 시작했다. 진흙탕속에 미끄러지고 엎어지면서 그들은 한꺼번에 달리기 시작했다. 해일이 문득 뒤를 돌아 보았다. 김혜진이 움직이지 못하고 비가 쏟아지는 마당 한가운데 그대로 남아 있었다. 돌아보니 나머지 일행들은 벌써 고개쪽을 오르기 시작했다. 해일이 다급하게 소리쳤다. 

"김혜진, 뭐하는 거야, 어서와!" 

그러나 그녀는 이미 의식을 잃은 사람마냥 멍하니 그 자리에서 움직일줄 몰랐다. 그녀를 둘러싸는 안개의 농도가 점점 짙어지고 있었다. 해일은 그녀를 향해 오던 길을 달려갔다. 해일이 그녀의 팔을 움켜쥐듯 잡고 일으켰을때 그녀는 거의 눈에 촛점을 잃은 채 사시나무 떨듯 떨고 있었다. 

"정신차려! 여기 있으면 안돼! 도망가야 한다구!" 

해일이 그녀를 잡고 흔들며 악을 썼지만 그녀의 눈에는 더이상 해일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 것 같았다. 마침내 해일이 그녀를 진흙탕에서 질질끌다시피 하며 달아나기 시작할 때 광쪽에서 더욱 분명한 짐승의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그가 본능적으로 광쪽을 돌아 보았을때 그는 광의 흐린 불빛을 등지고 이쪽을 노려보며 서 있는 십여명의 사람들을 보았다. 그들은 한 손에 긴 막대 같은 것을 들고 있었으며 그들의 뒤쪽에선 막 푸른 광채가 도는 눈빛들이 어슬렁거리며 기어나오고 있었다. 해일은 그것들이 짐승이라고 생각했다. 한마리, 두마리, 세마리.... 그것들은 계속해서 기어 나왔다. 그리곤 이쪽을 향해 똑바로 달려오기 시작했다. 해일이 마지막 안간힘을 다해 그녀를 잡아 끌며 악을 썼다. 

"일어나, 일어나란 말이야! 정신차려!" 

그러나 혜진의 의식은 이미 완전한 두려움에 휩싸여 아무런 반응도 보이질 못했다. 짐승들은 순식간에 그들과의 거리를 좁혀 왔으며 해일은 더이상 그녀를 구할 수 없음을 깨달았다. 가슴 밑바닥에서 터질 것 같은 공포와 좌절이 한꺼번에 몰려왔다. 

짐승들은 바로 10여미터 앞까지 다가와 있었다. 그것들은 금방이라도 두사람을 덮칠듯 으르렁거리며 천천히 한발자욱씩 앞으로 다가왔다. 그는 진흙탕에 쓰러진 김혜진을 내려보았다. 가엾게도 그녀의 촛점없는눈동자가 그를 올려다 보고 있었다. 울컥하고 눈물이 솟구치며 목이 메어왔다. 

"미.... 미안해, 정말..... 미안해!" 

그는 떨리는 손으로 그녀의 손을 놓았다. 그리곤 뒤돌아 달리기 시작했다. 그녀를 남겨둔채 그는 진흙탕을 미친듯 달리기 시작했다. 얼굴에 굵은 빗방울이 아프도록 부딪혀 왔다. 등뒤에서 짐승들의 포효 소리와 함께 처절한 비명소리가 들려왔다. 해일은 자신도 모르게 뒤를 돌아 보았다. 

짐승들이 혜진을 둘러싸고 있었고 그 한가운데 아까 보았던 일단의 무리들이 혜진을 향해 손에 든 막대를 치켜 올리고 있었다. 해일은 감전된 듯 그 자리에서 꼼짝도 하지 못한채 그들을 지켜 보았다. 해일은 도대체 그들이 무엇을 하려는지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그런 해일을 비웃기라도 하듯 그들은 일제히 막대를 치켜들었다. 그리곤 해일이 미쳐 소리를 칠 틈도 없이 막대를 가차없이 혜진을 향해 내리 꽂았다. 처참한 비명소리가 그녀의 입에서 터져 나왔고 해일은 온몸을 부들거리며 떨었다. 사내는 계속해서 그녀를 향해 막대를 내리 꽂았고 이윽고 그들이 뒤로 물러서며 낯선 소리를 냈다. 

"쉬익! 쉭! 쉭!" 

마치 쇳소리 같기도 하고 짐승의 숨소리 같기도 한 그 소리를 기다렸다는 듯이 짐승들이 그녀를 향해 달겨들었다. 뒤로 물러 선 그들은 똑바로 해일을 노려보았다. 해일은 순간 아찔한 현기증을 느꼈다. 해일은 비틀거리며 다시 달아나기 시작했다. 가슴이 터질 것 처럼 요동을 치고 있었다. 

6. 살아있는 유령(1) 

맨 앞에 걸어가던 박호철이 그 자리에 멈추었다. 

"무슨 일이야?" 

구반장이 소리치며 그를 향해 다가갔다. 그러나 무슨 영문인지 구반장 역시 더이상 앞으로 나아가질 못하고 그 자리에 우뚝 서 있었다. 이제 5분만 더 가면 마을이 나타날텐데. 

"왜 안 가세요?" 

혜경이 숨을 헐떡이며 다가섰을때 구반장이 초조하게 내뱉았다. 

"젠장, 물이 너무 불었어!" 

혜경이 그들의 아래쪽으로 렌턴을 비추었다. 그 곳엔 마을과 외부를 이어주는 다리가 있는 자리였다. 그런데 그 다리위로 거센 물살이 범람하고 있었다. 다리는 아직까지 형체를 가지고 있었지만 언제 무너질지 모를 만큼 위태로워 보였다. 그녀는 이곳에 올때마다 그 다리가 상당히 위험스럽다고 느꼈던 기억을 되살릴 수 있었다. 멀리 어렴풋이 마을의 불빛이 보였다. 

"반장님, 돌아갈 길은 없나요?" 

"없어, 이 길 뿐이야!" 

검은 물살 아래로 다리의 윤곽은 보였지만 누군가 그 위에 한 사람만 올라섰다간 금방이라도 거센 물살과 함께 사라져 버릴 것처럼 다리의 지탱력은 불안해 보였다. 빗방울은 조금도 기세를 누추지 않고 거세게 내리고 있었고 이대로 기다리다간 그나마 다리의 형체마저 없어져 버릴 것이었다. 구반장은 진흙탕 위에 아예 주저 앉아 머리를 감싸고 있었고 박호철과 혜경은 원망스런 눈빛으로 다리를 쳐다 보았다. 구반장의 말대로라면 지금쯤 다리 건너편 마을에는 많은 사람들의 생명이 위험에 처해 있을 것이다. 구반장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서며 절박하게 소리쳤다. 

"다리를 건너야 겠어, 내가 먼저 건널테니 무사히 건너면 뒤따라 와!" 

"반장님, 너무 위험해요!" 

"방법이 없어, 아무리 내가 비겁한 놈이라도 그 많은 사람들이 고스란히 놈들에게 당하도록 내버려둘 순 없어!" 

구반장이 성큼성큼 다리 앞으로 다가갔다. 그것은 혜경이 알고 있던 구반장의 모습으로는 도저히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었다. 구반장이 한발을 다리위로 내밀었다. 강한 물살이 그의 발목을 휘감아 왔다. 

"반장님, 제발 조심하세요" 

혜경이 할 수 있는 말은 그것 밖에 없었다. 그녀는 진심으로 반장을 걱정하고 있었다. 그리고 한편으론 반장에 대한 자신의 오해에 대해 많은 후회를 하고 있었다. 다리 건너편에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건 다리를 건너기만 하면 앞으로 그녀는 구반장을 무조건 믿고 따르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도 구반장이 다리를 무사히 건넌 다음의 일이었다. 구반장이 두 다리를 동시에 다리에 올려 놓았다. 잠시 균형을 잃고 비틀하던 구반장이 가까스로 균형을 잡았다. 그리고 그는 조심 조심 다리를 건너가기 시작했다. 

그는 분명 다리 건너편에서 벌어지는 어떤 일에 대한 강한 사명감 같은 것을 느끼고 있는 것 같았다. 강한 물살이 그의 발목을 계속 위협하고 있었다. 그의 발목 아래에 버티고 잇는 다리가 어느 정도의 버팀력을 가지고 있는지는 전혀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혜경과 박호철이 조바심을 가지고 지켜보는 가운데 구반장이 무사히 다리를 건너갔다. 미쳐 마음을 놓기도 전에 다음은 박호철의 차례였다. 구반장이 건너편에서 소리를 질렀다. 

"균형을 잃지 말고 가능한 바닥에서 발을 높이 들지 말고 끌면서 건너와, 발을 들면 안돼!" 

박호철이 잔뜩 겁먹은 얼굴로 다리위로 올라섰다. 그 역시 반장의 지시대로 조심스럽게 다리를 무사히 건넜다. 혜경은 다리가 생각보단 튼튼하다고 생각했다. 자신의 차례가 되자 혜경은 주저없이 다리위에 올라섰다. 바라보던 것보다 물살의 저항은 훨씬 강했다. 그녀는 반장의 말대로 다리를 끌면서 천천히 다리를 건너갔다. 그런데 그녀가 다리를 거의 건넜을때였다. 그녀가 밟고 있는 다리가 휘청했다. 정신이 아찔해지는 사이 다리가 한순간에 허물어 졌다. 너무도 쉽고 간단하게. 


6. 살아있는 유령(2) 

비명을 지를 틈도 없이 그녀는 검은 물살 속으로 휩쓸렸다. 눈앞에 구반장과 박호철이 놀라는 모습이 보였지만 손을 뻗치기엔 먼 거리였다. 

"윤형사!" 

구반장이 악을 쓰며 소리를 질렀지만 빗소리와 그녀를 덮치는 검은 물살 때문에 그녀는 그 소리를 들을 수가 없었다. 빠른 속도로 아래로 떠내려 간다는 생각과 끊임없이 입안으로 몰려드는 검은 물이 그녀의 의식을 둔화시키고 있었다. 헤엄을 쳐보려고 노력해 보았지만 강한 물살은 몸의 균형을 잡는 것조차 힘들게 만들었다. 차츰 몸에 힘이 빠져나가고 의식이 흐려지면서 그녀는 죽음이란 단어를 자연스레 떠올렸다. 그때 그녀는 누군가 자신의 몸을 붙잡는 손길을 느꼈다. 그녀는 그것이 현실의 일인지 확신할 수 없었다. 하지만 그녀의 몸은 더 이상 아래로 떠내려가지 않았다. 그때 그녀의 귀에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서 끌어올려, 어서!" 

구반장의 목소리였다. 그녀는 최대한 의식을 가다듬어 고개를 돌렸다. 한 손으론 나뭇가지를 붙잡고 한손으로 자신을 붙잡은채 물속에서 허우적거리는 구반장의 힘겨운 얼굴이 그녀의 시야에 들어왔다. 물 밖에선 박호철이 몸이 반쯤 물에 잠긴채 그녀를 끌어 올리느라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얼마간의 사력을 다한 사투끝에 혜경이 가까스로 끌어올려지고 구반장이 비틀거리며 물에서 기어 나왔다. 구반장은 나오자마자 혜경의 옆에 나란히 쓰러지듯 드러누워 가뿐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혜경은 기침을 심하게 했다. 계속해서 구역질이 나와서 그녀는 속이 몹시 쓰라렸다. 

"선배님 괜찮으세요?" 

박호철의 걱정스런 얼굴이 그녀의 눈에 들어왔다. 그녀는 간신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곤 옆을 돌아 보았다. 그녀보다 더 지친 모습의 구반장이 꼼짝도 하지 않고 곁에 누워 있었다. 그는 혜경이 정신을 차린 한참 후에도 그대로 그렇게 누워 있었다. 

* * * 

해일이 쓰러질듯 고개를 넘었을때 그 아래에는 나머지 스텝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들은 고개를 넘어선 후에야 해일과 혜진이 없어졌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러나 어느 누구도 오던 길을 되돌아 갈 사람은 없었다. 그들의 모습을 보고 해일은 무너지듯 쓰러졌다. 해일을 부축한 사람은 이정우였다. 그는 두려운 눈길로 물었다. 

"혜.....진이는요?" 

해일이 고개를 떨구었다. 이정우가 믿을 수 없다는 듯 다시 물었다. 

"설마?" 

해일이 곤혹스럽게 고개를 돌렸다. 김혜진은 이정우와 가장 가까웠다. 이정우는 마치 김혜진을 돌보지 못한 책임이 자신에게 있는 듯 괴로워했다. 김감독이 끼어 들었다. 그는 비교적 안정되고 침착한 목소리로 말했다. 

"도대체 그것들이 다 무엇 이었습니까?" 

"나도..... 잘 모르겠어요. 그것들은..... 광에서 나왔어요" 

"광에서요?" 

"그들이 어디에 숨어 있었는지 모르겠지만 분명 광에서 퍼런 광채를 번득이며 기어 나오는 것을 내 눈으로 똑똑히 보았어요, 처음 보는 짐승들이었어요. 늑대 같기도 하고..... 그리고 그들 속에 누군가가 있었어요" 

"누.... 누군가라니?" 

"틀림없이 사람이었어요. 놈들은 긴 막대기 같은 것을 들고 있었는데 그 놈들이..... 그것으로..... 혜진이를 향해 내리 쳤어요. 몇번 더.... 참혹하게 내리치곤..... 짐승들이......" 

어느 누구도 더이상 입을 여는 사람이 없었다. 대신 그들의 얼굴엔 더욱 분명한 절망의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그들의 모습에서 해일은 이번 일이 바로 자신때문에 생긴 일이라는 생각때문에 견딜 수 없이 마음이 아팠다. 그러나 한편으론 남아있는 사람들이라도 살려야 한다는 절박한 사명감이 그를 압박해 들어왔다. 그 정체를 알 수 없는 끔찍한 짐승들과 낯 모르는 살인마가 잠시후면 자신이 넘어온 바로 그 고개에 얼굴을 내밀 것이다. 

"다들 마음을 단단히 먹읍시다. 이 곳에서 일어나는 일들이 무엇인진 아직 알 수 없지만 일단은 어서 이 곳을 벗어나야 해요, 마을로 가서 도움을 청합시다. 그 사람들은 뭔가 알고 있을 겁니다. 어서 서둘러요!" 

스텝들은 다시 앞쪽에 보이는 불빛을 향해 허우적거리며 달아나기 시작했다. 해일은 맨 뒤에 쳐져 계속 뒤를 돌아보며 걸었다. 그렇지 않으면 금방이라도 그 끔찍한 짐승들의 날카로운 이빨이 등줄기를 꿰뚫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렌턴 하나도 들고 나온 사람이 없어 앞장 서 걷는 김감독은 계속해서 바닥을 나 뒹굴렀다. 마을까지만 가면 무슨 수가 생길 것이라는 막연한 희망이 그들에게 힘을 불어 넣었다. 마침내 마을로 들어서자 첫번째 집의 마당으로 김감독과 배영환이 뛰어 들어가 마구 소리를 질렀다. 그 집엔 다행히 불이 밝혀져 있었다. 스텝들의 얼굴에 다소 안도의 표정이 떠올랐다. 

"아무도 안 계세요, 좀 도와 주세요! 아무도 안 계세요?" 

그러나 안에선 아무런 대답이 없었다. 강은영이 소리쳤다. 

"방문을 열어봐요, 불은 켜져 있잖아요!" 

김감독이 방으로 다가가 방문을 왈칵 잡아 제꼈다. 그러나 방안은 텅 비어 있었다. 

"없어, 아무도 없어!" 

"그.... 그럼, 어서 다음 집으로 가봐요, 어서!" 

"다들 나누어서 사람들을 찾아 봅시다. 저기도 불켜진 집이 한 집 있잖아요" 

우왕 좌왕하며 스텝들이 삼삼오오 흩어져 소리를 질러대며 사람들을 찾았지만 사람들은 약속이나 한 듯 한 사람도 보이질 않고 집들은 하나같이 텅비어 있었다. 스텝들의 얼굴에 다시 초조함과 불안함이 나타나기 시작했고 불행히도 그들의 등뒤 어둠속에서 다시 짐승들의 소름끼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놈들이 왔어!" 

누군가가 절망적으로 소리쳤다. 

"거기도 아무도 없어? 이게 어떻게 된거야!" 

두서없는 외침들이 어둠속에서 터져 나왔고 짐승들의 소리는 더욱 가까워 졌다. 

"잠깐, 이리들 와봐요, 어서!" 

겁에 질려 소리친 사람은 오세창이었다. 스텝들이 정신없이 그 곳으로 몰려 들었다. 그가 가리킨 곳은 어느 집의 커다란 창고였다. 나무 문짝이 든든하게 잠겨있는 그 창고를 문틈으로 들여다 보던 김감독이 '헉'하는 소리와 함께 뒤로 물러섰다. 해일이 앞으로 나서 안을 들여다 보았다. 놀랍게도 그 안에는 어둠속에 웅크린 마을 주민들의 겁에 질린 눈동자가 반짝거리며 빛나고 있었다. 그들 중에는 아까 그들을 찾아와 호통을 치던 노인들 세사람도 함께 있었다. 해일이 문짝을 힘껏 걷어차며 소리쳤다. 

"이봐요, 문 좀 열어주세요, 좀 도와 주세요!" 

그러나 안에서는 아무런 반응도 들려오지 않았다. 이번엔 김감독이 더욱 세게 문짝을 걷어차며 소리를 질렀다. 

"제발, 문 좀 열어 주시오, 짐승들이.... 짐승들이 온다구!" 

그때 등뒤에서 스텝들이 비명을 지르며 악을 썼다. 

"악!" 

"와....왔어, 놈들이 왔다구!" 

"으으...... 저것들이 다 뭐야?" 

강은영이 찢어지는 비명을 질러댔고 촬영보 박희철도 사시나무 떨듯 부들 부들 떨었다. 과연 마당 바로 앞에는 흠뻑 비에 젖은 검은털에 눈에선 시퍼런 광채를 내뿜는 짐승들 수 십마리가 탐욕스런 이빨을 드러낸 채 금방이라도 스텝들을 향해 으르렁대며 다가오고 있었다. 

"도.... 도대체 저것들이 어디서 나타난거야!" 

"설마, 우리가 꿈을 꾸는건 아니겠지?" 

참다 못한 박희철이 창고문을 정신없이 두드리며 악을 써댔다. 

"문 열어, 이 새끼들아! 문 열란 말이야!" 

이번엔 스텝들이 모두 달겨들어 문에 몸을 부딪히며 절박하게 소리를 질러댔다. 마치 그곳이 생사의 경계선이나 되는 것처럼. 

"제발 문 좀 열어 주시오, 제발!" 

그러나 문은 꼼짝도 하지 않고 짐승들은 바로 코 앞까지 다가왔다. 


6. 살아있는 유령(3) 

"제발 문 좀 열어 주시오, 제발!" 

그러나 문은 꼼짝도 하지 않고 짐승들은 바로 코 앞까지 다가왔다. 

"틀렸어, 우린 다 죽었다구, 다 죽었어!" 

배영환이 울음을 터뜨리며 울부짖었다. 그와 거의 동시에 박희철이 앞으로 두어걸음 나서며 옆에 있던 삽을 집어들곤 휘두르며 악을 썼다. 

"덤벼, 이 새끼들아! 덤벼!" 

나머지 스텝들도 짐승들을 향해 소리를 질러대기 시작했다. 그것은 극도의 공포와 긴장감에서 터져 나오는 절박한 외침이었다. 그때 어둠속 어디선가 해일이 불과 몇 분전 들었던 그 섬뜩한 소리들이 여기저기서 다시 들려왔다. 해일은 그 소리가 누구의 소리인지 잘 알고 있었다. 어둠속에서 사람의 그림자가 재빠르게 나타났다간 다시 숨어버리곤 했다. 그리고 그들의 손에는 어김없이 나무 막대가 들려 있었다. 

"쉬익, 쉭! 쉭!" 

약속이나 한 듯 어둠속에서 들려오는 그 소름끼치는 쇳소리에 맞추어 놈들 중 한마리가 기다렸다는 듯 박희철의 손을 향해 달겨들었다. 놀란 박희철이 삽으로 내려치는 찰나 그보다 앞서 짐승의 허연 이빨이 박희철의 손목을 낚아챘고 참혹한 비명소리와 함께 박희철의 손에서 삽이 떨어졌다. 박희철과 짐승이 한덩어리로 바닥을 나뒹굴렀다. 이번엔 주위를 맴돌던 또 한마리가 그에게 달겨들었다. 놈은 곧바로 박희철의 다리를 공격했다. 비명을 지를 사이도 없이 순식간에 그의 온 몸이 피로 물들었다. 

이어서 또 한마리, 또 한마리...... 놈들은 스텝들의 동정을 살피며 침착하게 한마리씩 가세하기 시작했고 급기야 대여섯 마리가 동시에 고통스럽게 마지막 숨을 헐떡이는 박희철에게 달겨들었다. 서너 마리가 동시에 그에게 달겨 들었다. 끔찍한 광경 앞에 모두들 미친 듯 악을 썼다. 극도의 공포가 그들의 온 몸을 휘감아 왔다. 그러나 짐승들은 서로 박희철을 물어 뜯으려고 자기들끼리 으르렁거렸다. 그리고 나머지들은 스텝들을 향해 더욱 다가섰다. 오세창이 울먹이며 소리쳤다. 

"저것들은 귀신도 유령도 아닙니다. 끔찍한 괴물들이라구요! 이제 우린 다 죽은 목숨이예요. 다 죽었다구요!" 

그의 말대로 해일은 이제 모든 것이 끝났다고 생각했다. 김한수의 공포와 두려움이 고스란히 그의 가슴으로 전해지고 있었다. 그때 엄청난 천둥소리가 들려왔다. 두번, 세번..... 그러나 그건 천둥소리가 아니었다. 총소리, 총소리였다. 짐승들 서너 마리가 순식간에 쓰러져 갔다. 그리고 나머지들이 달아나기 시작했다. 총소리가 계속해서 울렸다. 스텝들은 모두가 넋이 나간 얼굴로 소리가 나는 쪽을 바라보았다. 쏟아지는 빗속에서 세사람의 그림자가 곧장 달려오고 있었다. 그들은 구반장 일행이었다. 그러나 아무도 그들을 맞을 엄두를 내지 못했다. 짐승들을 쫓으며 마당으로 들어서던 혜경은 마당에 있는 박희철의 시체를 보고 고개를 돌렸다. 구반장이 흥분된 목소리로 소리쳤다. 

"여기 있는 사람들이 전부요?" 

그러나 아무도 대답하는 사람들이 없었다. 아직도 그들은 악몽에서 깨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해일이 아직도 굳어진 몸을 간신히 지탱하며 더듬거리며 앞으로 나섰다. 

"네, 저.... 전부입니다" 

"마을 사람들..... 주민들은 어디 있소?" 

"저기 창고속에....." 

구반장이 스텝들을 헤치고 창고 앞으로 다가가 소리쳤다. 

"나, 구희열입니다. 문 열어요. 이젠 우리도 대항해야 합니다. 언제까지 이렇게 당하고만 있을 수 없어요!" 

그러나 여전히 창고에선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이번엔 저들이 모두 죽일거요. 더이상 우릴 살려두지 않을거라구!" 

구반장이 금방이라도 문을 부술듯 소리치자 비로소 안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해일은 그 목소리의 주인공이 자신들을 찾아왔던 노인중 하나라는 것을 알았다. 

"그냥 다른 사람들이나 데리고 가시오. 우리가 어디로 도망갈 수 있겠소? 그리고 유령들을 상대로 우리가 무슨 수로 싸운단 말이요? 우린 이 곳을 떠나지 않겠소" 

"망할..." 

구반장이 창고의 문을 주먹으로 후려치곤 그 자리에 무너져 내렸다. 혜경은 아직도 가슴이 심하게 떨렸다. 무기가 필요하다는 구반장의 말은 현실로 나타났다. 갑자기 어디서 저렇게 많은 이상한 짐승들이 나타났는지 그녀로선 도저히 이해가 가지 않았다. 그리고 그녀가 더욱 이해할 수 없는 것은 구반장과 마을 주민들이었다. 그들은 최소한 지금의 괴이한 상황들을 사전에 알고 있었다는 확신이 그녀의 의식을 강하게 사로잡고 있었다. 그때 그녀에게 말을 건네는 사람이 있었다. 검은 캡모자를 눌러 쓴 창백한 표정의 해일이었다. "하두 정신이 없어 미처 감사하단 말도 제대로 못 했습니다. 댁들이 아니었으면 정말 끔찍한 일을 당할뻔 했습니다. 정말 고맙습니다" 

"윤혜경입니다. 이 곳 H군 경찰서에 있습니다. 다들 무사한가요?" 

"보시다시피 별로 좋은 상태가 아닙니다. 여기 이 사람 말고도 이미 두명이나 죽었습니다" 

"두명이 더 죽었다구요?" 

"도대체 어찌된 영문인지 모르겠지만 누군가가 짐승들을 조종하고 있습니다. 전 그 끔직한 살인마를 봤습니다" 

"살인마라구요?" 

혜경이 눈을 크게 뜨고 소리치자 구희열 반장이 그들의 대화를 끊으며 거칠게 소리쳤다. 

"아직 끝난게 아니요!" 

그 소리에 잠시 정신을 차렸던 스텝들의 얼굴이 순식간에 굳어졌다. 그들은 모두 공포와 추위에 떨고 있었다. 김감독은 죽은 박희철의 시신 옆에 앉아 말이 없었고 이정우는 계속 주위를 두리번 거리며 불안해했다. 그의 손엔 굵직한 몽둥이 하나가 쥐어져 있었다. 배영환과 강은영은 서로를 굳게 껴안고 있었다. 강은영은 남은 스텝중 가장 상태가 안 좋아 보였다. 배영환은 그녀를 위해 자신의 잠퍼를 벗어서 걸쳐 주었지만 어차피 비에 흠뻑 젖어버려 별로 도움이 될 것 같진 않았다. 구반장이 자리에서 일어나 앞으로 나섰다. 그는 흉가쪽 고개를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이제 시작일 뿐입니다. 놈들은 다시 몰려 올 겁니다" 

"그럼, 어서 저 창고 안으로 우리도 피신을 해야죠. 문도 튼튼해 보이고.... 어차피 짐승들입니다. 저 안까지 들어오진 못 할겁니다. 그리고 날이 밝으면 그때 이곳을 빠져나가면 되잖아요. 어서 저 안에 있는 사람들에게 문을 열라고 하세요, 아니면 강제로라도....." 

이정우였다. 그는 금방이라도 몽둥이로 창고문을 두들길 것 처럼 창고를 향해 다가갔다. 그러자 구반장이 다시 소리쳤다. 

"그만 둬요. 다 소용없어요. 그 안에 숨는다고 안전할 순 없어요" 

모든 사람들의 시선이 구반장에게 집중되어 있었다. 

"오늘밤 안으로 이곳을 빠져 나가야 합니다. 그것만이 유일한 살 길입니다. 어차피 완전한 살 길은 아니지만....." 

구반장은 계속 수수께끼 같은 얘기들을 늘어놓았다. 참다못한 해일이 앞으로 나섰다. 그는 구반장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그는 구반장이 이 이상하고 괴이한 일들에 대해 뭔가 알고 있다는 것을 직감할 수 있었다. 

"대책을 강구하기 전에 짚고 넘어가야 할게 있습니다. 경찰들이라고 하셨죠? 그럼, 우선 현재의 상황에 대해 저희한테 설명부터 해주십시요. 당신은 분명 알고 있을 겁니다. 그 짐승들이 어디서 왔으며 아까 주민들에게 한 이상한 얘기들, 그리고 그 짐승들을 데리고 다니는 그 살인마는 누구인지....." 

해일을 마주보는 구반장의 표정은 어느 때보다 긴장되어 있었고 주저하고 있었다. 혜경 또한 터질듯한 궁금증으로 그런 구반장을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었다. 어설픈 침묵이 이어졌다. 이윽고 구반장이 무겁게 입을 열었다. 그리고 그의 입에서 나온 얘기는 전혀 예상치 못한 뜻밖의 얘기였다. 

"그것들은 모두 유령들입니다. 살아있는 유령들....." 

모두들 서로의 얼굴을 마주보았다. 그때 뒷쪽에서 몸을 잔뜩 웅크린채 떨고있던 오세창이 몹시 흥분하여 구반장의 앞을 가로막듯 나왔다. 

"말도 안돼요! 지금 우릴 모두 놀리는 겁니까? 유령이라니요? 나는 이 분야의 전문갑니다. 저건 귀신이 아니라 피가 흐르고 심장이 뛰는 끔찍한 괴물들이라구요! 괴물! 귀신이 사람을 저렇게 물어 뜯어 죽인다는 얘길 들어봤습니까? 귀신이 총에 맞았다고 죽었다는 얘길 들어 봤습니까? 나는 귀신을 찾으러 온 사람이지 저런 괴물을 만나러 온게 아니란 말입니다" 

그는 지금껏 자신의 내면에 억제되어 있던 공포심을 모두 발산하기라도 하려는 듯 이성을 잃고 소리를 질러댔다. 그는 구반장 뿐만이 아니라 모든 사람들을 향해 불만을 터뜨리고 있었다. 그는 자신의 직업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게 몹시 겁이 많은 사람 같았다. 

"경찰이면 어서 우릴 구해줄 생각을 해야지 무슨 말도 안되는 소릴 지껄이는 겁니까? 아까 조연출의 말대로 모두들 저 창고안에 숨으면 그만입니다. 뭐하러 쓸데없이 시간을 낭비합니까? 다들 정신들 차려요, 정신!" 

해일이 오세창을 잡아 끌며 그를 진정시키려 햇다. 

"우선 저 분의 얘길 들어봅시다. 어쨌건 우릴 구했잖아요" 

그러나 그는 해일의 손을 뿌리치곤 이번엔 오히려 해일에게 화를 냈다. 

"정PD 당신도 할 말 없어, 이 모든 책임은 당신이 져야 한다구! 처음부터 이곳에서 살인이 있었다는 얘길 왜 안 했소? 세상을 떠들썩하게 했던 바로 그 끔찍한 살인사건이 일어난 곳이 이곳이었다고 왜 얘길 않했냔 말야. 그랬으면 난 이곳에 따라오지도 않았을거야. 그때 죽은 사람들 모두가 바로 방금 죽은 박희철과 같이 물어 뜯겨 죽었잖소? 그런데 무슨 귀신을 찾으러 오냔 말야!" 

그러나 그의 불만은 더이상 계속될 수 없었다. 혜경이 떨리는 음성으로 중얼거렸다. 

"놈들이 다시 왔어요" 

과연 그녀의 말대로 어둠속엔 아까보다 더욱 많은 푸른 광채들이 이쪽을 노려보며 다가오고 있었다. 

7. 필사의 탈출(1) 

구반장이 M16을 잔뜩 움켜쥐곤 절박한 음성으로 말했다. 

"불행히도 더이상 입씨름할 시간이 없을 것 같소. 살고 싶은 사람들은 따라 오시오. 우리 윤형사와 박순경이 앞장을 서고 내가 맨 뒤에 따라 갈 것이오. 자세한 얘기는 나중에 들려 주겠소. 물론 살아남은 사람만 내 얘기를 들을 수 있을 것이오. 윤형사, 박순경! 어차피 다리가 끊어졌으니 내천리로 해서 돌아가는 수 밖에 없으니까 앞장을 서라구!" 

"다리가 끊겼다구요?" 

해일이 눈을 크게 뜨고 말했다. 

"물이 너무 불어서 다리가 무너졌소" 

그리곤 말을 마친 구반장이 죽은 박희철의 손에 들려 있던 부삽을 빼내어 해일에게 던지며 소리쳤다. 

"남자들은 주위에 무기가 될만한 것들을 하나씩 잡으시오. 도움이 될 수도 있으니....." 

김감독은 낫을 잡았다. 기가 막힌듯 사람들을 바라보던 오세창이 무슨 짓이냐는 듯 다시 소리를 질렀다. 

"다들 정신이 어떻게 된거 아니야? 이 밤중에, 이 빗속에서 산길로 도망을 가잔 말이야? 다들 미쳤어, 미쳤다구! 더구나 다리도 끊겼다잖아! 우리가 살 길은 이 창고밖에 없다구, 다들 내 말 듣는거요?" 

그러나 그의 말을 귀 담아 듣는 사람은아무도 없는 것 같았다. 김감독이 그의 어깨를 툭치며 낮게 속삭였다. 

"방금 저 양반이 여기 잇으면 죽는다 잖소? 살고 싶으면 시키는대로 하시오. 내 경험으로 이럴때 입씨름해서 득 본 경험이 별로 없으니까" 

혜경이 맨 앞에서 렌턴 불빛 하나에 의지하여 산길로 들어서기 시작했다. 손에는 38구경 권총을 단단히 움켜쥐고 있었지만 금방이라도 어둠속에서 괴물들이 달려들 것 같아 그녀는 계속해서 주위 어둠속으로 불안한 불빛을 쏘아댔다. 

그녀의 바로 뒤를 따르던 박호철이 자신의 손에 들린 권총을 흔들어 보이며 애써 웃으며 말했다. 

"윤형사님, 우리에게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진 모르지만 맨날 책상에서 볼펜 굴리는 것보단 훨씬 신나는데요? 무슨 영화 주인공이라도 된 것 같고.... 이럴줄 알았으면 좀 더 든든하게 무장을 해올껄 그랬나봐요" 

앳띤 얼굴의 박호철이 그래도 농담을 던지며 보이는 여유가 혜경에겐 그나마 약간의 안정을 가져다 주었다. 모두들 최대한 앞 사람과의 거리를 좁혀서 뒤를 따랐고 구희열 반장만이 다소 떨어져서 뒤따르고 있었다. 불과 4. 5미터만 앞사람과 떨어져도 쉽게 길을 잃을 것처럼 시야는 온통 빗물과 어둠뿐이었다. 그때 뒷쪽에서 요란한 총성이 울려 퍼졌다. 구반장이 쏜 총성이었다. 

강은영이 비명을 지르며 그 자리에 주저 앉는 것을 배영환이 가까스로 부축했다. 강은영이 울먹였다. 

"선배, 도저히 못 가겠어요. 너무 무서워서 발이 안 떨어져요" 

"여기서 주저 앉으면 안돼. 우린 무사히 빠져 나갈거야. 총도 있고 경찰도 있잖아. 설마 그까짓 짐승들이 뭘 어쩌기야 하겠어?" 

배영환이 그녀를 위로하며 일으켰다. 그러나 그 역시 이 끔찍한 밤을 무사히 보낼 수 있을지에 대해선 막막한 마음뿐이었다. 뒤에선 구반장의 좀 더 빨리 전진하라는 다급한 음성이 재촉하고 있었고 총소리도 계속 되었다. 처음 출발과는 달리 사람들 사이의 간격은 조금씩 벌어지고 있었다. 진흙탕으로 변한 산길을 걷기란 그리 용이한 일이 아니었다. 더구나 오랫동안 억수같은 빗줄기를 온몸으로 맞은 탓에 몸은 점점 더 무거워 지기만 했다. 해일이 앞쪽으로 나서서 혜경의 뒤로 바싹 붙었다. 

지금은 박호철이 맨 앞에서 일행들을 이끌고 있었다. 

"저기, 윤형사님이라고 하셨나요?" 

등뒤에서 들려오는 음성에 혜경이 고개를 돌렸다. 

"네, 윤혜경입니다" 

얼핏봐선 결코 예쁜 얼굴이 아니었지만 그녀의 눈동자엔 총명함과 날카로움이 배어 있었다. 해일은 그녀에게서 서울의 도심에서나 볼 수 있는 가녀린 여자들과는 분명히 다른 강인함과 고집스러움도 엿볼 수 있었다. 

"당신을 본 적이 있어요" 

"저를 보셨다구요?" 

"그래요, 아까 윤형사님이 나머지 두분과 저희를 구하러 나타났을 때 어디선가 본 적이 있다는 생각을 했는데 처음엔 도무지 생각이 나질 않더군요. 그런데 지금 길을 걸으며 곰곰히 생각해보니 제 친구가 이 곳에서 살인사건 취재를 위해 촬영해 온 테잎에서 보았더군요" 

그녀는 해일이 자신을 테잎에서 이미 보았다는 말에 쑥스러운지 너털 웃음을 터뜨렸다. 

"그랬군요, 그럼, 그때 취재 왔던 기자가 친구분이세요?" 

"네, 아주 절친한 친구였죠. 이번에 제가 이 곳에 온건 프로그램 제작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 친구의 죽음에서 도무지 납득이 가지 않는 이상한 점들 때문이기도 합니다" 

"이상한 점이라니요?" 

"윤형사님은 아까 반장님이 말한 유령이라는 것에 대해 어떻게 생각합니까?" 

"글세요, 저는 별로 그런 것들을 믿는 편이 아니라서..... " 

"저는 그 유령이라는 얘기를 믿습니다. 제 친구는 죽기 전날 저와의 마지막 통화에서 아까 우리를 덮쳤던 그 괴물들이 어디를 가든 자신을 따라온다고 했습니다. 그것들 한테서 도망갈 수 없다고....." 

혜경이 놀랍다는듯 해일을 바라보며 말했다. 

"그건, 아까 목촌리 주민들이 한 말과 똑 같잖아요. 그리고 반장님도 그런 비슷한 얘길 했고......" 

"상식적으로 이해가 가지 않는 얘깁니다. 어떻게 서울같은 도심에 저런 괴물들이 나타나 쥐도 새도 모르게 사람을 죽인단 말입니까?" 

"그 부분은 저도 진작부터 궁금해 하고 있는 부분입니다" 

"그뿐이 아닙니다. 그 괴물들이 어디서 나온지 아십니까? 바로 마을 건너편 흉가의 광속에서 나왔습니다" 

"광속에서요?" 

"분명합니다. 제가 이 두 눈으로 똑독히 보았으니까요. 하지만 우리가 그 광속에서 촬영을 할때만 해도 광에는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괴물은 커녕 쥐새끼 한마리 없었단 말입니다" 

"믿을 수 없는 일이군요. 하지만 정말 유령이라면 우리가 쏜 총에 그렇게 피를 흘리며 죽을 수가 있을까요? 그건 분명 우리가 흔히 보는 짐승과 다를 바가 없었어요. 아참, 그리고 아까 누군가가 짐승들을 조종한다고 하셨죠?" 

"네, 놈들이 우리 스텝중 한명을 죽였어요. 자신이 가지고 있던 긴 막대기 같은 것으로....." 

"막대기라구요?" 

"확실히는 보지 못했지만 그렇게 보였습니다" 

"그게 죽창이라면 어떨까요?" 

"죽.... 창이요?" 

그때 뒷쪽에서 김감독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정PD! 너무 빨라요. 잠깐 멈춰요!" 

혜경과 해일이 뒤를 돌아 보았을때 바로 뒤에 따라오고 있어야할 배영환과 강은영의 모습이 보이질 않았다. 그들만이 아니었다. 이정우, 오세창, 김감독까지. 혜경이 앞쪽 박호철을 향해 다급하게 소리쳤다. 

"박순경, 잠깐 멈춰! 이를 어쩌지? 우리가 너무 빨리 걸은 모양이군요" 

혜경은 황급히 뒤쪽 어둠속으로 렌턴의 불빛을 쏘았다. 해일이 힘껏 소리쳤다. 

"김감독님, 어디 계세요?" 

그러자 뒤쪽 어둠속 약 20-30미터 되는 거리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뒷쪽에 있어요. 어디 옆길로 잘못 빠진 것 같아요" 

"모두들 거기 있나요?" 

"그래요, 하지만 그 반장이라는 양반은 여기 없고 아직 뒷쪽에 있는 것 같아요" 

"김감독님, 그럼 저희가 데리러 갈테니까 위치를 파악할 수 있게 중간 중간에 소리를 지르세요" 

해일과 혜경, 그리고 박호철이 다시 오던 길을 되돌아 가기 시작했다. 얼마 되지 않은 거리에 떨어져 있음에도 소리만으로 찾아간다는게 여간 힘든 일이 아니었다. 

"김감독님, 저희들 불빛 보이시죠?" 

"그래요, 보여요!" 

"금방 갈테니까 그 곳에서 꼼짝말고 기다리세요" 

세사람이 더듬거리며 산길을 헤쳐갈 때였다. 얼마간 잠잠하던 총성이 뒷쪽에서 다시 요란하게 울려 퍼졌다. 그와 거의 동시에 김감독의 다급한 외침과 함께 강은영의 비명소리가 어둠을 가르고 들려왔다. 

"정PD!서둘러, 놈들이 왔어! 시퍼런 광채가 보인다구. 아주 많아, 어서 서둘러!" 



7. 필사의 탈출(2) 

"기다려요, 금방 갈께요. 조금만 참아요!" 

머리털이 쭈삣거리는 긴장감에 세사람의 발길이 더욱 바빠졌다. 어둠속에서 남아있는 사람들의 공포에 질린 비명소리가 상황이 더욱 위급해져 가고 있음을 쉽게 짐작하게 했다. 

"저리가 이 자식들아! 저리 가란 말이야!" 

"살려줘! 제발! 살고 싶다구!" 

"오선생, 이리 돌아와! 어서 돌아오라니깐! 오선생!" 

그 이후로는 말 소리조차 제대로 알아 듣기 힘든 참혹한 비명과 외침들이 여기저기서 두서없이 울려 퍼졌다. 괴물들이 일행을 덮친게 틀림없다고 세 사람은 생각했다. 모두의 심장이 터질 것처럼 요동치고 있었다. 해일이 악을 쓰며 미친듯 앞으로 달려갈때 해일은 다시 어둠속에서 그 소리를 들었다. 

"쉬익! 쉭! 쉭!" 

누군가가 돌이킬 수 없는 상황까지 몰렸다는 절박감이 느껴졌지만 마음만 앞설 뿐이었다. 그는 온 힘을 다해 소리치며 달렸다. 

"거의 다 왔어요! 조금만 참아요, 조금만!" 

바로 앞쪽에 피런 광채들이 어지럽게 움직이고 있는 모습이 시야에 들어왔다. 해일은 그 중 한마리를 향해 삽을 휘두르며 달려갔고 혜경과 박호철의 권총이 불을 뿜었다. 짐승들의 으르렁거림, 총소리, 악쓰는 소리, 비명소리. 해일은 이것이 현실이 아니라 꿈이 아닌가 하는 착각을 느끼고 있었다. 박호철은 거의 본능적으로 권총을 쏘아대고 있었다. 그는 조준같은 것을 할 엄두도 내질 못했다. 그는 그저 총을 쏘고 있을 뿐이었다. 반면 윤혜경 형사의 총은 정확하게 짐승들을 쓰러뜨렸다. 그녀는 지금 막 누군가를 덮치는 짐승 한마리를 또다시 쓰러뜨렸다. 그녀가 달려가 보니 김감독이었다. 그는 어둠속에서 아직도 낫을 휘두르며 공포에 휩싸여 있었다. 혜경이 숨을 헐떡이며 소리쳤다. 

"다른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은 어디 있어요?" 

"모..... 모르겠소. 젠장, 놈들이 갑자기 나타났어요. 오선생이 먼저 달아나기 시작하자 몇마리는 오선생의 뒤를 쫓고 나머지는 우릴 덮쳐 왔어요" 

짐승의 발톱에 긁힌 그의 왼쪽 뺨에서 흐른 피때문에 그의 얼굴은 온통 피범벅이었다. 박호철이 그들에게 달려왔다. 그는 아직도 흥분한채 손에 쥔 권총을 부들거리며 떨고 있었다. 

"이..... 일단 놈들이 물러간 것 같아요. 저쪽에 세 사람 찾았어요. 지금 정PD와 함께 있어요. 하지만...... 나머지 사람들은..... 안 보여요" 

구반장이 도착한 것은 그로부터 몇 분 후였다. 일행중 김감독과 다리에 상처를 입은 배영환, 그리고 강은영만 찾았고, 이정우와 오세창이 보이질 않았다. 일행들이 사라진 사람들의 이름을 목청껏 부르며 안타까워 하고 있을 때 구반장이 비틀거리며 다가와 일행들의 앞에서 쓰러졌다. 그의 어깨는 검붉은 피로 흠뻑 젖어 있었고 그의 동공은 거의 풀려 있었다. 

"반장님, 정신 차리세요!" 

혜경이 소리치며 그의 얼굴을 끌어 안았지만 그는 이미 가망이 없어 보였다. 그는 숨을 헐떡이며 간신히 말했다. 

"오.... 누구라는 사람..... 그 사람은 이미 죽었소. 이젠 이 사람들을 윤형사가 책임져야 해! 당신들은 이제 모두 같은 배를 탄 거요! 무사히 이 밤을 넘긴다고 해도 놈들에게선 벗어날 수 없어요" 

해일이 그의 옆에 주저 앉으며 낮게 속삭였다. 

"이젠 알려 주세요. 우리가 지금 무슨 일을 당하고 있는건지...." 

그는 대답 대신 혜경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모든 게 다 업보야. 그동안 난 너무 힘겨운 싸움을 해왔어. 윤형사, 이 일에 윤형사를 끌어 들이고 싶진 않앗는데 어쩔 수 없이 일이 이 지경이 되고 말았군. 내 책상 서랍에 보면 낡은 노트가 한 권 있을거야. 그걸 보면 그 동안 이 곳 목촌리에서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알 수 있을거야" 

그는 가뿐 숨때문에 잠시 말을 끊었다가 다시 이었다. 

"목촌리 사람은 자신이 가야할 운명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어. 어차피 난 죽을 몸이야. 조금만 더 버티면 날이 밝을거고 그럼 더이상 놈들은 나타나지 않을거야. 하지만.... 문제는.... 그것으로 모든게 끝나는게 아니란거야. 지금의 이 끔찍한 일들은 길고 지루한 악몽의 시작일뿐이야. 윤형사! 가능하면.... 내 노트는 읽지 말어. 오히려 절망만 더 깊어져서 괴로울테니까. 노트를 보면 결국 우리 모두가 죽게 된다는걸 믿고 말테니까. 그래서 자살한 사람들도 무척 많지. 내가 할 말은 그것뿐이군. 자, 시간없어! 어서들 가라구! 내가 시간을 좀 벌어 볼테니까!" 

"반장님, 이제와서 무슨 말씀이세요? 함께 가야죠, 함께!" 

혜경이 구반장의 팔을 붙잡고 일으키려 했지만 그는 단호하게 그녀의 손을 뿌리치며 몸을 일으켜 옆에 나무기둥에 기댔다. 그리곤 그의 M16을 움켜쥐고 어둠을 노려보았다. 

"얼마나 버틸진 모르겠지만 이게 내가 할 수 있는 마지막 일인 것 같군. 그리고 한가지 당부하고 싶은 것은 여기 있는 사람 외에 어느 누구에게도 도움을 청할 생각 하지마! 어느 누구도 자네들을 도울 수 없다구!" 

"반장님!" 

혜경은 그의 옆에 주저앉아 고개를 숙였다. 구반장은 그녀에게 시선을 주지 않았다. 그는 장승처럼 꼼짝않고 어둠만을 노려보고 있었다. 박호철이 혜경을 일으켜 세우며 구반장에게 작별을 고했다. 다시 일행들은 앞으로 나아가지 시작했다. 새벽 5시 40분. 조금 있으면 해가 뜰 것이다. 그들이 구반장과 헤어진 후 채 5분도 되지 않아 뒷쪽에서 총성이 울려 퍼졌다. 간헐적으로 들려오던 총성이 완전히 멎은 것은 약 10여분 뒤였다. 혜경을 비롯한 일행들은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것인지 다들 잘 알고 있었다. 그들은 아무도 입을 열지 않았다. 강은영도 더이상 울지 않았다. 그녀는 밤사이 자신이 많이 변했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리고 그러한 생각은 강은영만이 아니었다. 해가 떠오른 것은 새벽 5시 50분경이었다. 그들은 태어나 그렇게 아름다운 새벽을 본 적이 없었다. 마찬가지로 그토록 긴 밤을 보낸 기억이 그들에겐 없었다. 그것은 지루하고 끔찍한 악몽과 같았다. 해가 뜨고 얼마 지나지 않아 지긋지긋 하던 빗방울도 멎기 시작했다. 어스름한 여명이 대지를 밝히기 시작했다. 잔혹한 어둠이 물러가고 숲은 다시 초록빛을 찾으며 조금씩 깨어나고 있었다. 일행들이 하나 둘 진흙탕 위에 주저 앉았다. 스텝들 아홉명중 살아남은 사람은 네명에 불과했다. 그들은 두려운 눈으로 뿌연 아침이 밝아오는 목촌리를 돌아보며 제각기 감회에 젖어들고 있었다. 

* * * 

평화로운 휴일 아침 H군은 발칵 뒤집혔다. H군의 한 산골 마을 목촌리에서 유례없이 끔찍한 살인사건이 일어났기 때문이었다. 마을에는 간밤의 참상을 말해주듯 곳곳에 참혹하게 죽은 시체들이 나뒹굴고 있었다. 집단살육이라도 일어나지 않고서는 도저히 불가능한 죽음의 그림자가 온 마을을 휩쓸고 지나간 것이다. 수십명의 경찰과 검은 양복을 입은 몇 명의 사내들이 철저한 보안속에 마을을 조사하고 있었다. 특이한 점은 이토록 큰 사건이 발생했음에도 언론에서 나온 취재기자 한 명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마을 어귀에서 제일 먼저 만난 시신은 구반장의 시신이었다. 

그는 가슴에 M16을 굳게 껴안은채 온몸이 갈기 갈기 찢겨져 있었다. 이 정우의 시신은 숲속 한가운데서 발견되었다. 그는 죽창으로 무수한 가격을 받은 듯 온 몸이 성한 곳이 한군데도 없었다. 오세창의 시체는 개울 근처에서 발견되었다. 죽은 후에도 이리저리 끌려 다닌 흔적이 역력했다. 그외에도 박희철과 김혜진의 시신이 각각 마을과 흉가에서 발견되었고 특히 광속에서 발견된 이정란의 시신이 가장 참혹했다. 뜻밖에도 창고에 숨어 있던 마을 주민 다섯명은 모두 농약을 먹고 자살한 채 발견되었다. 해일은 마을의 한가운데 주저앉아 경찰들이 여기 저기서 한곳으로 모아 오는 시신들을 넋을 잃고 바라보고 있었다. 불과 몇 시간전만 해도 그들은 자신과 함께 얘기하고 숨쉬던 사람들이었다. 김감독과 배영환은 부상이 심해 앰블런스편에 급히 서울로 후송되었고 강은영 또한 거의 탈진상태로 서울로 보내졌다. 윤혜진 형사는 구반장의 시신을 대하곤 심하게 오열했으나 얼마의 시간이 흐르자 안정을 되찾기 시작했다. 그녀는 서을 시경에서 내려온 형사팀들에게 간밤의 상황들을 설명하느라 기진맥진 하고 있었다. 

그녀의 곁에서 박호철 순경이 그녀의 주장들을 재차 확인시키고 있었지만 형사팀들중 누구 한사람도 그들의 주장을 곧이 곧대로 신뢰하는 눈치는 아니었다. 그리고 그들 다음으로 조사를 받아야 할 사람은 바로 해일이었다. 하지만 해일은 그들에게 어떻게 간밤의 상황을 설명해야할지 난감하기만 했다. 참혹한 시신들을 제외한다면 마을은 거짓말처럼 멀쩡했다. 분명 마을에는 박희철에게 덤벼들던 짐승들과 마을을 벗어나 탈출하던 과정에서 죽인 짐승들의 시체가 있어야 하는데도 흔적조차 남지 않은 것이다. 그 뿐이 아니었다. 더욱 기가 막힌 일은 마을 어느 한구석에서도 짐승의 발자욱 하나 발견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7. 필사의 탈출(3) 

만약 죽은 사람들이 아니었다면 누군가가 그들 모두는 기나긴 악몽을 꾼 것이라고 누명을 씌워도 믿을 만큼 마을은 완전하게 깨끗했다. 해일은 이 곳에 분명 엄청난 속임수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누군가가 아무리 흔적을 없애려고 해도 이토록 완벽하게 처리할 순 없는 일이기 때문이었다. 주저앉아 있는 해일의 어깨를 툭하고 치는 사람이 있었다. 올려다보니 그는 이번 수사팀의 책임자라고 처음에 자신을 소개하던 장형석 과장이었다. 

"기분이 좀 나아 졌습니까?" 

해일은 그의 말에 별로 대답하고 싶지 않았다. 사람이 아무리 망각의 동물이라지만 그 짧은 시간에 이토록 큰 충격을 어떻게 잊어버릴 수 있을 것인가. 그는 해일의 옆에 비슷한 자세로 주저 앉았다. 

"정PD라고 하셨죠? 오랫동안 이 방면의 일을 해오면서 이번처럼 이상한 사건은 처음 대합니다. 죽은 사람들로 보나 살아남은 사람들의 진술로 보나 오늘 새벽 이 마을에선 웬만한 전쟁보다 더한 난리가 벌어진 것 같은데 제 눈에는 마치......" 

그는 잠시 거기서 말을 끊곤 해일의 눈치를 살피는 듯 했다. 

"마치 어디선가..... 엉뚱한 곳에서 죽은 사람들을 고스란히 이곳으로 옮겨 놓은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단 말입니다?" 

해일은 비로소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보았다. 그가 말하고자 하는 의도가 무엇인지 알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일반 경찰들과는 달리 말쑥한 양복 차림에 1970년대에나 유행했을 짧고 단정한 머리에 기름을 발라 넘긴 그의 모습에서 해일은 한때 이 나라를 온통 두려움에 떨게 했던 모 기관원의 모습을 떠올렸다. 그는 얇은 은테 안경 너머로 차갑고 날카로운 시선을 해일에게 던지고 있었다. 그제서야 해일은 그가 자신들의 얘기를 믿기는 커녕 오히려 의심에 가까운 눈초리를 보내고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럼, 우리가 거짓말이라도 한단 말입니까?" 

"아... 제 말을 오해 하셨나본데 그런 얘기가 아니라...." 

"아니라면.... 제가 장형사님 질문에 대답하지 않아도 되겠군요?" 

"그건, 아니죠. 비록 정PD가 이번 일에 피해자라고 주장하고 있긴 하지만....." 

"피해자라고 주장한다구요?" 

"이런, 제 말을 너무 그렇게 예민하게 받아 들일 필요는 없습니다. 저희는 어디까지나 객관적인 물증이나 확실한 정황이 밝혀질때까진 선입견을 두지 않으려고 하는 것 뿐이니까요" 

"결국은 우리들을 용의자로도 볼수 있다 그 말이군요" 

"꼭 그렇게 해석하고 싶으시다면 굳이 부정하고 싶진 않습니다. 하지만 수사 절차상 어느 사건에서나 사건 주변 인물들은 기본적으로 모두 용의자 선상에 올리는 것이 수사를 하는 기본 방침이니까 이해해 주십시요" 

"저쪽에 윤혜경 형사와 박호철 순경은 다름 아닌 경찰입니다" 

"그건 별개의 문제지요. 다만 제가 하고 싶은 얘기는 정PD가 이번 사건에 대해 저희에게 적극적으로 협조해야 할 의무가 있다는 얘기를 하고 싶은 겁니다, 저는" 

그의 말은 전과 달리 이번에는 매우 확고하고 단호한 억양이었다. 해일은 아찔한 현기증을 느끼면서 자신도 모르게 그의 시선을 피했다. 더이상 무엇을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이미 자신들이 겪은 모든 일은 하나도 남김없이 다 얘기했는데. 그들은 또 무엇을 더 자신들에게 요구하는 것인가. 그는 뭔가 알 수 없는 깊은 수렁으로 자신이 점점 빠져들고 있다는 예감을 떨칠 수 없었다. 

문득 그가 고개를 들자 앞쪽에서 윤혜경 형사가 자신과 장과장을 바라보고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그녀 또한 지금 자신의 심정과 크게 다르지 않다는 것을 해일은 그녀의 표정에서 읽을 수 있었다. 해일은 자리에서 일어나 혜경을 향해 다가갔다. 그녀는 지금까지 그가 보아온 여느 여자들과는 확실히 다른 면이 있었다. 해일은 처음 그녀를 대할때부터 그녀에게서 어느 남자 못지 않은 강인함과 고집스러움을 엿볼 수 있었다. 해일은 그것이 단순히 그녀의 직업때문에 드러나는 성격이 아닌 그녀의 천성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녀가 먼저 입을 열었다. 

"뭔가 좀 이상해요" 

"이상하다니요? 마을이 말입니까?" 

"아니요, 경찰들..... 아니 이 사람들.... 일반 경찰들이 아닌 것 같아요" 

"뭐라구요? 그게 무슨 말입니까?" 

"확실히는모르겠지만 시경에서 나왔다고 하는데 차림새나 말투, 그리고 시경 어느 부서에서 나왔는지에 대해선 밝히지도 않고..... 신분증도 위조된 것 같아요" 

"뭐라구요? 그게 정말 입니까?" 

"뭔가 또 다른 무엇이 이번 사건과 관련이 있는 것 같아요" 

"그럼, 따져야죠! 지금이 어떤 세상인데....." 

"그냥 잠자코 있으세요. 우리가 먼저 속을 드러내서 득이 될게 없는 것 같아요. 일단 속아 주는 척 하면서 저들의 정체와 저들의 의도가 무엇인지 알아보도록 하자구요" 

해일은 새삼스레 주변의 인물들을 눈여겨 보기 시작했다. 무엇이라고 분명히 단정하긴 어렵지만 확실히 그들은 일반 경찰들과는 다른 어떤 낯선 분위기가 있었다. 

"어차피 이번 사건은 처음부터 우리가 쉽게 현실에서 납득할 수 없는 일들이 마치 현실처럼 벌어지고 있었어요. 분명 어딘가에 이 수수께끼를 풀 수 있는 단서가 있을 거예요. 그걸 찾는게 급선무예요. 혹시 흉가에서 촬영을 할때 카메라에 뭐 찍힌게 없을까요?" 

그녀의 말에 해일의 머리에 번쩍하고 떠오르는 것이 있었다. 

"내가 왜 그 생각을 못했지? 그래요, 촬영 테잎! 만약 김감독이 카메라를 끄지만 않았다면 광에서 이정란씨가 죽어가는 모습과 그리고 어쩌면....." 

"어쩌면 뭐죠?" 

혜경을 바라보는 해일의 얼굴이 흥분으로 상기되기 시작했다. 

"어쩌면 그 짐승들과 살인마들이 어디서 어떻게 왔는지도 알 수 있을지 몰라요" 

"네? 그게 정말이예요?" 

해일은 혜경과 흉가 쪽으로 급히 달리기 시작했다. 돌연한 두 사람의 행동에 장과장이 덩달아 급히 그들의 뒤를 쫓았다. 해일이 달리며 흥분하여 소리쳤다. 

"그래요, 만약 김감독이 그때 광을 뛰쳐 나오며 카메라를 끄지만 않았다면 카메라는 계속해서 돌아가고 있었을 겁니다. 저는 그 살인마와 짐승들이 광에서 나오는 것을 분명히 제 두 눈으로 보았어요. 그런데 저희가 광에서 나오기 직전까지만 해도 광에는 저희 말곤 아무것도 없었다구요. 제가 본 것처럼 그들이 정말 광에서 나왔다면 우리가 나온 이후에 그 안에서 벌어진 일들이 하나도 남김없이 촬영 테잎에 찍혔을거란 말입니다" 

"만약 그렇게만 된다면 이 모든 수수께끼들을 한꺼번에 풀 수 있을지도 모르겠군요" 

"그 뿐이 아닙니다. 마당에 적외선 카메라를 설치해 두었어요. 그 카메라는 야간에 조명이 없이도 물체들을 분명하게 촬영을 할 수가 있죠. 카메라가 제대로 작동이 되었다면 우리가 광에서 뛰쳐 나오는 과정들과 짐승들과 살인마의 모습, 그리고......" 

해일의 목소리에 갑자기 흥분기가 가셨다. 

"그리고 뭐죠?" 

"김혜진의....... 살해장면까지 모두 그 안에 들어 있을 겁니다" 

8. 테잎속의 비밀(1) 

일요일 오전 같은 시각. 서을 근교 M 정신 요양원에는 3대의 앰블런스와 검은 세단 3대가 급히 요양원 뜰 안으로 들어서고 있었다. 평소 같으면 상태가 그리 나쁘지 않은 환자 몇 명과 면회 온 보호자들이 따스한 햇살 아래 도시락이라도 나누며 모처럼 한가로운 정을 나누고 있 을 시간이었지만 오늘은 웬일인지 쥐새끼 한마리 보이지 않는 뜰 안에는 팽팽한 긴장감마저 감돌고 있었다. 세단과 앰블런스가 요양원 현관 앞에 멎자 기다렸다는듯 요양원의 원장을 비롯한 실무자들이 급히 그들을 맞으러 밖으로 나왔다. 

첫번째와 두번째 세단에서 내린 사람들은 검은 양복 차림의 날카로운 눈매를 가진 기관원의 인상을 풍기는 사내들이었고 세번째 세단에서는 말쑥한 양복 차림의 앞 차에서 내린 사내들과는 사뭇 분위기가 달라 보이는 사내들이 내렸다. 그들은 매서운 눈으로 주위를 경계하며 앰블란스의 문을 열었다. 그 안에서 환자 한명이 하얀 시트로 온 몸이 덮힌채 환자용 침대에 실려서 끌어 내려졌다. 사내들은 신속하게 환자를 안으로 데리고 들어갔다. 두번째, 세번째 앰블런스에서도 마찬가지로 시트로 온몸을 뒤짚어 씌운 환자가 각각 한명씩 실려 있었고 그들 또한 앞의 환자와 같은 방법으로 안으로 들여 보내졌다. 그들을 태운 환자용 침대는 빠른 속도로 햐얀 벽으로 둘러싸인 정신 요양원의 긴 복도를 지나가고 있었다. 그들이 복도를 질주하는 동안 복도에는 사람의 그림자조차 볼 수 없었다. 

그들은 병원의 가장 안쪽에 있는 은밀한 통로로 들어섰다. 그들이 들어선 통로의 입구에는 '특수병동'이라는 푯말과 함께 '관계자외 절대 출입금지' 라는 선명한 붉은색 글씨가 적혀 있었다. 그들은 다시 두개의 굳게 잠긴 철문을 지나 병원 가장 깊숙한곳에 위치한 세개의 병실 앞에서 각각 멈추었다. 특수하게 제작된 것으로 보이는 두꺼운 병실문이 열리고 각각의 환자들을 실은 침대는 나란히 배정된 병실 안으로 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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