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희의 국제적 유산(2011년)
저자:윌리엄 오버홀트
-미국의 대표적인 중국전문가. 하버드에서 사회과학을 전공하고 예일대에서 석박사 학위를 받았다. 현재 하버드대학교 교수이자 케네디정책연구원 수석연구원, 미국 랜드연구소 아시아태평양정책센터 소장을 맡고있다.
빌 클린턴은 “문제는 경제야, 바보야”라는 대선 슬로건으로 성공적인 캠페인을 가졌지만, 박정희는 이 전략으로 한 나라를 구했다.1961년, 박정희는 세계에서 가장 위태로운 상태에 놓여있는 나라를 통치하게 되었다. 대한민국은 한국전쟁으로 인해 초토화 된지 몇 년 되지 않았으며, 세계에서 가장 가난한 나라 중 하나였다. 정치적 안정성 역시 세계 최악 중 하나였다. 그리고 한국은 풍부한 천연자원, 우월한 산업능력, 정치적 안정성과 모택동의 지원을 등에 업은 북한과 대결하고 있었다.
박정희의 전임자들과 그의 적들은 근본적으로 다른 우선순위를 갖고 있었다. 이승만의 절대적인 우선순위는 군사능력이었다. 한국전쟁을 겪은 지도자로서는 당연한 선택이었지만, 전쟁이 끝나고도 나라의 모든 자원을 군사분야로 쏟아 부었으며, 이는 경제개발이 후 순위로 밀리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북한에서도 김일성은 군사능력에 치중하였으며, 북한은 아직도 국가자원의 대부분을 군에 쏟는다. 박정희 역시 군사적 능력을 기르는 것을 최우선으로 생각하는 것이 자연스러웠을 수도 있다. 하지만 놀랍게도 그는 GDP대비 국방예산을 줄이고 경제개발에 주력하였다. 그는 경제발전이 군사적 능력 배양을 위한 산업기반이 될 거라는 것을 이해하였다
박정희의 이러한 결정은 2009년에 남한과 북한의 경제력 격차가 35배에 달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이는 개개인의 풍족함 외에도 군사적 우위, 정치적 안정성, 그리고 커져가는 국제적 위상을 가져왔다. 이는 북한의 낡아가는 군사, 정치적 사기저하, 국제적 악명과 대비되는 결과이다. 박정희는 만주국에서 복무한 경험으로 만주의 산업기반이 어떻게 일본의 군사능력을 키웠는지 이해하고 있었다.
앞선 장면 정부는 다른 우선순위를 두고 있었다. 이승만의 권위주의와 군사력중시, 인권탄압과는 다르게 장면정부는 민주주의와 인권을 중요시하였으며, 이러한 면은 호응을 받았다. 하지만 장면정부는 인플레이션, 둔화된 성장, 비효율적인 행정, 사상적 대립, 폭력적인 시위, 그리고 강력한 북한과의 전쟁에 대한 두려움으로 점철되어 있었다. 굶주리고 두려움에 떠는 한국국민들에게 이러한 혼란은 발전에 대한 희망을 모두 가져가 버렸다. 이 당시 한국은 북한에 대적하기 위해 필요한 경제적, 정치적 능력을 갖는 것이 거의 불가능해 보였다. 이로 인해 1961년 5월에 일어난 박정희의 쿠데타에 대한 저항은 거의 일어나지 않았다.
경제 우선주의와 경제성장을 위한 정치적 안정은 박정희가 세계에 주는 가장 큰 교훈이다. 역사상 한 나라가 이토록 빠른 시간에 전략적 열위상태에서 전략적 우위를 이뤄낸 것은 찾아보기 대단히 힘든 일이다. 이토록 빠른 속도로 한 민족이 문맹과 영양실조, 가난의 상태에서 이 정도 번영과 수준 높은 교육을 이뤄낸 것은 역사상 유례가 없는 일이라고 할 수 있다.
앞선 일본의 성공은 박정희의 한국에게 영감을 제공하였고, 기술력, 경영 노하우, 그리고 경제적 자극으로 도왔다. 하지만 한국이 성취한 것은 일본과는 다르다. 한국이 국방에서 경제로 우선순위를 바꾼 것은 자체적인 결정이었지만, 일본의 비무장은 강요된 선택이었다. 그리고 일본의 경제 기적이 회복이었다면, 한국의 기적은 최초로 창조된 것이었다. 일본의 성공은 침체와 쇠락으로 이어졌지만, 한국은 보다 세계화되고 경쟁력 있는 경제체제에서 성장을 지속하고 있다.
한국과 대만, 일본이 빠른 시간에 경제적 번영과 정치적 안정, 높은 국제적 위상을 달성한 것은 근본적인 지정학적 변화를 가져왔다. 지금까지 국가들은 이웃을 침략하고 부를 약탈하며, 자신의 농민들을 징수하며 번영을 이뤘다. 하지만 새로운 시대에서는 구미국가들의 경제보다 3-5배 빠른 속도로 성장하며, 경제적 성장만으로도 같은 반열에 설 수 있게 되었다. 동아시아와 동남아시아의 모든 국가들은 이러한 변화를 인식하고 모방하려 하였다. 이와 동시에 현대군사기술의 발달은 전통적인 군사적 승리를 득보다 손해가 큰 피로스의 승리로 만들어 버렸다. 이러한 변화를 포착한 동아시아국가들은 변화를 미약하게 이해한 미국보다 비교적으로 많은 이득을 보았다
남한과 대만은 이러한 지정학적 전략 변화의 중심에 있었다. 홍콩, 싱가포르, 말레이시아, 태국과 인도네시아는 이를 모방하여 이득을 보았다. 중국은 20년정도 뒤쳐졌지만 이웃국가들의 발전을 본 등소평의 결단력 있는 행동으로 이들을 따라 하였다. 주룡지와 대화했을 시 그가 한국의 경제적 교훈들을 서양학자들보다 깊이 있게 살펴본 것을 알 수 있었다. 경제성장을 우선순위로 두는 기본적인 것 외에도 다른 중요한 교훈들이 있었다. 다음과 같은 테이블에서 왜 등소평은 성공했고, 서양에서는 더 좋은 평가를 받았지만 고르바체브는 실패했는지 볼 수 있다.
동아시아적 가치 | 고르바초프의 가치 |
1. 농업 | 1. 국제정치 |
2. 경공업 | 2. 국내정치 |
3. 중공업 | 3. 중공업 |
4. 국내정치 | 4. 경공업 |
5. 국제정치 | 5. 농업 |
한국/동아시아적 접근은 인구의 대다수에 직업과 소득, 교육을 제공하는 것에 집중한다. 이는 정치적 안정을 가져오고, 보다 정교하고 복잡한 경제를 발전시킬 수 있는 경제적 기반을 제공한다. 잘 교육받은 중산층으로 이루어진 사회는 복잡한 현대정치가 안정적이고 효율적이고 작동하는 것을 가능케 해준다. 강한 경제와 안정적인 정치체제는 지정학적 위상의 기반이 된다.
토지개혁을 통한 농업 분배(박정희 대통령 이전에 이미 이루어진)와 새마을 운동, 그리고 많은 사람들에게 일자리를 제공해준 경공업을 기반으로 발전하였으며, 나아가서 박정희는 교육분야에 있어서 확고한 평등주의자였다. 박정희는 엘리트계층이 출현하는 길인 명문 학교들을 닫아버리는걸 선택하였다. 서양에서는 이러한 평등주의는 사회주의 사상과 연관되어 있으며, 민주주의에 반하고 경제성장에 부정적인 것으로 본다. 하지만 박정희의 평등주의는 잘 교육된 노동 인구를 만들어내었다. 이는 넓은 시장을 가능하게 했으며, 예를 들어 인구의 상당부분이 같은 시간에 라디오를 구매할 수 있는 능력을 갖게 됨으로써, 최대규모를 가진 국내시장을 만들어 내었다. 나아가서 이는 민주주의가 번성할 수 있는 사회를 만들었는데, 교육된 국민은 국가 정책을 이해할 수 있으며, 평등한 중산층은 국민이 공유하고 공감하는 이익에 투표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평등주의적 접근의 성공은 보다 우파적인 사회인 태국과 극명한 대조를 이룬다. 태국의 엘리트주의적 교육과 소득격차는 교육받는 노동인구의 수를 축소시켰으며, 이는 내수시장을 위축시키고 기술개발을 어렵게 만들었다. 정치적으로 태국은 분열되어 있으며, 낮은 교육수준으로 인해 민중 선동에 취약하다. 태국은 경제발전이 지지부진하고, 다른 형태의 엘리트주의를 갖고 있는 필리핀 역시 마찬가지다. 중국은 한국, 대만, 싱가포르의 본보기를 따라 농업개혁과 전국민의 문해능력을 추진하였다. 개혁주의 중국은 소득격차 개선과 사회적 정의 면에서는 한국과 대만에 미치지 못하지만, 태국과 필리핀의 엘리트주의보다는 한국 모델에 더 근접해 있다.
박정희의 경제정책은 현재의 경제적 이론에 완전히 반대되는 것이었다. 의도적으로 국내기업을 성장시키고, 한 분야에서 성공한 기업들이 다른 분야로 진출할 수 있도록 지원하고, 신생산업들을 보호하고, 점진적으로 경제를 자유화시켰다. 워싱턴 컨센서스는 선진국의 기업들이 최대한의 속도로 개도국의 시장을 점유하는 것에는 유리하지만, 한국, 싱가포르, 대만, 중국의 정부주도 관치주의적 접근은 경제적 성공의 특징이다.
박정희의 정부주도 경제개발은 다른 정부주도모델의 실패를 경쟁을 통한 효율성으로 피하였다. 그는 같은 산업분야에서 열 몇 개의 재벌들이 경쟁하도록 하였다. 만약 재벌들이 노력하였지만 정부의 목표를 달성하지 못했다면 재벌을 지원했지만, 형편없는 경영을 하여 실패하였다면 그 재벌은 버려졌다. 치열한 국내경쟁과 점진적은 시장개방은 한국의 경쟁력을 개선시켰으며, 독점이 횡행하던 필리핀과 인도네시아, 경쟁이 전무했던 소련의 전철을 밟는 것을 방지하였다. 중국은 한국 모델을 모방하였으며, 국내경쟁에 중점을 두고 1990년대 말부터 한국보다 더 개방적인 정책을 택하였다. 중국의 경제적 성공은 한국의 경제성장 경험을 자세히 연구하고서 만들어졌다.
박정희의 경쟁에 대한 강조는 성공을 장려하는 정책을 통해 강화되었다. 재벌과 새마을 운동 정책에서 박정희는 실패를 구제하지 않았으며, 가장 성공적인 회사와 마을들에 자원을 더 제공하였다. 박정희는 모두에게 성공할 기회를 주는 것을 대단히 중요시 하였고, 보편적인 교육을 강조하였지만, 이와 동시에 실패를 구제하기보다는 성공을 장려하였다.
박정희는 근대경제를 건설하려는 의욕을 갖고 있었지만, 자원이 절대적으로 부족했다. 이에 대응하기 위한 주요 정책은 자유무역지역을 설정하고, 수자원, 전력, 그리고 정부지원을 집중하였다. 이러한 구역들은 산업발전을 촉진해서 전국을 개발할 수 있는 자원들을 생산해냈다. 대단히 성공적이었던 이 정책인 중국의 경제특구의 모델이 되었다. “하나의 국가, 도시, 섹터, 회사 두 개의 시스템” 방식의 접근을 통해 한국은 전근대적 시스템에서 근대 시장경제를 건설할 수 있으며, 중국은 사회주의 시스템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박정희의 경제위주 전략은 강력한 이익집단의 반발을 무마하는 것을 요구하였다. 경제를 점진적으로 개방하는 것도 반대에 부딪혔고, 일본과의 외교관계를 정상화하는 것 역시 대규모 시위로 이어졌다. 국방예산을 축소하는 것 역시 군부와 군수산업의 반발을 가져왔다. 경부고속도로를 건설하는 것은 국내의 반발과 국제은행과 미국의 원조프로그램의 지속적인 반대를 넘어서는 것을 요구하였다. 박정희의 평등주의는 기득권층인 기독교 엘리트의 극심한 반대를 불러왔다. (박정희의 군사적 배경은 그를 우파인사로 생각하게 만들지만, 그는 사회주의, 평등주의적인 좌파에 더 가깝다. 이와 반대로 김대중은 공산주의자로 불렸지만 실제로는 오래된 기독교 지주계급과 엘리트들을 대변하였다. 김대중의 정치세력은 나중에야 발전하여 전라도, 학생들, 그리고 빈민층의 지지를 받게 되었다.) 박정희에 대한 정치적 반대세력은 기존 기득권층인 기독교 세력이었으며, 김대중이 그들을 대변하였다. 하지만 박정희는 이러한 반대를 자신의 정치적 세력을 구축함으로서 넘어설 수 있었다. 그의 전략을 믿던 군부 내 장교들, 재벌 산업가들, 그리고 박정희의 제도 건설을 환영했던 정부관료, 그리고 지식인계층들의 동맹을 구축해서 박정희의 전략을 실현시켰다. 박정희의 권위주의적 면이 과했던 점은 있지만, 지속된 경제성장을 달성하고 반드시 필요한 개혁을 실현시키기 위해서는 강력한 반대세력과 심각하게 분열된 사회를 넘어서는 이러한 정치적 결단이 필요했다.
박정희의 근대화 노력은 경쟁력 있는 재벌과 실력주의 정부관료체제 같은 견고한 제도와 기관들을 건설하면서 공고화되었다. (실력주의 기관들을 평등주의에 반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적 목표를 달성하는 도구로 본 것은 박정희가 모택동과는 다르나 등소평과는 유사한 면이다). 박정희는 실력 있는 정부 부처들을 만들어 나갔지만, 지속적으로 해외, 유학파 출신 인재들을 등용하고 씽크탱크의 조언을 들으면서 관료들이 안주하지 못하게 하였다. 박정희는 직접 젊은 한국인 학자들에게 (예를 들어 당시에는 켄터키 대학의 무명의 정치학 교수였던 나의 친구 김세진) 조국을 건설하는데 동참하기를 부탁하였다. 이 학자들은 씽크탱크에서 경제학, 교육, 예술 등 모든 분야를 다루게 하였으며, 그들의 정책제안을 정부정책에 활용하였다. 그리고 학자들에게 정책결정을 분석하는 능력을 훈련시킨 후 고위 관료직에 임명하였다.
여기서 박정희의 한국은 중국에게 하나의 모델을 제공하였다. 중국은 박정희의 유학파 등용을 모방하는 것을 넘어 하나의 사상이 될 정도로 추구하고 있다. 중국에 따르면 세계화는 영국이 주도한 산업 세계화, 미국이 주도한 금융 세계화, 그리고 앞으로 중국이 주도할 인재 세계화가 있다고 한다. 박정희는 일본이 먼저 채택했던 해외유학의 전통을 훨씬 발전시켰으며, 이러한 경향은 일본의 추락과 한국의 비상에 연관되어 있는 것으로 보인다. 중국은 세계에서 가장 많은 학생들과 정부관료들이 유학 중이며, 한국 역시 세계에서 가장 높은 비율의 학생들이 유학길에 올라 있다. 한국은 이러한 전통을 계승하여 발전시켜 갔으며, 한국을 모방한 중국은 이를 넘어서 미래의 세계 리더십의 중심전략으로 채택하였다.
등소평과 장저민은 박정희의 전략을 따라 했으며, 이는 세계를 변화시켰다. 등소평이 모택동의 자급자족, 반-지식인, 반-기업, 농민중심 전략을 거부한 것은 박정희가 이승만의 군사주의와 장면의 민주주의를 거부한 것보다도 더 큰 변화였다. 중국의 성공이 박정희의 전략에 기반한 것은 아무리 강조해도 모자라지 않다. 나아가서 세계의 많은 나라들이 중국의 경제발전에서 교훈을 얻고 있으며, 이는 박정희의 유산을 개발도상국에 전파하는 것이다
박정희의 기관형성과 경제적 성공은 대한민국을 구하였다. 이러한 행동이 없었다면 당시의 전문가들이 생각했듯이 북한에 비해 약하고 불안정했던 남한은 혼란스러움과 쇠퇴가 계속되어 결국에는 치명적인 결과를 불러왔을 것이다. 불안정한 상황이 계속되었다면 미국 내에서 월남과 남한을 동일시하는 잘못된 유추로 인해 주한미군을 철수시키자는 여론이 득세했을 것이다. 이른 주한미군의 철수는 필연적으로 약화된 경제적 관계, 줄어가는 외교 지원, 증가된 국내불만, 그리고 북한의 도발을 불러왔을 것이며, 남한이 패배할 수도 있는 전쟁으로 끌어들였을 것이다.
하지만 모든 위대한 지도자들이 그렇듯이 박정희 역시 약점과 실패들이 있었다. 그는 훌륭한 정부부처들과 씽크탱크, 그리고 재벌 시스템을 만들어냈지만 정당 시스템을 제도화하지 않았다. 세계화에 대응한 움직임은 느렸으며, 한국은 아직도 중국처럼 보다 개방된 사회에 뒤떨어질 수 있는 위험이 있다. (여기서의 개방은 무역, 투자, 인재에 대한 개방성을 말한다. 정치적 자유와 언론의 자유는 한국이 중국보다 훨씬 개방적이다) 1970대 말의 재벌위주 중공업에 대한 지나친 집중은 인플레이션, 불균형한 경제, 그리고 약한 중소기업 섹터를 초래하였다. 중소기업은 고용과 혁신을 위해서는 필수적이다.
집권말기에 박정희는 경제적 성공이 불러온 위기를 이해하지 못했다. 경제발전은 복잡한 경제를 만들어 냈으며, 경제는 더 이상 청와대의 경제수석이 홀로 관리할 수 없을 정도의 규모로 성장하였다. 그리고 교육받은 중산층은 더 이상 나라의 유일한 목표가 최대치의 경제성장과 국가안보 만에 머무르는 것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전쟁의 위협과 굶주림이 사라지자 민주주의와 인권 같은 가치들이 대두하였다. 1960년대와 1970년대 초기에 안정성을 가져다 준 장치들이 불안정성을 초래하기 시작하였다. 정치적으로 연결된 재벌에 지나치게 의존하는 것은 비효율적인 경영으로 이어졌고, 노동조합과 임금을 지나치게 억제한 것은 과격한 노조와 임금투쟁을 불러왔으며, 이는 20년후인 1998년 IMF위기때도 부정적인 여파를 가져왔다. 만약 김대중이 암살되었거나 학생운동이 진압되었다면 나라는 분열되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한국은 성보다 발전된 경제, 정치적 시스템으로 점진적으로 이동하는데 성공하였다. 박정희가 만들어낸 기관들과 엘리트들은 박정희식 통치에서 벗어나버린 국가에 균형을 가져오는데 성공하였다. 이러한 이유로 인해 박정희의 유산은 그의 실패보다는 성공에 집중되어 있다. 이것이야 말로 위대함을 증명하는 테스트이다. 박정희의 성공에 기반하여 한국은 개방된 경제, 활발한 민주주의, 그리고 평등한 사회를 만들었고, 이는 일본의 동맥경화와 태국의 분열을 피할 수 있도록 하였다. 이의 결과는 빠르게 상승하는 경제적 지위, 지정학적 영향력과 인권에 대한 존중이다. 2015년경에 한국의 구매력평가 소득은 일본을 추월할 것이다. 한국은 오바마의 최고 동맹국이며, 미국보다 발전된 통신인프라를 갖고 있다.
희망적으로 이것은 북한과 관계를 개선하는 다음 어려운 과제에 남한이 준비되도록 하였다. 박정희는 군사, 정치, 경제를 북한보다 우월하게 만들기 위해 노력하였다. 그 성공의 결과로 인해 남한은 오늘날 모든 관점에서 남한보다 열등하며 썩어가고 있는 북한을 적으로서 두고 있다. 아이러니하게도, 이것 역시 어려운 과제를 남한에게 부여하고 있다.
원문: http://www.ash.harvard.edu/extension/ash/docs/parkjunghee.pdf