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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의 현지첩, 방지기
게시물ID : history_18943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추태산발호미
추천 : 4
조회수 : 2156회
댓글수 : 0개
등록시간 : 2014/12/10 00:13:34
출처 : 부북일기


 박취문의 경우 부방길에 동침하였던 여인들의 인적 사항과 이름을 상세히 일기에 기록해 두고 있어 이채롭다. 아버지 계숙이 기생들을 녹의綠衣, 홍안紅顔 등으로 은근히 표현하였을 뿐 아니라 동침한 사실도 두차례정도 밝혀놓은데 불과한 점과 비교해 볼때 대단히 솔직하고 직설적이었음을 알수있다.

그는 약1년동안의 부방길에서 많은 여자와 동침하였는데, 동침녀들은 천민들로서 대개 기생, 숙박한 집 의 가비家婢, 주막의 주탕酒湯 등이었다. 
주탕은 술과 몸을 팔던 천비賤婢를 가리켰다. 

그의 행위가 한 개인 의 특수한 상황만이 아니었다는 점은 일기의 곳곳에 기록된 동행 군관들의 행태에 서도 증명된다. 

취문은 동행한 친구의 동침녀까지 가끔 자세하게 밝혀두었기 때문이다. 예컨대 자칭 ‘인색대장군忍色大將軍’이라 호언하며 여색을 절제한다던 동행한 출신군관 박이명도 얼마 못가서 주탕 도선에게 훼절하였다는 대목이다. 전반적인 대세를 개인적인 인내로 거스르기가 매우 어려웠던 당시 상황을 전해주고 있다. 

다음으로 군관들의 변방 생활에서 주목할 것은 방직房直의 존재이다. 방직은 ‘방지기’를 가리키겠는데, 외지에서 온 군관들에게는 대개 방지기를 한 명씩 배정해 주어 그 집에서 숙식을 비롯하여 객지에서의 불편함을 해결하도록 하였으니, 방직 은 일종의 소위 ‘현지첩’인 셈이었다. 군관들의 방지기는 주로 기생이나 사비私婢 중에서 충당되었는데, 기생일 경우 방직기 또는 방기라 표현하였고, 비일 경우 방직비 또는 방비라 하였다.  박계숙 일기에는 방직기라고 명기된 이는 없었으나 동행한 군관 김응택과 김대기 등이 녹의를 얻었다는 기록에서 녹의는 바로 방직기를 우회적으로 표현한 것이라 판단된다. 

방직기에 대해서는 박취문의 일기에는 좀 더 자세하게 나타나 있다. 취문의 경우 처음 사비 노종을 방지기로 배정받았는데, 어떤 이유에선지 며칠 뒤 기생 의향으로 바뀌었다. 의향은 회령부 읍내에 살고 있었고, 그 어머니는 조금 떨어 진 촌가에서 살고 있었는데, 그 어머니가 자주 의향의 집에 왕래하면서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의향의 어머니가 촌가에서 반찬이나 술, 그리고 땔감을 가 지고 수시로 내왕하였고, 박취문이 아플 때는 병문안을 오기도 하였다. 그리고 의향도 빨래나 옷의 재단등 큰 일감이 있을때는 그녀의 어머니에게로 가서 도움을 받으며 며칠 머물기도 하였다. 

군관과 방직기의 관계는 군관이 떠나면 자연 해소되는 한시적인 관계였다. 왜냐면 방직기는 당해 군현에 소속된 존재였기 때문에 관내를 벗어나지 못하기 때문이 었다. 박취문과 의향의 관계도 그가 병사의 명으로 경성 병영으로 전근되어 회령을 떠나게 되었을 때 해소되었다. 경성으로 간 그는 병사로부터 새로운 방지기를 배정 받았던 것이다.   

대개 변방지역에는 군관들을 위한 방지기가 일정수 확보되어 있었겠으나, 방지기의 부족으로 인해 미처 배정을 해주지 못하는 경우도 있었다. 이때는 사비私婢가 강제로 동원되기도 하였다. 박취문이 회령에서 경성 병영으로 근무지를 옮겼을 때 그에게 배정할 마땅한 방직기가 없었던 듯 병사는 과부가 된 사비 태향을 강제로 그의 방지기로 삼게 하였다. 태향이 순순히 이에 응하지 않자 병사는 그녀의 어머 니와 오라비를 불러 곤장을 때리면서 협박함으로써 목적을 달성하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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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일 
병사가 사비 태향苔香을 불러 말하기를 “듣자니 네가 전 지아비를 위하여 수절을 몇년동안 하고있다고하니 그 마음은 실로 가상하나, 내 군관중에 아직 방직인을 얻지 못한자가 있으니 오늘 저녁에는 반드시 네 집으로 모시고 가거라.”라고 호령하고 보냈다.  

23일 
태향의 어미와 오라비를 잡아와 호령하길“어제 태향에게 분부한 바가 있었는데, 듣자니 신랑을 청하지 않고 갔다고 했다.”고 하면서 모자에게 한차례 곤장을 때리고 위엄을 보이니, 오늘 저녁에는 초청한 다고 하는 고로 풀어주었으니 이로써 웃음거리가 되었다. 그날 저녁 과연 청하러 왔으므로 여러 군관들에게 빙 둘러싸여서 함께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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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에 노비에게 수절따윈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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