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종 2권, 즉위년(1452 임신 / 명 경태(景泰) 3년) 7월 4일(을미) 3번째기사 《세종실록》을 편찬하면서 이호문이 기록한 황희의 일에 대해 의논하다
그때 《세종실록(世宗實錄)》을 편찬하였는데, 지춘추관사 정인지(鄭麟趾)가 사신(史臣) 이호문(李好問)이 기록한 황희(黃喜)의 일을 보고 말하기를,
“이것은 내가 듣지 못한 것이다. 감정에 지나치고 근거가 없는 것 같으니, 마땅히 여러 사람들과 의논하여 정하여야겠다.”
하고, 영관사 황보인(皇甫仁), 감관사(監館事) 김종서(金宗瑞), 지관사(知館事) 허후(許詡), 동지관사 김조(金銚)·이계전(李季甸)·정창손(鄭昌孫), 편수관 신석조(辛碩祖)·최항(崔恒)과 더불어 이호문이 쓴 것을 가지고 조목에 따라서 의논하기를,
“그가 이르기를, ‘황희는 황군서(黃君瑞)의 얼자(孼子)이라.’고 한 것은 일찍이 이러한 말이 있었다. 황희도 또한 일찍이 스스로 말하기를, ‘나는 정실(正室)의 아들이 아니다.’라고 하였다. 그러나 나머지 그 밖의 일은 전에 듣지 못하였다.”
하니, 허후가 말하기를,
“우리 아홉 사람이 이미 모두 듣지 못하였으니 이호문이 어찌 능히 홀로 알 수 있었겠는가? 나의 선인(先人)께서 매양 황상(黃相) 을 칭찬하고 흠모하면서 존경하여 마지 아니하였다. 사람됨이 도량이 매우 넓으며 희로(喜怒)를 나타내지 아니하였다.
수상(首相)이 된 지 거의 30년에 진실로 탐오(貪汚)한 이름이 없었는데, 어찌 남몰래 사람을 중상하고 관작을 팔아먹고 옥사에 뇌물을 받아서 재물이 거만(鉅萬)이었겠는가? 그가 친구의 문유(問遺)를 통한 적은 간혹 있으나, 만약 자녀의 수양(收養)한 일 같은 것은 곧 세상 이목이 함께 들어서 아는 바이다.
황치신(黃致身)과 황수신(黃守身)은 모두 수양(收養)이 없고, 오로지 황보신의 처(妻)만이 양모에게서 자라나서 노비와 재물을 많이 얻었다.
그러나 이것이 어찌 황희에게 관계되는 것이겠는가? 그가 말하기를, ‘본래 창적(蒼赤)이 없었고 장인[妻父]에게서 얻은 것은 겨우 1, 2구뿐이었다. 그러나 자신이 부리는 자는 그 수를 알지 못한다.’ 하였으나, 아내 양씨(楊氏)는 세족(世族)이기 때문이니, 그가 ‘노비가 없었다.’고 말한 것은 망언이다. 더구나 황희의 자녀가 노비를 부리는 것은 사람이 모두 아는데 어찌 그 수를 알지 못한다고 하는가?
그가 ‘김익정(金益精)이 황희와 더불어 서로 잇달아서 대사헌이 되어서, 모두 중[僧] 설우(雪牛)의 금(金)을 받았으므로, 당시 사람들이 이들을 「황금 대사헌(黃金大司憲)」이라고 일컬었다.’ 하였으나, 이것도 또한 알 수가 없다. 이미 말하기를, ‘당시 사람들이 이를 일컬었다.’ 하였는데, 지금 여기에 앉아 있는 8, 9인은 어찌 한 사람도 들은 적이 없는가? 이호문은 나의 친속(親屬)이나, 사람됨이 조급하고 망령되고 단정치 못한데, 그 말을 취하여 믿을 수 없으니, 이를 삭제함이 어떠한가?”
하였다. 김종서가 말하기를,
“박포(朴苞)의 아내 사건은 규문(閨門) 안의 은밀한 일이니, 진실로 쉽게 알 수 없다. 그 밖의 일은 마땅히 사람의 이목(耳目)에 전파되었으므로 숨겨둘 수가 없는데 어찌 이와 같은데도 사람들이 알지 못하였을까? 김익정은 나의 재종형(再從兄)인데, 내가 자세히 그 사람됨을 안다. 청렴결백함을 스스로 지키고 신과(信果)하기를 스스로 기필(期必)하는데, 이를 국량(局量)이 좁다고 일컫는 것은 가하지마는, 헌장(憲長)이 되어서 남의 뇌물을 받았다는 것은 단연코 그리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하니, 모두가 말하기를,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로 사필(史筆)은 다 믿을 수 없는 것이 이와 같다. 만일 한 사람이 사정(私情)에 따라서 쓰면 천만세(千萬世)를 지난들 능히 고칠 수 있겠는가?”
하였다. 정인지가 말하기를,
“내가 일찍이 세종의 교지를 친봉(親奉)하였는데, 말씀하시기를, ‘경들은 또한 사신(史臣)이니, 자세히 알고 있는 일은 추록(追錄)하는 것이 옳다.’ 하셨다. 일개 한림(翰林)이 쓴 것도 또한 ‘사초(史草)’라고 하니, 대신에게 감수 시키는데 훤하게 아는 일을 홀로 쓰지 않는 것이 가하겠는가? 우리도 또한 사신(史臣)이다. 이미 그 근거가 없음을 알면서 고치지 않는다면 어찌 이를 직필(直筆)이라고 하겠는가?”
하고, 황보인은 말하기를,
“이것은 큰 일이니, 마땅히 중의(衆議)를 채택해야 한다.”
하고, 최항·정창손은 말하기를,
“이것은 명백한 일이니 삭제하여도 무방하지만, 다만 한 번 그 실마리를 열어 놓으면 말류(末流)의 폐단을 막기 어려우니 경솔히 고칠 수 없다.”
하였다. 정인지가 말하기를,
“그러면 어떻게 이를 수정이라고 하겠는가?”
하니, 황보인 등이 말하기를,
“이와 같이 큰일은 하나라도 불가함이 있으면 마땅히 정법(正法)을 따라서 삭제하지 않아야 한다. 또 찬성(贊成) 권제(權踶)가 졸(卒)하였을 적에 사신(史臣)이 쓰기를, ‘대체(大體)를 알고 대신의 풍도(風度)가 있었다.’고 하였다.”
하였다. 김종서가 말하기를,
“권제는 가정이 바르지 못하여 정실과 소실의 자리가 뒤바뀌고 규문(閨門) 안에 자못 실덕(失德)한 일이 있었으니, 어찌 대체를 알고 대신의 풍도가 있다고 할 수 있겠느냐?”
하니, 드디어 모두 의논하여 이를 삭제했다. 기주관(記注官) 등이 이를 듣고 말하기를,
“법을 들어서 논한다면 마땅히 이와 같이 하여야 한다.”
하니, 성삼문(成三問)·이예(李芮)가 곧 말하기를,
“사신(史臣)이 쓴 것이 만일 정론(正論)이라면 이와 같이 하는 것이 옳지마는, 만일 사정(私情)에서 나왔다면 정 판서(鄭判書)의 말이 마땅하지 않겠는가? 더구나 그 좋지 않은 일에 대해서는 사서(史書)에 써서 두고, 그 좋은 일에 대해서는 믿을 수 없다고 하여 삭제하여 버리니, 어찌 그리 상반되는가? 어찌 이것이 좋은 장점을 기리고, 악한 단점을 미워하는 의리이겠는가?”
하고, 성삼문이 또 말하기를,
“이호문의 사초(史草)를 살펴보건대, 오랫동안 연진(烟塵)에 묻히어 종이 빛이 다 누렇고 오직 이 한 장만이 깨끗하고 희어서 같지 아니한데, 그것은 사사로운 감정에서 나와서 추서(追書)한 것이 분명하니, 삭제한들 무엇이 나쁘겠는가?”
하니, 김맹헌(金孟獻)이 말하기를,
“내가 이호문과 한때 한림에 있었는데, 사람됨이 광망(狂妄) 하여 족히 따질 것이 못된다.”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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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의에서는 삭제되기로 결론이 모아졌지만, 실제론 실록을 고쳐선 안된다는 이유로 삭제를 못했습니다;; 황희 안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