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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GM) 대한민국의 탄생- (2)민주주의 실천의 기원은 언제부터인가
게시물ID :
history_188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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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
키위링
추천 :
11
조회수 :
784회
댓글수 :
7개
등록시간 :
2014/11/22 12:28:36
BGM정보 : 브금저장소 -
http://bgmstore.net/view/nBVFJ
19
세기말 조선에는 박영효
,
유길준 등에 의해 민권이니 의회니 입헌 정치니 하는 말이 점차 널리 알려지기 시작했습니다
.
하지만
,
박영효
,
유길준을
‘
최초의 민주주의자
’
라고 평가하기에는 무리가 있습니다
.
‘
민주주의
’
는 민
(
民
)
이 나라의 주인으로
, ‘
민
(
民
)
이 나랏일의 결정권을 갖는다
.’
는 뜻입니다
.
그런데 이들은 한편에서 민권을 주장하면서도
,
인민의 정치 참여는 이르다고 보았습니다
. “
인민이 지혜가 없으면 나랏일을 의논할 수 없다
.”
라며
,
가르친 후에 참정권을 주어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
그들은 모든 인간의 천부적 권리를 주장하였습니다
.
그러나 이들은 왕권을 제한하려는 맥락에서만 이 말을 사용하였고
,
선거를 통해 민의 대표를 선출하자는 맥락에서는 이 말을 전혀 사용하지 않았습니다
.
우리나라만 유별난 것은 아닙니다
. 1890
년 치러진 일본 선거에서 투표권은
1
퍼센트 정도밖에 안되는 부자에게만 주어졌습니다
.
유럽의 민주국이라 불리던 나라들 중 그때 보통 선거권을 승인한 나라는 거의 없었습니다
.
그래서 왕의 절대권이나 귀족의 특권에 맞서 민권을 주장한 사람들을 가리키는 말이 따로 있습니다
.
바로 자유주의란 말 입니다
.
자유주의는 군주제나 신분제에 맞서
,
모든 사람의 자유와 법 앞의 평등을 실현하는 데 크게 기여한 사상이자 운동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
그러나 자유주의가 곧 민주주의는 아닙니다
.
자유주의는 개인의 자유를 최고의 가치로 여기는 데 비해
,
다수의 지배란 뜻의 민주주의는 공동체 속에서 평등한 관계를 소중하게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
그래서 공동체 안에서 자유와 민주는 자주 충돌하기도 합니다
.
민주주의를 자유주의와 구별해 사용한다면
,
최초의 민주주의자 후보도 달라져야 하겠습니다
.
새로운 후보군을 떠올리려면
,
아예 완전히 다른 이야기를 할 수밖에 없겠군요
. 1893
년 보은에서 열렸던 민중 집회 이야기를 조금 들려 드리겠습니다
.
“
너희들이 돌을 쌓아 진을 만들고 장대를 세워 깃발을 만들어 무리를 지은 지 여러 날이다
.
조정의 해산 명령을 듣지 않으니 이는 반란을 도모함이 아니냐
?”
“
그렇지 않다
.
우리는 전혀 무장하지 않고 민회를 열고 있는 것이다
.
듣자니 여러 나라에 민회가 있어서
,
나라의 법률을 만들거나 민국에 불편한 일이 있으면 회의를 연다 한다
.
우리를반란의 무리라 부르면 되겠는가
? ”
-<<
취어
(
聚語
)>>
민회니 민국이니 하는 말이 집회 참가자들 사이에서 나온 것입니다
.
처음에는 소수의 교육받은 이들
,
나라 밖을 다녀온 이들만 쓰던 말인데
,
이제 점차 많은 이들에게 알려진 것입니다
.
물론 민회니 민권이니 하는 말을 처음 소개한 사람들은 그것이 배운 자들이나 가진 자들에게 어울린다고 생각하였습니다
.
그런데 이 말을 알게 된 민중은 그 말을 자기 것으로 만들었습니다
.
우리 역사 속에서도 자유주의는 군주제나 신분제를 반대하고 보수세력을 약화시키는 등 민주주의를 확대하는 데 일정하게 기여하였습니다
.
그러나 자유주의가 곧 민주주의는 아니었으며
,
자유를 주장하는 이들과 평등을 주장하는 이들이 충돌한 적도 있습니다
.
그래서 민주주의의 실천은 자유주의와 다른 계통에서도 시작됩니다
.
민중적 지식인 전봉준
전봉준이 자유주의 사상을 알았다거나
,
서양의 입헌 정치를 알았던 흔적은 없습니다
.
다만 사람이 곧 하늘이니 모든 인간은 존중받아야 한다고 생각하였으며
,
그렇지 못한 세상에 분노하였고
,
동학에서 내놓은 보국안민을 나라의 주인으로 세상을 바꾸겠다고 해석하였을 따름인 것입니다
.
집강소
,
아시죠
? 1894
년
5
월부터
8
월까지
,
농민이 주체가 되어 스스로 개혁을 실천하였던 민중 자치 기관
.
농민이 선출한 집강은 실상 고을 수령과 같았습니다
.
그들은 수령이 머무르는 동헌에 자리 잡고 고을 행정을 주관하였습니다
.
논란이 있는 문제는 회의를 열어 결정하였고
,
여러 고을에 걸쳐있는 제도적인 문제는 의견을 수렴하여 전주로 보냈습니다
.
전봉준은 여러 고을을 다니며 개혁을 도왔습니다
.
그리고 수시로 전라도 감영에 나가 도 차원에서 해결할 문제를 처리하였습니다
.
그래서
“
전봉준이 진짜 관찰사
”
란 말까지 나돌았습니다
.
이 때
,
한양에서는 문제많은 친청수구정권을 퇴진시킨뒤
,
농민의 지지를 받던 대원군을 섭정에 추대하고 개혁 세력으로 새 정권을 세웠습니다
.
드디어 갑오개혁이 시작된 것입니다
.
각도 관찰사들은 수령에게 명령하여 향회를 설치하게 하라
.
각 면의 인민들이 행정을 잘 알고 노련한 사람을 선발하여 향회원으로 삼아
,
고을관청에서 회의하게 하라
.
법을 만들거나 민간의 폐단을 고칠 일이 있을 때
,
고을 차원에서 결정할 수 있는 일이라면 마땅히 회의를 열어 가부를 결정한 뒤 시행한다
.
-
군국기무처
,<<
경장의정존안
(
經長義政存安
)>>
군국기무처가
1894
년
7
월
12
일 의결한
‘
향회 설립에 관한 건
’
입니다
.
이게 무엇입니까
?
의회
,
지방 의회 아닙니까
?
그렇습니다
.
새로 성립된 정권은 향회란 이름으로 다른 나라에서 실시되는 지방 자치제를 도입하려 하였습니다
.
개혁파는 권력을 잡았던 기간 동안 나름의 전망을 가지고 비교적 일관된 개혁을 추진하였습니다
.
그들은 초보적이나마 입헌 정치를 시도하려 했습니다
.
군주 한 사람이 모든 권력을 행사하고
,
신분 차별을 제도화하였던 낡은 관행을 허물려 하였습니다
.
국왕이 곧 국가는 아닙니다
.
지금까지 모든 것이 국가와 국민을 위해 있지 않고 국왕 한 사람을 위해 만들어졌습니다
.
국왕은 생사여탈권을 가졌고
,
이것이 악의 원천이 되어 나라는 약해지고 가난해졌습니다
.
-
유길준이 미국인 스승 모스에게 보낸 편지
국왕의 권한을 제한해야 나라가 강해질 것이라는 생각에서 나온 말입니다
.
개혁파는
1
년 반 동안 개혁 관료가 입법권과 주요관리 임명권을 행사하는 내각제를 실시하고
,
지방 의회 구성을 시도한 향회 조례를 만들었습니다
.
사법 기구를 행정에서 분리하고
,
민의 생명과 재산의 자유를 보장하고
,
법 앞의 평등을 추구하였습니다
.
돌이켜 생각하면 어마어마한 일입니다
.
그 개혁을 민주와 공화국이라는 말로 평가하기는 어렵지만
,
자유주의 개혁이라 할 만한 요소는 충분합니다
.
그런데
,
이들의 개혁을 가장 못마땅하게 생각한 사람이 누구겠습니까
?
얼마나 많은 사람이 그동안 누렸던 기득권을 내려놓아야 할까요
?
그 지점에서 생각해 보십시오
.
내각을 둔 뒤 모든 정무를 내각이 독단적으로 처리하고 군주는 다만 요구에 따라 도장만 찍게 되었다
....
대신들이 원하는 대로 국체를 변혁해서 새로 공화 정치를 일으키든가
,
또는 대통령을 선출하든가 너희들 마음 내키는 대로 하라
.
-
일본 공사관 기록
당연히 왕실이 가장 불만이 많았겠지요
.
또 불만이 많았던 사람은 누구였을까요
?
모든 사람이 평등해진다면
,
불평등한 관계에서 이득을 보던 이들은 어떻게 되나요
?
전통적인 과거제를 폐지하고 분야별로 능력을 갖춘 이를 새로운 방식으로 등용하면
,
유교 경전을 읽으며 평생 과거 공부만 하던 이들은 어떻게 될까요
?
그렇습니다
.
개혁은 기존 질서에서 특권을 누렸던 사람을 넘어서야 성취될 수 있습니다
.
그래서 개혁이 진행될수록 개혁에 대한 저항이 커지는 것은 당연하겠지요
.
왕실과 왕실을 지지하는 이들과 양반들이 거대한 반대 세력으로 결집하였습니다
.
개혀의 성패는 이처럼 강력하게 결집하는 수구 세력을 제어할 힘이 있을 때 가능했을 것입니다
.
이 시기 개혁파는 일신의 영달을 꾀하고자 권력을 휘두르지는 않았습니다
.
대부분 친일 인사여서 친일 정권이라 부를 수는 있지만 그들을 나쁜 의미의 친일파와 동일시할 수는 없습니다
.
그래서 이 시기 역사는 돌아볼수록 아쉬움이 많습니다
.
하나의 사상이나 운동으로 결집되지는 못하였지만
,
그들 속에서 자유주의의 싹을 볼 수 있었어요
.
그 자유주의는 낡은 체제에 맞서 자유와 평등을 제도화한 민주공화국의 역사에서 중요한 첫걸음을 내디딘 것이었습니다
.
다음 대한민국의 탄생 시리즈는 (3) 민주주의 제도화의 시작은 언제부터인가 로 찾아오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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