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너희들을 강요하지 않겠다. 따르지 않을 자들은 가라.
대장부가 이 세상에 태어나서 한 번 죽는다면 사직(社稷)에서 죽는 것이다.
나는 혼자서라도 가겠다.
계속 만류하는 자가 있다면 먼저 그부터 목을 베겠다.
([연려실기술] 세조, 정난조)
조선왕조 7대왕 세조(世祖, 1417~1468, 재위 1455~1468).
수양대군(首陽大君), 이 유(李瑈)
세종대왕과 소헌왕후 사이의 차남
아버지 세종과 형 문종의 유지를 어기고 조카인 단종을 쫓아내고 왕위를 찬탈하여
이후에도 혈육과 신하들에 대한 숙청을 했던 잔혹하고 냉혹한 왕으로 많이 알려져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조선의 초기 국가체제를 정립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한 인물
평가가 여러모로 엇갈리는 군주로 어떤점에 집중할것인가에 따라 천하의 개썅놈에서
군주권의 강화에 노력한 노련한 군주까지 다양한 평가를 차지한다.
심지어는 아버지와 형이 이룬 조선전기의 번영에 암운을 드리우는 단초를 제공한 군주로 평가하기도 한다.
세조에 관련된 드라마, 혹은 영화 하나가 흥할때마다 평가가 이리저리 뒤바뀌는 인물중하나.
사실 정권과 정치색에 따라서도 평가가 갈리는데 쿠데타로 정권을 획득한사례가 두차례나
있었던 대한민국의 현대사와 관련하여 그래도 알고보면 꽤 좋은 왕이라는 평가를 현대사에서 오랫동안 받았었다.
세종의 차남이며 군호는 1428년을 시작으로 진평대군->함평대군->진양대군으로 여러차례 바뀌었지만
최종적으로 받은 군호는 수양대군.
일반적으로 수양대군이라 하지만 왕자 시절은 진양대군으로 불린 시절이 1433년이래 12년으로제일길었다.
수양으로 군호가 바뀐건 한글반포 1년전인 1445년 그리고 왕위에 오를때까지 10년
수양대군으로 불리게된다.
문인 기질의 성군에게서 나온 무인기질의 돌연변이아들.
하지만 사실은 문에도 뛰어났다. 다만 아버지와 형이 무척이나 뛰어나서 그늘에 가려졌을 뿐이다.
또한 세종의 아들중 유일하게 무인적인 인물이라고 보는 시각도있지만.
세종의 4남인 임영대군과 6남인 금성대군도 무인기질의 인물이었으며
문종도 무인이라고하기엔 좀 그렇지만 조선제일 화포전문가였던지라
그렇게까지 볼일은 아니다. 문무양면에서도 모두 뛰어났던인물.
능력 측면에서도 동생 안평대군도 재주가 뛰어나서 수양대군과 암수를 가릴 정도였고
형 문종의 경우 아버지에 버금가는 완전체로 측우기를 설계한데다
화포전문가이고 세종대왕이 와병중일때는 대리청정을 맡아서 국정을 잘 처리했을 뿐 아니라
세종사후에도 상당한 정치력을 발휘한 인물이였으니
사실 수양대군은 할아버지를 상당히 많이 닮아있다.
무예에 상당한 소질이있는것도 그렇고 인격적으로도그렇고,
다만 모든면에서 다운그레이드였다는것이 문제다
특히 인격적인면에서는 할아버지보다도 못했다.
세종대왕시기때에는 왕자들 가운데 문종 다음으로 공이 많은 인물이었던것으로 알려져있다
훈민정음 창제에도 참여했고,석가모니의 공덕을 한글로 지어 아버지에게 바치자
세종대왕은 감동하여 월인천강지곡을 적게되었다
특히 무예에 무척이나 능하여 우예에 좀 서투른 형에게 우월감을 느꼈는데 아버지의 전례를
생각해서 자신이 세자가 되기를 은근히 바라고 있던걸지도 모른다.
문무겸적의 인상이 강하기 때문인지 세종대왕의 뒤를 이어 문약한 대신에 문무를
겸비한 세조가 즉위했어야 한다는 주장이 나오기도 하나, 사실 문종은 문약한 사람이 아니다.
문종이 학문을 중시하고 무예는 세조보다 떨어지는것은 사실이나
그것은 개인적 무력만 보고말한것이지 군사적 측면에서는 뛰어났다.
(동국병감, 화차, 천문기기 등)
문종이 세종대왕 후반기에서부터 병치레가 잦았고 결국 즉위3년만에
사망한것은 아버지 세종대왕을 대신해 대리청정을 맡은데다 양친상을 너무 충실하게
지내는등 무리했기 때문으로 원래는 병약한 인물이 아니었다.
문종이 병치레가 잦았던건 이외에는국왕으로서 무척 유능한 인물이었고
8년간의 대리청정으로 실무경험도 풍부했으므로
세종대왕 입장에서는 명분뿐만이아니라 능력을 보더라도 굳이 세자를 갈아 치울 이유가 없었다.
수양대군은 사극에서와는 다르게 문종이 살아있던 시절에는 거의 찍소리도 못하고 살았다.
정말 사극에서처럼 만만해 보이는 형이었으면 조카인 단종에게 했듯이 형을 압박하여 옥좌에서 내쫓았을것이다.
다만 아주 찍소리를 못낸것은 아니고,이전에도 이미 야심을 드러내는 발언을 몇차례 말했기도했다.
또 어느날은 도첩증이 없어서 체포된 승려를 멋대로 풀어주어 문제가 되기도했지만
문종의 권위에 대놓고 도전하는 미친짓은 절대로 하지 않았으며
문종이 아프다는 소식을 듣자 울고불며 청심환을바치라는 등의 행동을 하기도 했다.
그리고 본격적인것은 아직 시작되지않았는데, 세조는 왕자시절부터 야심을 드러냈고
한명회나 홍윤성, 권람 등을 심복으로 삼은 후 하나의 세력을 형성했다.
수양대군 못지 않은 동생 안평대군도 하나의 세력을 형성하는데, 후에 안평대군이 김종서 세력과 연합한다.
물론 김종서와 황보인 등의 고명대신들도 하나의 세력이다.
이 과정(안평대군과 김종서의 연합)에서 안평대군측에 가까웠던 소장파세력들이 수양대군 세력에 암중 협력하는모습도
보이지만 실질적 저력으로 보면 세력의 균형이 완전히 무너진 것이다.
그런 상황을 극적으로 타개할 필요성이 느껴졌고 1453년 10월10일에는 계유정난을일으켜서
김종서 황보인등을 척살하고 동생 안평대군을 역적으로 몰아서 죽인후에 정권을 잡았으며
2년뒤에는 단종에게 선위받는 형식을 취해 조선7대국왕으로 즉위했다.
일각에서는 세력에게 뒤쳐저서 어쩔 수가 없었다 라고 구너무 궁지에몰려서
어쩔수없이 거사를 일으킨것이라고 포장하는데 애초에 야심을드러내고
할아버지가 피냄새나게 숙청하고 금했던 사병을기르고
한명회등을 심복으로삼아 일을 추진한것을생각해볼필요가있다.
그이후 사육신의 단종 복위운동과 금성대군이 꾀한 단종복위운동이 있었으나
결국 이마저도 실패로 돌아갔고 마침내 단종도 죽음을 맞게되어서 그의 권위는 더욱 공고해졌다
아무리 능력있는 왕이었다고 하더라도 피로 얼룩진 군주라는 사실은 부정할수없다.
①계유정난
계유정난이란 단종1년에있었던 세조의 쿠데타.
단종은 어리고 엄마 아빠 할아버지 할머니 모두돌아가시고 호랑이같은 숙부들만 드글대는 상황이였는데,
그중에 한명이 수양대군
계유정난이 일어날때, 단종은 누나인 경혜공주의 신혼집인 향교동에서 자고있었는데
자는도중에 날벼락을 맞는다.
세조는 어린단종을 지켜줄사람이없다는명분과 동시에 고명대신들이 왕권을 약화시키고
단종을 위험하게한다면서 계유정난을일으켰다.
그리고 김종서를 죽이고, 천여명의 군사를 이끌고 향교동으로 향했다.
경혜공주의 저택에다다른 수양대군은 네겹으로 방어선을치고 단잠에 빠져있던 단종에게 들이닥쳐
김종서가 안평대군을 추대하려는 모반을 꾸몄다면서 급박한상황이라 자신이 할수없이 김종서를 먼저죽였으니
나머지 무리들도 밀어버리겠다고함
조금전까지 누나와 매형과 함께 있으며 이런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꿈에도몰랐던 단종은
소스라치게 놀라 겁에질렸다.
그리고 수양대군은 임금이 신하를 불러들일때 쓰는 명패를 받아감
이건 자신의 걸림돌이었던 신하들을 오늘밤 다 죽인다는 의미.
경혜공주의 저택에 네겹의 방어선을 쳤던 수양대군은
단종의 명패로 불러들인 재신들이 하나씩 당도할때마다 살리고죽일 사람을 적어놓은 생살부를 보고
죽을 사람이라면 세번째 방어선에 들어섰을때 기다리고있던 장사들에 명하여 쇠몽둥이로 때려죽임.
그렇게 죽은 고명대신들을대신해 수양대군은 영의정부사나 높은관직에 앉았다.
②업적
세조는 경국대전을 편찬하기 시작하였고 태종처럼 6조직계제를 실시해 왕권을 강화하는한편
여러가지 제도를 정비해서 나라의 기틀을 공고히 하였다
그과정에서 시국과 정치를 토론하는 경연도폐지했다.
그리고 가장 핵심인 집현전 문도 닫아버렸다. 이는 사육신들의 후폭풍이였다.
그래서 고려때부터 존재하던 집현전의 기능은 예조로 넘어갔다
6조직계제로 왕권을 강화하려는 모습을 보여주긴했으나
공신들에게 엄청난 특권을 부여했기 때문에 사실상 세조 사후 이 공신들이 훈구척신이되어
왕권을 견제하였기때문에 좋게 평가하지 않는 사람들이 많다.
또 강력한 신권을 억눌러서 왕권을 강화해놨는데 후대의 왕들이 이것을 유지할 수 있는
능력이 안되니 오히려 친위세력들이 권신이되어버린 경우이다.
위에서보여주는 잔인한 모습과는달리 왕으로서나 남편 아버지로서는 좋은 모습을 많이보여줬는데
백성들의 삶에 관심이 깊어서 세종대왕때의 나름 악법인 수령고소금지법이 폐지된것도 세조때였다.
행차때마다 백성들을 직접만나서 의견을 들은것도 이때였다.
또 군사적으로도 업적을 남겨서 문종의 5위진법사상을 계승하여
중앙군 편제를 바꾸었으며 지방에 전국55개의 진을 설치하여 진관체제를 마련하였다
물론 이는 세종대왕때부터 정비된 군사제도의 결과인 면도있다
어쨋든 군사를 정비하여 신숙주를 북방으로 파견하여 여진족의 본거지를 크게 들쑤시고돌아왔고
이시애의난 직후에는 남이 강순등으로 하여금 세종대왕때부터 조선변경에서 골치를 썩인
이만주를 참살하는 개가를 올렸다.
인간 세조
세조는 술을 좋아하였으나 여색을 가까이 하지는 않았다고 한다.
대단한 애처가 이기도 했다. 후궁도 하나뿐이였으나 그나마도 즉위를 한 후 맞아들인 건 아니다.
정실 왕후인 정희왕후 윤씨를 아껴서 별로 중요하지 않은 일로 밖에 나갈 때에도 항상 대동했고,
국정에 있어서도 그녀의 의견을 많이 참고했다.
국정 회의에서도 왕비의 의견을 소개하는 기록도 있다.
정희왕후도 정치적 식견이 워낙 훌륭해서 자신의 친척들을 등용하려는 세조를 말리기도 했고,
이시애의 난을 평정한 후에는 남편 세조에게
"이번 일로 나라의 군사들을 훈련시키는 계기가 되었으니 이것은 국방을 튼튼히 하는 방책이 될 것인즉,
이시애의 반역이 꼭 화만은 아닙니다."라는 발언을 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시애의 반란 때문에 조선에서 함경도를 차별하기 시작했고,
결국 임진왜란 때 임해군과 순화군을 함경도민들이 스스로 잡아 가토한테 바쳤다.
훗날 정희왕후는 세조 사후 아들 예종을 위해 조선 최초로 수렴청정을 하여 국정을 무난하게 꾸려나갔다.
어머니인 소언왕후에게 매우 극진히 효를 다하였으며, 세종의 후궁인 세종의 후궁인 신빈 김씨를 친어머니 못지 않게 모셨다.
동생인 안평대군이 연년생이라서 소헌왕후가 안평대군을 양육하는 사이
상대적으로 보살핌을 받지 못해서 신빈 김씨가 어린 세조를 업어서 키웠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신빈 김씨의 소생들은 계유정난 무렵 세조와 가까이 지냈으며,
특히 신빈 김씨의 아들 계양군은 적극적으로 세조를 지지했다.
이 외 세조는 즉위한 이후에도 신빈 김씨의 아들들은 극진히 대해 주었다.
사후
위치: 경기도 남양주시 진접읍
그래서 세조의 광릉은 평소 왕릉 조성 비용의 절반 남짓으로 묘역을 조성할 수 있었는데
이런 이유로 광릉은 조선 왕릉 변천사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능이다.
1483년 그의 아내 정희왕후도 세상을 떠난 후 이곳에 묻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