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에서는 정순왕후가 노론벽파를 진두지휘하며, 정조를 죽이려 활약했던 수구파의 거두인것 처럼 묘사하고 있습니다만,
실상은 그와 많이 다릅니다.
1. 공사노비 혁파(순조1년)
정조조차도 역풍을 우려하여 추세관을 혁파하고, 부당징수를 금한정도의 조치를 취하였으나, 정조의 뜻임을 내 세워, 순조1년에 내노비/시노비 6만 6천명의 노비를 해방시켰다.
2. 지방관에 대한 관리
지금 탐오한 풍속이 날로 심해지고 있다. 비록 암행어사가 몰래 살피고, 조정에서 거듭 금하고 있으나 법망이 해이해져 두려워하지 않는다.
공공재산을 횡령하거나 교묘한 이름을 붙여 백성에게 거두는 자는 유배하거나 금고시키고 사면할 때도 풀어주지 말라 ( 순조1년 1월 10일)
이번 암행어사들이 수령을 탄핵한 것을 보니 태반은 세력없는 음관들로 현달한 거족은 열에 하나도 없었다.
생민의 위급함이 꺼꾸로 매달린것 같은데 위아래가 모두 직무에 게을러 구제하는 대책이 없으니 이는 진실로 이 미망인이 무거운 짐을 감당못한 때문이겠지만 묘당의 대신, 재상들도 어찌 책임이 없다 할 수 있겠는가 ( 순조 2년 7월 6일 )
3. 순조즉위 4년만에 수렴청정을 거둠
순조가 15세가 되던 해인 순조4년에 수렴청정을 거둠.
성종이나 명종의 경우 20세까지 수렴청정을 했던 것에 비하면, 무려 5년이상이나 일찍 수렴을 거둔 것으로, 정순대비가 권력욕에 불타는 인물이라 보기는 어렵습니다.
4. 사학(천주교) 탄압
많은 천주교신자가 남인이었던 관계로, 이를 노론의 정적인 남인에 대한 정치적 탄압이라 여기는 분들도 계시는데,
천주교신자에 대한 박해는 정순대비 혼자의 생각이라기 보다는, 당시 양반사대부의 일반적인 여론을 반영한 것이었습니다.
유교와 조상숭배전통을 가지고 있는 조선에서, 제사와 조상숭배를 거부하는 것은 체제부정에 가까운 일이었기 때문에, 이미 정조때부터 많은 사대부들이 천주교의 확산에 우려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보수적인 인물이라고 볼수는 있겠으나, 실록의 기록을 볼때, 권력의 화신은 전혀 아니었고, 정조의 정적도 아니었습니다.
기록에 근거해서 판단하면, 왕실과 국가 그리고 명분에 매우 충실한 분으로 보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