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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폴레옹의 가장 위대한 전투, 아우스터리츠 전투
게시물ID : history_18664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토츠카
추천 : 10
조회수 : 6527회
댓글수 : 2개
등록시간 : 2014/11/09 13:43:36
1.png


"우리는 거인의 손바닥 위에 놓인 아기에 불과했다."
-알랙산드로 1세, 아우스터리츠 전투 직후-

"그 지도(유럽 전도)는 도로 집어넣어라. 앞으로 한 10년 동안은 쓰일 일이 없을테니까."
-윌리엄 피트, 아우스터리츠 전투의 소식을 듣고서-



아우스터리츠에서 프랑스의 황제 나폴레옹이 오스트리아-러시아 연합군을 격멸한 전투.
이 전투에 세명의 황제가 참전했기에, 삼제회전이라고도 불린다.


1. 배경
나폴레옹은 제 3차 대프랑스 동맹을 와해시키기 위해 영국 본토 상륙을 계획했지만, 칼더 제독이 이를 저지해 무산된다. 
이 빈틈을 노려 오스트리아군은 바이에른을 격파하고 수도 뮌헨을 점령했다. 
이에 나폴레옹은 600km를 한달만에 주파하는 놀라운 기동력을 보여주며 오스트리아군을 공격, 
울름에서 마크 원수가 이끄는 4만명을 궤멸하고 오스트리아 수도 빈을 점령했다. 
오스트리아의 황제 프란츠 1세는 잔여병력을 이끌고 도망쳐 친정을 나온 러시아의 황제 알랙산드로 1세와 합류했다.

겨울이라 프랑스군의 보급도 원활하지 않았던데다가, 프랑스군이 분산되어 있어 프랑스의 지휘관들은 나폴레옹에게 철군을 제안하기도 했다. 
그러나 때마침 프랑스-스페인 연합함대가 영국의 넬슨에게 철저하게 처발린 트라팔가 해전이 벌어져
프로이센이 참전하려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기에
나폴레옹은 프랑스의 건재함을 과시하기 위해 결전을 벌어야 한다고 판단했다. 

한편 러시아의 명장 쿠투조프는 오스트리아의 지휘관들과 함께 지연전을 벌어야 한다고 제안했지만, 
알랙산드로 1세는 아직 다부가 이끄는 3군단이 전장에 도착하지 못한 이 기회에 프랑스군을 박살내야 한다고 판단했다. 
(불행히도 다부가 이끈 3군단은 전투 당일 오전에 전장에 도착했다.) 
그리고 대다수 러시아의 지휘관들은 프랑스군과 처음으로 부딪쳐서 나폴레옹의 전술적 천재성을 오스트리아의 허풍정도로 치부하고 있었고, 
황제 알렉산드로 1세도 마찬가지였다. 이에 쿠투조프는 숙소에서 나오지 않는 것으로 조용히 항의를 표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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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전투 포진
당시 아우스터리츠 전장을 볼때 가장 중요한 전술적 고지는 프라첸 고지였다. 
그런데 프랑스군은 이를 선점하지 않고 방치했고, 오스트리아-러시아 연합군은 프라첸 고지를 점령했다. 
오스트리아 지휘관들은 그 나폴레옹이 이런 실수를 하다니? 하며 놀라워 했고, 러시아 지휘관들은 나폴레옹을 비웃었다. 
그때까지 그들중 그 누구도 이 행동이 결정적인 패착이 될 것이라곤 예상조차 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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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허술한 프랑스군의 우익?

"만약 러시아군이 우익을 공격하기 위해 프라첸 고지를 비운다면, 그들은 궤멸당할 것이다."
-나폴레옹-


프랑스 군의 좌익은 무척 단단한데 반해서 우익은 매우 허술해 보였고, 그렇기에 연합군은 우익에 집중공격을 퍼부었다. 
그러나 나폴레옹은 정예였던 26경보병연대 및 코르시카/이탈리아 저격대를 투입해 이를 막아냈고, 
때마침 다부가 이끄는 3군단이 우익에 합류하면서 공세를 저지할 수 있었다.
이에 연합군은 추가병력을 투입했고, 그러다보니 자연스럽게 연합군의 중앙인 프라첸 고지의 방어는 약해지게 되었다. 

바로 이것이, 나폴레옹이 일부러 프라첸 고지를 연합군이 선점하도록 방치한 이유였다. 
나폴레옹은 연합군이 프라첸 고지라는 전술적 거점을 확보하고도, 자신이 일부러 약하게 보인 우익에 병력을 집중시켜 
프라첸 고지 방어가 약해질 것을 사전에 간파하고 있었고, 
단숨에 프라첸 고지를 점령하여 연합군 진영의 중앙을 단 한 번에 돌파하는 전략을 구상해놓고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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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프라첸 고지의 점령

"한 번의 날카로운 공격이면 전쟁은 끝난다"
-나폴레옹-


나폴레옹은 술트에게 프라첸 고지 점령을 지시했다. 때마침 끼여있던 안개가 술트의 4군단을 감춰주었다. 
드디어 4군단이 프라첸 고지에 도착했고, 러시아군은 안개를 뚫고 나타난 프랑스군을 보고 경악을 금치 못했다. 
오스트리아군까지 허겁지겁 달려와 프라첸 고지를 사수하려 했으나, 30분만에 프라첸 고지는 프랑스군의 손아귀에 떨어졌고, 
연합군 좌우익은 쪼개져 버렸다.

나폴레옹은 제국근위대를 프라첸 고지로 증원시켰고, 베르나도트의 1군단을 프랑스군의 좌익에 투입하여 공세를 개시했다. 
러시아의 콘스탄틴 대공 역시 좌익에 제국근위대를 투입하여 보강하려 했으나, 나폴레옹이 중기병대를 투입해 무산되었다. 
고지를 점령한 프랑스 포병대의 지원사격에 연합군의 우익은 궤멸당하게 된다.

나폴레옹은 프라첸 고지에 있던 술트의 4군단, 다부의 3군단의 병력을 차출해 프랑스군 우익에 서 돌격을 감행했고, 이것으로 끝이었다. 
쿠투조프가 간신히 병력을 수습하려 애썼으나, 교전 와중에 부상을 입자 연합군의 지휘계통은 모조리 무너져서 모든 전선에서 패주하기 시작했다. 
제대로 된 전열을 유지한 부대는 하나도 없었다.


5. 결과

전쟁사 최고의 예술작품, 나폴레옹 사상 가장 위대한 승리. 이때의 나폴레옹은 전술적으로 완벽했는데, 
자기 땅도 아닌 전장지형을 완벽하게 파악하고 자신의 의도를 숨기며 적이 함정이라는 것도 모르고 
자신이 의도하는 대로 움직이게 유도하는데 성공했다. 그리고 보병, 포병, 기병 모두를 완벽히 사용했고, 
휘하 원수들이 능력을 발휘할 수 있는 곳으로 적재적소로 투입시키고, 완벽한 타이밍의 공격으로 말 그대로 완벽한 승리를 거두었기 때문이다.

이로서 나폴레옹의 황제 즉위로 촉발된 제3차 대프랑스 동맹은 완전히 와해되었다. 
유럽의 전통적 강대국으로 프랑스와 자웅을 겨루던 오스트리아는 더 이상 힘이 남아있지 않았고, 러시아는 잔뜩 움츠러들었으며, 
참전을 고려하던 프로이센은 즉시 군사를 거두고 침묵했다. 
그리고 대프랑스 동맹을 주도한 영국은 트라팔가르 해전의 승리가 빛이 바래면서 내각이 교체되었다

다만 역사가중에는 이것이 나폴레옹이 몰락하는 계기라고 진지하게 논하는 사람도 꽤 있다. 
아우스터리츠에서 원체 완벽한 승리를 거두었기에, 이후 외교보단 군사적 해결책에 치중하게 되었다는 논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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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엔하위키에서 일부 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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