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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님이야기
게시물ID : history_18647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돼랑맨
추천 : 7
조회수 : 601회
댓글수 : 3개
등록시간 : 2014/11/07 18:24:28
1939년 겨울 전남의 한 시골에서 태어 났습니다.
어머님은 동생을 낳으시고 얼마후 일찍 돌아가시고 위로 누님1분 형님1분 남동생1명이 있습니다.
큰누나는 625직전 시집을 갔는데 그이후로 소식이 끊겼다가,
2000년초 집안사람들의 도움으로 안성의 한 시골에서 찾을수 있었습니다.
치매에 걸려 있어 동생을 알아보지도 못했고 60년의 세월이 서로를 알아보기도 힘들게 했습니다.
불과 2년후에 돌아가셨지만요.
지금은 전부 돌아가시고 저만 살아 있습니다.
아버님은 재혼을 하셔서 새어머님 밑으로 4남1녀를 더 두셨습니다.
그당시만 해도 장자에게 모든 재산을 물려주는 것이 당연하던 시절이라,
형님이 모든 재산을 물려받고 일찍결혼을 했습니다.
먹을것이 없던 시절이였습니다.
배운것도 없고 배울수도 없는 시골에서 배는 고프고 형수의 구박은 날로 심해졌습니다.
구박도 싫고 배고픈것도 싫어 18살에 맨몸으로 서울로 상경했습니다.
 
서울에 와서도 배고픈건 똑같 았습니다. 몇일에 한끼 먹고 버티는건 일도 아니였죠.
가진건 튼튼한 몸뿐 흘러들어간곳이 동대문이였습니다.
거기서 이정재사단 밑에서 조폭생활을 했죠.
28살쯤 되자 가족이 그리워 연락을 하게 됬고 어쩌다보니 입영통지가 날라오게 됬습니다.
늦은 나이지만 조폭생활도 청산할겸 군대를 갔습니다.
그렇게 입대한곳이 강원도 백골부대 였습니다.
군대가면 밥 잘나온다고 했었지만 현실은 그렇지 못했습니다.
군대에서도 항상 부족한 배급으로 인해 배는 고팠습니다.
신병교육을 마치고 백골부대에 자대배치를 받았습니다.
얼마후 부대에서 연대장님이 오신다고 전병력 집합이 있었습니다.
연대장이 전병력을 연병장에 집합시키고 난 후...
월남전 파병 지원자를 받는다고 말했습니다.
많은돈과 충분한 식사, 사망시 유가족에 대한 최고의 대우를 보장한다고 많은 장병들의 지원을 설득 했습니다.
그러면서 관등성명과 함께 거수를 요청 했습니다.
하지만...
이미 1차 파병에서 베트남에 간 사람들은 대부분 죽어온다는 소문이 돌고 있던상황이라..
그 어느누구도 손을 들지 않았습니다.
연대장의 목소리는 점점 커져 갔고, 차후에 안사실이지만
최초 파병시에는 지원자로 충분했으나, 죽어나가는 사람이 많아지는 소문이 돌아 지원자가 없자
각 연대별 최소징집인원을 모집하게 했다고 하더군요.
백골부대에서의 이등병생활도 힘들고 항시 배도 고프고....
그 누구하나 서로 눈치보면서손을 안들더군요. 아무도 손을 안들경우 무작위 착출이 되는것은 서로 알고 있는 사실인데말이죠.
이런저런 생각이 들기도 전에 "이병 xxx!" 하면서 손을 번쩍 들었습니다.
모든 이들의 시선이 집중 됬고 될대로 되라지 였습니다.
이미 조폭생활로 인해 부대내에서도 크게 건드는 사람이 없었지만 파병지원을 한이후에는
부산으로 배를 타러 가기전까지 약 1달동안 모든 훈련열외에 누구하나 손대는 사람없었습니다.
죽으러 가는 사람에 대한 배려랄까요. 그만큼 그당시만해도 베트남은 죽으러 가는곳이였습니다.
한 달후...
강원도에서 출발해서 여러번의 열차를 갈아타고 논산을 거쳐 부산까지 3일정도 걸렸던것 같습니다.
그 당시 부산행 기차를 타고 있던 파병전우들중 과연 지금은 몇명이나 살아 있을까요.
힘들게 부산에 도착해서 얼마후...
배가 오고 파병 출정식을 했습니다.
박정희대통령도 와서 파병하는 모든 장병에게 악수를 해줬습니다.
물론 저도 악수를 했구요. 높으신 나라의 임금님과 악수를 하는 영광을 누릴수 있었죠.
그리고 많은 이들의 환대 속에 배를타고 부산에서 월남으로 갔습니다.
 
찌는듯한 더위. 높은 습도.
지금 이글을 보는 젊은 분들은 이해를 전혀 못할것 같습니다.
월남에 지원온 많은 사람들중 절반이 넘게 딱한가지 이유로 온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배고픔. 가난함.
이미 양반제도는 없어 졌지만 지역에서 노비 생활 하는 사람들은 여전히 보니 생활에서 스스로 벗어나지 못하고
어찌 벗어난 사람들은 배운것도 가진것도 없이 있다가 전쟁치르고, 밥잘주고 돈도 준다는 월남까지 흘러들어온거죠.
저희 집안은 양반집안 이였지만, 예전의 영광이고 지금은 그들과 다름 없었죠.
 
제일 죽음은 조폭생활을 하면서도 수차례 보아 왔지만, 처음 월남에서 죽음을 목격한것은...
아이러니 하게도 부대에서 였습니다.
저는 맹호부대소속으로 들어와 배치를 받기전이였는데, 대기하고 있던곳이 백마부대였습니다.
식당에선 항상 전쟁이였습니다. 밥 한숫갈이라도 더 먹을려고 배식담당자와 힘겨루기 하는건 다반사였죠.
문제는...부대가 백마부대 그쪽 인원이 많아 밥이 먼저 준비 되어도 백마부대원들이 먹어야 우리가 그이후에 먹을수 있었죠.
암묵적인 룰이였다고나 할까요.
그런데 신참이였던 맹호부대원 하나가 배고픈데 그런거 어딧냐며 먼저 먹었다가 씨비가 붙었죠.
치고박고 식당에서 한바탕 날리가 난이후...
그친구는 그다음날 뒷간 똥통안에서 죽은채로 발견 됬죠.
 
그 이후 자대배치를 받고 맹호부대에 떨어 졌습니다.
2년 동안 말그대로 생존자체가 훈련이였습니다. 툭하면 들리는 총 포소리와 우거진 숲을 헤메다 트랩에 죽는 병사들도 허다했고
베트공의 기습에 죽는 아군도 수시로 발생 했죠.
그렇다고 당하지 만은 안았습니다.
베트공 굴을 찾아내 포로들을 다수 확보안 적도 있고, 소규모 인원으로 교전이 벌어져 이긴적도 있구요.
작전시에 동료가 한명이라도 죽었으면 베트공들 에게  배로 복수 해줬습니다.
물론 상급자이 모른척 해줬기에 가능한 일이 였지만요.
그들의 동료를 눈앞에서 장검으로 목을 따는 것은 그나마 약한 행동이였죠.
기습으로 아군이 피해를 입은 상태에서 베트공이 모두 죽거나 도망갔을경우는,
복귀후 잡혀 있는 포로를 끌고나와 피부를 벗기고, 사지를 자르고 죽창에 꿰어 부대 앞에 걸어 놨습니다.
 
아무리 힘들어도 입금되는 돈을 보고 배 굶지 않고 살수 있다는것 하나만으로도 좋아하면서
입금되는 돈은 나도 언제 죽을지 모르기에 시골의 큰형님집에 보내면서 모아달라고 했죠.
글을 쓸지 몰라 그당시에는 녹음테이프를 녹음해서 보냈었죠.
 
그러다 2년쯤 지나서 였던것 같습니다.
병장 진급 시험에 사격이 있는데 이상하게 사격을 통과못해 진급이 2번이나 누락 됬죠.
이대로 상병 전역해야 되나 하고있던차, 저에게 마지막이 되는 수색작전에 투입됬습니다.
평상시와 같은 부대 인근 정찰이였습니다.
하지만 달랐습니다. 15명의 소대 작전이였습니다.
갑작스럽게 날라드는 조준사격에 많은 전우들이 죽었고, 이어지는 혼전속에 저역시 허리부근에 총을 맞았고,
그 이후로 정신을 잃었습니다.
 
눈을 뜬곳은 아군 병영이였습니다.
다행히 허리부근에 맞은 총은 관통을 하지 못하고 몸내부에 박혀 있어서 수술로 제거 했다고 하더군요.
이어지는 이야기에 참혹할수 밖에 없었습니다.
작전지역은 부대와 약 2km안팍 밖에 떨어지지 않은곳이 였습니다.
작전에 투입된 15명중 저 포함 2명만 생존 했고, 나머지는 전원 현장에서 전사 했습니다.
교전소리를 듣고 출발한 후속부대 덕분에 그나마 2명이 살수 있었다고 전해 들었습니다.
1명 살아남았다는 동료도 중태라 헬기로 큰곳으로 이송 됫다고 하더군요.
 
더이상은 작전이 불가능 하다고 부대에서 판단을 내려, 한국으로의 귀국을 명받았습니다.
부대장님과 악수하고 한국으로 살아서 복귀하는 선물로 탄피2박스를 받았습니다.
 

 
글 솜씨도 없고 그냥 아버님의 기록을 남기고자 술한잔 드시면 하셨던 이야기를 하나하나 기억해서 옴겨보고 있습니다.
이후에는 한국귀국 이후 논산훈련소에서 조교로 근무하다 전역하신일과 그 안에서만 알수 있었던 소소한 일들...
그 이후 건축일을 배워 쿠웨이트,사우디 중동건설현장에서 있었던일...
한국으로 복귀하여 경부고속도로 건설에 참여하시고 건설당시 있었던 일...
이런 저런 일들에 대해 일단 대충 적어보고 나중에 집에 보유중인 사진첨부볼까 합니다.
 
어찌보면 국내 현대사를 몸으로 직접 격으신 아버님의 술한잔드신후에 말씀덕분인지...
어렸을적에도 국사/현대사/세계사는 항상 시험 잘쳤던것 같네요.
아 저희 아버님은 아직 정정히 살아계시고, 허리 총맞으신 곳은 후유증은 없고 총알 자국만 있으시네요.
아쉽게도 고엽제를 맞으셔서 고엽제후유의증(경도) 평생 약을 드시고 연고를 바르고 계시지만요.
물론 나라에서 약값은 무료로 지원해줍니다. 작은 돈이지만 20만원이라는 연금도 나오구요.
 
저희 아버님 같은 분들이 있었기에 우리가 지금 있다고 생각 합니다.
그래서 시간되는 대로 틈틈히 써볼려구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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