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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키피오는 구국의 영웅이었는가?
게시물ID : history_18634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토츠카
추천 : 4
조회수 : 1013회
댓글수 : 4개
등록시간 : 2014/11/06 22:12:11

국내에서도 유명한 F.하이켈하임의 개론서 『로마사(A History of the Roman People』에는 2차 포에니 전쟁의 승패를 가른 요인에 대한 다음과 같은 분석이 나온다.

 

 

혹시 한니발이 자마 전투를 승리로 이끌었더라도 카르타고는 전쟁에서 패했을 것이다. 한니발이 이탈리아에서 비록 트라시메네와 칸나이에서 승리했을지라도 로마의 동맹을 깨뜨리지 못함으로써 전쟁의 승패가 일찌감치 결정되었었기 때문이다.로마의 동맹을 깨뜨리는 것이 한니발의 전쟁 전략 가운데 최우선적인 목표이자 그가 성취하려고 했던 궁극적인 승리였던 것이다. 로마에게 승리를 안겨준 일등 공신은 자마 전투의 승자인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가 아니라 지연자 파비우스 막시무스였다. 그가 즐겨 사용한 지연과 고갈 전술이 한니발의 구도를 무력화시키고 로마의 막대한 전쟁 동원력이 가동될 시간을 벌어 주었던 것이다. 그는 지연함으로써 국가를 구했다.(cunctando restituit rem).

-김덕수 역(1999)  p221-222

 

 

나는 누가 로마 승리의 가장 큰 공훈자인가 하는 문제를 따질 의향은 없다. 다만 전쟁의 승패가 일찌감치 결정되었다는 말은 과장하는 감이 있기는 하지만 굉장히 예리한 지적이라고 생각한다. 확고부동한 진실이라서 그런 것이 아니라, 생각할 만한 문제를 잔뜩 일깨워주기 때문이다.

 

전쟁 후반기 스키피오의 '기여'는 사실 한마디로 평가하기가 쉽지 않다. 그 근본적인 원인은 그가 본격적으로 일군을 지휘하기 시작한 시기가 상당히 늦었다는데 있다. 스키피오의 공적은 분명 대단한 것이다. 그런데 그렇다고 해서, 로마가 백척간두의 위기에 있었는데 스키피오가 스페인과 아프리카를 홀로 쓸어버린 뒤 나라를 구했다는 식으로 이해하는 것은 거의 의미가 없다. 굳이 의미를 찾자면, 그렇게 생각하면 영웅담으로는 재미있다는 정도일 것이다.

 

'시기가 늦었다'는 것은 무슨 말인가? 스키피오의 스페인 출정은 기원전 210년이다. 아마 그 해 중에서도 가을 무렵이었을 것이다. 리비우스의 연대기상에서는 비록 기원전 211년이지만, 이는 필시 오류다. 그리하여 전설적인 카르타고 노바 기습 함락 작전은 기원전 209년 초에 발생하게 된다. 이탈리아 내에서 한니발의 세력은 기원전 211년의 카푸아 함락을 고비로 악화일로에 있어, 기원전 210년에는 아풀리아의 점령지를 포기했고, 스키피오가 스페인에서 본격적인 작전에 들어간 뒤 얼마 지나지 않았을 때 즈음에는 칼라브리아에서도 밀려나게 된다. 한편 시칠리아에서 카르타고 편에 섰던 시라쿠사는 기원전 212년 중에 대부분 점령되었고 그 해 말, 혹은 그 다음해 초에는 끝까지 농성하던 요새도 함락되었으며, 그 섬에 나가 있던 카르타고 야전군은 기원전 211년과 210년에 걸쳐 소탕되었다. 말하자면 스키피오가 스페인으로 간 시점은 이미 이탈리아 반도에서 한니발의 퇴조가 두드러지고, 시칠리아는 평정된 다음인 것이다.

 

한편 스페인의 로마군은 기원전 211년(혹은 그 전해)에 대파되었다. 그러나 스키피오 부임 당시에는 이미 상황이 그때처럼 위급했다고 보기 어렵다. 패주했다가 재집결한 병사들이 자체적으로 에브로강을 방어하는데 성공했고, 기원전 211년 여름이나 가을쯤에 네로가 증원군을 데리고 와서 야전군을 재건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시간선은 스키피오의 활약상에 대한 평가에 어떤 영향을 미칠수 있는가? 우선, 망할 위기에 있던 로마를 스키피오가 구했다는 식의 해석은 너무 무리하다. 말이란 사람이 하기 나름으로, '망할 위기'라는 것을 상당히 다른 맥락에서 받아들이겠다고 누군가가 선언한다면 나는 말릴 방법도, 참견할 의사도 없다. 그런 재정의에 무슨 의미가 있는지 모르겠지만 말이다. 여기서는 그저 문자적인 이야기만 할 것이다. 한니발이 기원전 211년에 로마로 행군한 적은 있다. 그러나 이는 그 이하의 땅을 모두 점령한 뒤에 위풍당당하게 진격해 온 것이 아니라, 카푸아가 단단히 조여진 상황 하에서 급히 온 것이었다. 로마인들에게 충격을 주어 카푸아 포위를 풀게 하기 위한 진격이었다고 보아야 확실할 것이다. 이 사건 때문에 당시에 로마가 본질적으로 위기에 처했었다고 보기 힘들며, 그 1년이나 2년 뒤 한니발이 더욱 퇴조했을 때는 더욱 그러하다.

 

다음으로, 이 전쟁에서 로마의 승리 구도를 일종의 커다란 '망치와 모루'로 바라볼 수 있는가 하는 문제가 생긴다. 즉, 이탈리아에서 한니발을 '붙들고' 있는 동안 스키피오가 스페인과 아프리카를 공략하여 승리했다고 보는 것이다. 이런 아이디어를 근본적인 데서부터 완전히 거부할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전쟁 후기 이탈리아 반도의 전선이 과연 진정 '모루'였는가? 기원전 212년 이래 이탈리아 반도에서 로마의 전략은, 굳이 이분법적으로 평가하자면 줄곧 공격적이었다. 그 결과 한니발의 세력이 계속해서 축소된 것이다.

 

 

또한 스키피오가 기원전 205년에 아프리카 공격을 주장했을 때의 상황도 미묘하게 만든다. 그 당시에 아프리카 공격이 과연 필수적이었는가? 이 문제는 전쟁 말기의 판세를 어떻게 바라보는가 하는 것과 관계가 깊을 것이다. 간과해서는 안된다고 생각하는 점은 기원전 205년 즈음이 되면 카르타고측이 전장에서 새로운 활력을 거의 보여주지 못한다는 것으로,(마고의 리구리아 주둔을 얼마 안되는 예외로 보아야 할 것 같다.) 이는 그 이전에 수해에 걸쳐 쌓여온 후퇴때문으로 보아야 적절할 것이다. 그들은 시칠리아에서 실패하며 대군을 잃어버렸고, 스페인의 영토는 모두 빼앗겼다. 기원전 208년과 207년에는 잇달아 해전에서 패배했다. 또한 하스드루발 바르카의 도박적인 이탈리아 진군도 파멸로 끝이 나고 말았다. 그렇더라도 어쨌건 한니발이 이탈리아에 있으니 절망적인 상황은 아니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나 한니발은 이미 기원전 207년에 "이탈리아의 장화 발부리"인 브루티움으로 철수했고, 루카니아에 남았던 일부 저항 세력은 다음해에 로마에 항복했다. 기원전 203년에 최종적으로 이탈리아를 떠났을 때, 마지막까지 한니발이 통제하던 지역은 이보다도 훨씬 축소된 것으로 보인다. 아마 크로톤과 페텔리아(+스콜라키움?)정도로, 브루티움에서도 동부 해안 지대 일부였을 것이다.

 

즉, 카르타고는 이미 사실상 패배 수순에 들어가 있었다고 여겨진다. 아울러 이탈리아 내에서 한니발이 여전히 강성하여 공격하기 까다로운 상황이었다고는 전혀 볼 수 없다. 특히 후자는 단순한 사변적인 추론이 아니라, 실제로 일어난 사실을 통해 충분히 입증된다. 스키피오가 아프리카에 건너가 있는 동안 다른 지휘관들도 브루티움을 잠식해 들어갈 수 있었던 것이다. 기실 전략적으로 한니발은 이미 완전히 조여진 상황이었고, 로마군이 때리면 얻어맞을 수 밖에 없는 위치였다. 나는 한니발의 힘이라는 것을 좀 현실적으로 취급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한니발이니까' 아무리 적은 군대, 좁은 점령지, 부실한 보급만 갖추어도 무슨 일이건 언제나 이루어 낼수 있었으리라고 보는 것은, 좀 심하게 말하자면 허황된 판타지일 뿐이다. 정말로 그랬다면 기원전 211년 이래 어째서 이탈리아의 전황을 뒤집지 못했는가? 아무튼 이로 인해, 기원전 204년부터 시작된 아프리카 원정은 "정면 공격이 불리하기 때문에 택한 우회 접근"이기가 사실상 불가능하며, "상대 주력을 묶어놓은 뒤 빈집 털이"도 아마 아닐 것이다. 당시에는 한니발군이 과연 카르타고의 주력인지 평가하기도 애매하며, 카르타고 본국은 빈집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혹시 이렇게 생각할 수도 있다. 이미 패배한거나 다름없는 한니발을 굳이 상대하지 않고 바로 아프리카를 공격했기 때문에 전쟁이 더 일찍 끝날 수 있지 않았겠는가 하고 말이다. 그런데, 스키피오가 아프리카로 건너간 후에도 사실 전쟁은 3년간 더 진행되었다. 초전에서 스키피오는 상당한 병력 열세에 있었던 것 같은데, 이는 기본적으로 집정관군 하나만 건너간데다 누미디아의 시팍스가 카르타고편에 섰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또한 기원전 203년에 거의 체결된 것 같았던 화의가 무효화되고 전쟁이 1년 더간 이유는 한니발이 이탈리아에서 돌아왔기 때문이다. 

 

한니발을 "wipe out"해 버린 뒤에 두개의 집정관군이 아프리카로 건너갔더라면 이런 상황이 발생했을까? 그렇게 되었더라면, 우선 돌아올 한니발의 군대가 없어진다. 적군의 규모를 보고 카르타고인들이 느낄 압박감이 심해지는 것은 물론, 한니발이 쓰러짐으로 인해 항전 의지가 일찌감치 꺾였을지도 모른다. 아울러 누미디아의 시팍스도 생각을 달리했을 수도 있다. 물론 뒤의 두가지는 그저 전망일 따름이다. 하지만 과연 그런 전망이 비현실적이라고 판단할 수 있을까? 실제 역사에서 로마군은 기원전 203년까지도 한니발을 완전히 몰아내지 못했다. 그러나 기원전 205년에 시칠리아에 부임하지 않았더라면, 스키피오는 필시 브루티움에서 한니발을 공격하는 작전을 지휘하게 되었을 것이다.(이 경우, 브루티움의 야전군은 3개로 늘어났을지도 모르겠다.) 로마군이 한니발을 몰아낼 수 있는 가장 빠른 시간이 기원전 202년이었다고 간주할 아무런 이유가 없으며, 따라서 나는 스키피오가 아프리카를 공격함으로써 전쟁을 '더 빨리' 끝낸것인지 여부도 몹시 말하기 곤란하다고 생각한다. 기본적으로 너무 변수가 많은데다, 아프리카 원정 자체가 그렇게까지 압도적으로 빠른 결착을 이끌어내지는 않았던 것이다.

 

 

 

이상의 이유로, 나로서는 한니발의 힘뿐 아니라 스키피오의 전쟁중 활약도 좀 현실적으로 바라보아야 할 것 같다. 현실화한다는 것은, 그저 깎아버리는 것과는 다르다. 예를 들어, 스키피오의 스페인 전선 성공을 전쟁의 전체적인 맥락 속에서 평가하려면 스페인으로부터의 병력 자원 공급이 카르타고쪽에 어느 정도로 중요했는지 잘 따져보아야 하며, 하스드루발과 마고를 놓친 것도 단순한 옥의 티 정도로 무시하려 해서는 안될 것이다. 두말할 필요없이 스키피오는 전쟁 후기 로마쪽에서 가장 유능한 장군으로, 그의 존재로 인해 성취될 수 있었던 성과도 많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스키피오의 계획과 활동을 무엇이건 혜안이자 최선이며 로마를 수렁에서 건져낸 업적이었다고 할 수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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