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전국시대
종래의 전투를 일변시킨 무기가 있다,
활보다 훨씬 살상능력이 뛰어난 그것은 종래의 창과 활의 단병접전의 전투에서
근대로 이어지는 라인전투로써 전장의 성향을 바꾸면서
동양의 한 국가의 전장터를 일변시키는 막대한 혁명을 이룩하게된다
어떻게 많은 철포를 모으고, 효과적으로 사용하는가
천하인이 되고자 하는 다이묘들의 성공 열쇠가 바로 그곳에 있었다.
1543년 큐슈의 타네가시마(種子島)에 외국선이 표착한다
.
이때, 배에 타고 있던 포르투갈인이 일본에 처음으로 철포를 가져왔다고 한다. 철판도 꿰뚫어 버리는 철포의 위력에 사람들은 놀란다
곧장, 일본 각지의 사람들이 이 신병기를 만들기 위해 돌입한다.
그런 와중에 오우미에서도 철포의 생산이 시작된다. 훗날, 일본제일의 철포 생산지가 되는 쿠니토모(国友) 마을이다.
시가현 나가하마시의 쿠니토모마치. 옛부터 이 지역은 무기나 농기구를 만드는 대장장이들이 많이 살고 있었다.
현재 마을에 방문하면 곳곳에 장인들의 기념비가 세워져 있다. 전성기에는 대장장이가 73채(軒)에 500명이나 있었다고 한다.
이 마을에서 철포의 생산을 성공했던 해는 전래로부터 불과 1년 뒤인 1544년 이라고 한다.
쿠니토모 마을의 철포 역사에 관해서는, 에도시대 초기에 정리된 쿠니토모 철포기(国友鉄炮記)에 적혀져 있다.
여기에는 마을에서 철포가 만들어지기까지의 과정이 다음과 같이 적혀져 있다.
어느날, 쿠니토모 마을에 교토의 쇼군 아시카가 요시하루(足利義晴)로부터 철포가 보내지고,
이것과 똑같은 것을 만들라는 명이 내려진다. 마을사람들은 곧장 철포를 분해해보는데, 총신과 방아쇠등 대부분의 부품은 어떻게든
만들 수 있었지만, 그중에 어떻게 만들어야 하는지 도저히 알 수 없는 부품이 하나 있었다.
그것이 바로 총신의 뒤에 있었던 나사였다.철포는 나사로 총신의 뒤를 제대로 막아주지 않으면, 발사 시에 화약의 폭발로 인해 뒤가 밀려 나게 되면서, 상당히 위험해진다.
그럼 뒤를 완전히 막아버리면 되지 않으냐? 하지만 그렇게 할 수는 없다.
철포는 사용할마다 총신에 그을음이 생겨 점점 쌓이게 되는데, 이를 정기적으로 제거해주지 않으면 안되기 때문이다.
때문에 분리가 가능하면서도, 발사시의 충격으로는 분리가 되지 않는 나사가 철포에 반드시 필요했던 것.
하지만 당시 일본에는 나사라는 것이 없었는데,
그래서 마을 사람들은 생전 처음 본 나사를 만드는 요령을 몰랐던 것이다.
그중에서도 특히, 당시 마을사람들은 총신 안쪽에, 홈을 파는 암나사의 제작 방법을 전혀 알 수 없었다.
그런 때에 '지로스케' 라는 남자가 생각치도 못한 곳에서 암나사 제작방법의 힌트를 얻는다. 그것은 바로 무(大根).
어느날 무를 깎으려고 했던 지로스케. 하지만 가지고 있었던 것은 날이 다 나가버린 칼이었다.
어쩔수 없이 그걸로 무를 도려내려고 하다가, 무의 안쪽에 암나사와 같이 홈이 생긴 것을 발견하고 이를 힌트로 개량을 거듭해서
총신의 안쪽을 홈을 만들어 나사를 만들었다. 라고 전해진다.
~ 쿠니토모 철포기(国友鉄炮記) ~
이렇게 해서 쿠니토모 마을에서 철포의 생산이 시작된다.
이렇게 국산화에 성공한 쿠니토모 마을의 철포에 관심을 가진 것이 오다 노부나가 .
1573년, 노부나가는 쿠니토모를 지배하고 있었던 오우미의 아자이 가문을 멸망시키고, 그 땅을 손에 넣는다.
그리고 철포의 대량생산을 주문한 것으로 추정된다.
그리고 2년 뒤인 1575년 나가시노 전투.
당시 최강이라고 불렸던 다케다의 기마군을 상대로 철포로 대승리를 거둔다.
오사카 전투에 사용되었다는 철포.
구경은 4cm, 통상의 4배 크기. 살상력은 60배 이상. 두께 20 ~ 50cm의 목판도 파괴할 수 있고, 파괴력을 지닌 사정거리는 300m.
이에야스는 이러한 철포를 이용해서 도요토미 측의 전의를 상실케 했다고 전해진다.
겉은 평범한 일본도처럼 보이는데, 사실 철포인 와키자시 철포(脇差鉄砲).
빗자루 같이 생긴 20연제발총(二十連斉発銃)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