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우용의 서울탐史] 일본 관동군 사주로 실린 <조선일보> 기사가 촉발한 1931년 ‘반화교 폭동’
‘뒤틀린 민족의식’ 식민지배 활용한 일제, 이에 동조한 김동인·<조선일보>
내가 고등학교에 다닐 때 국어 교과서에는 김동인의 단편 ‘붉은 산’이 수록돼 있었다. 소설의 주인공 정익호는 ‘삵’이라는 고약한 별명으로 불릴 만큼 동포들을 상대로 망나니짓을 일삼던 자였으나, 막상 동포가 중국인 지주에게 박해당해 목숨을 잃자 단신으로 그 지주를 찾아갔다가 만신창이가 되어 동포들에게 되돌아온다. 그는 죽어가며 “보고 싶어요. 붉은 산이, 그리고 흰옷이”라고 중얼거린다. 그의 죽음을 조상하며 동포들이 함께 부른 노래는 “동해물과 백두산이 마르고 닳도록…”으로 시작하는 ‘창가’였다.
‘만만한’ 중국인에게 박해를 받다니
당시 국어 선생님은 이 소설을 ‘민족의식을 자연주의 경향에 담아낸 작품’이라 가르쳤고, 참고서에도 그렇게 나와 있었다. 그러니 그렇게 외는 수밖에. 그런데 좀 이상하다. 아니 많이 이상하다. 시간적 배경은 일제강점기인데, 민족적 저항의식이 분출되는 대상이 왜 ‘왜놈’이 아니고 ‘되놈’인가? 일제강점기에 되놈에게 박해받은 사람이 왜놈에게 당한 사람보다 많았던가? 소설이 ‘동해물과 백두산이 마르고 닳도록’이라는 노래로 끝나 아주 비장한 느낌을 주지만, 당시 이 노래는 그냥 ‘불온 창가’였다.
더구나 소설이 발표된 때는 1933년 4월, 만주사변이 일어난 지 1년6개월 뒤다. 만주사변을 도발한 일본군은 일본·조선·만주·몽골·한족의 다섯 민족이 사이좋게 지내자는 ‘오족협화’(五族協和)를 내걸고 괴뢰 만주국을 세웠다. 만주국 치하의 만주에서 일본의 ‘2등 국민’ 조선인이 공공연히 박해받을 이유는 없었다. 김동인은 왜 이 시점에 이런 소설을 썼을까? 일제 검열 당국은 왜 이 소설에 삽입된 <애국가>를 도려내지 않았을까?
현재에도 만주의 벼농사 지대는 조선족의 거주 지역과 대략 일치한다. 조선인도 일본인도 ‘쌀의 민족’이다. 만주로 이주한 조선인들은 살기 위해, 팔기 위해, 벼농사에는 적절하지 않은 기후조건을 ‘오기’를 부리다시피 하며 극복했다. 물을 많이 쓰는 벼농사를 위해서는 관개수로가 관건이었다. 1931년 초여름, 만주 지린성 창춘현 완바오산(만보산) 일대에서 중국인에게 미간지를 빌린 조선인 농민들은 이 땅을 논으로 바꾸려고 관개수로 공사를 시작했다. 본래 물이 부족한 만주 땅에서 물을 다른 곳으로 끌어대는 걸 보고만 있을 농사꾼은 없다. 중국 농민들이 들고일어났으나 조선인 농민들은 일본 영사관 경찰의 비호를 받으며 버텼다. 7월2일, 중국 농민들과 조선인 농민들 사이에 대규모 충돌이 일어났지만 양쪽 모두 별다른 희생 없이 일단 마무리됐다.
그런데 그날 밤과 이튿날 아침, <조선일보>는 호외를 발행해 완바오산 주변의 조선 농민 200여 명이 중국 관민 800여 명에게 공격당했고, 이에 일본 경찰대뿐 아니라 창춘에 주둔하던 일본군까지 출동 준비를 하고 있다고 대대적으로 보도했다. 조선인들 사이에서 이 과장 보도의 배후에 일본군이 있을 것이라는 ‘합리적 의심’이 고개를 든 것은 그 얼마 뒤였다. 실제로 <조선일보> 창춘 지국장 김이삼은 일본 관동군의 사주를 받고 이 기사를 송고했다. 그러나 사실 여부와 관계없이 이 호외는 당장 조선인들의 동포애에 불을 질렀다. 이미 6월 초부터 완바오산 일대의 조선인 농민들이 중국인들에게 박해받고 있다는 소식은 조선 내 신문들에 간간이 실리던 바였다. 조선인들은, 일본인들에게 설움을 받다 남의 땅으로 건너간 동포들이, 그곳에서마저 ‘만만한’ 중국인들에게 박해받는다는 사실을 참고 견디지 못했다. 아니 참으려 하지 않았다. 그들은 1923년 도쿄 대지진 때 학살당한 동포들을 떠올렸고, 그 원수를 자기 이웃에 사는 중국인들에게 갚으려 들었다.
1931년 7월4일치 <조선일보>는 ‘완바오산(만보산) 사건’에 대해 “중국 관민 800여 명과 200동포 충돌 부상. 주재중 경관대 교전 급보로 장춘 일본 주둔군 출동 준비. 삼성보에 풍운 점급” “대치한 일중 관헌 1시간여 교전. 중국 기마대 600명 출동. 급박한 동포 안위” “철퇴 요구 거절. 기관총대 증파. 전투 준비 중” 등 당장이라도 전투가 일어날 것처럼 묘사했다. 누가 ‘우리 편’이고 누가 ‘적’인지는 명확했다. 많은 조선인들이 이를 조선 안의 ‘적’을 소탕하라는 메시지로 받아들였고, 그에 따라 행동했다. 전우용 제공
힘을 갖게 해주는 신비한 묘약 ‘일본’
<조선일보> 호외가 발행된 그날부터 조선인들은 전국 도처에서 중국인 가옥과 점포를 습격하고 눈에 띄는 중국인이 있으면 다짜고짜 폭행하거나 살해했다. 서울에서는 소공동·명동·서소문동 일대의 중국인 소유 건물들이 연이어 불길에 휩싸였다. 며칠간 광란의 축제처럼 진행된 반화교 폭동으로 재조선 중국인 100여 명이 목숨을 잃었다. 인구 비례로 따지면 간토대지진 때 학살당한 재일 조선인 수에 뒤지지 않는다. 하나 마나 한 이야기지만, 이 폭동에 가담한 조선인들의 마음속에는 동포애 말고 사감(私感)과 사욕(私慾)의 불길도 활활 타오르고 있었다. 조선인들은 중국인들의 집과 상점이 불타는 모습을 보며 처음으로 집단적 ‘가해자’가 되는 경험을 했고, 자신들이 결코 최하위의 ‘약소민족’이 아니라는 것을 실감했다.
일본 경찰은 간토대지진 때 일본인 ‘난동자’들을 대했던 것처럼 조선인 ‘난동자’들을 대했다. 역시 하나 마나 한 이야기지만, 일본인을 상대로 한 폭동이었다면 단 한 명의 일본인 희생자도 없이 수백∼수천 명의 조선인 희생자만 나왔을 것이다. 일본 제국주의자들이 필요로 했던 것은 중국인들의 생명이나 조선인들의 ‘냉정한 이성’이 아니었다. 그들의 관심은 오로지 조선인들의 ‘뒤틀린 민족의식’이 발산하는 공격적 에너지를 활용하는 데만 쏠려 있었다. 그들은 조선인들에게 명확한 메시지를 전달하려 했다. 조선인들에게 일본은 압제자가 아니다. 오히려 조선인들에게 일본은 ‘실력’ 이상의 힘을 갖게 해주는 신비한 묘약이다. 일본의 지원을 얻는다면 조선인도 아시아에서 ‘행세하는’ 민족이 될 수 있을 것이다. 협조하라, 충성하라, 감복하라. 두 달 뒤 일본군은 만주로 쳐들어갔고, 재만주 조선인들은 중국인의 압제에서 ‘해방’됐다.
김동인은 ‘붉은 산’에서 ‘이미’ 일본군에 의해 ‘해방된’ 조선인이 아니라 ‘아직’ 중국인에게 ‘박해받는’ 조선인을 묘사했다. 그는 중국인에게 박해받던 ‘과거의 재만주 조선인’에 대한 기억을 감동적 필치로 소환함으로써, ‘현재의 재만주 조선인’들이 일본인에 의해 ‘해방된’ 존재임을 새삼 깨우치려 했던 듯하다. 일제 당국은 해방시켜준 은공도 모르고 중국인 비적(匪賊)들과 어울려 ‘반만항일’(反滿抗日) 전선에 나선 일부 조선인들을 이 소설이 각성시켜주기 바랐을 것이다. 그렇게만 된다면 소설에 ‘불온 창가’ 한 소절쯤 들어가는 거야 눈감아줘도 될 일이었다.
얄궂은 역사의 삽화
지금 김동인을 기념하는 ‘동인문학상’은 조선일보사가 시상한다. 1931년 반화교 폭동의 원인과 결과에 각각 새겨진 둘의 발자취가 이렇게 어우러지는 걸 보면, 역사가 무심코 그려내는 삽화들은 종종 너무 얄궂다는 생각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