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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 트릭스터
게시물ID : gametalk_185728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유의
추천 : 11
조회수 : 941회
댓글수 : 21개
등록시간 : 2014/06/12 13:33:11

캡처_2014_06_12_12_58_51_108.png


뭐라도 쓰지 않으면 계속 이런 기분일 것 같아서, 짧게라도 너한테 ㅡ 게임한테 편지를 보내다니 ㅡ 이렇게 말을 건네본다.

이제와서 무슨 소리냐고 할지도 모르겠다. 2014년 1월 28일. 네 서비스 종료일. 벌써 5개월이나 지났구나. 그동안 검색창에 네 이름 한 번 쳐보지도 않았으니, 지금에서야 알게 된 것도 무리는 아니지. 우연히 지인과 게임에 대해 대화를 나누다가 네 얘기가 나왔다. 오랜만에 옛날 생각이 나서, 플레이는 안해도 BGM이나 찾아 들어볼까 하고 홈페이지에 갔는데 저런 게 떠있었다. 순간적으로 멍해졌다. 그리고 내가 얼마나 바보 같았는지 깨달았다. 나는 왜 네가 앞으로 몇 년이 흐르고 몇십 년이 흘러도 그 자리에 그대로 있을 거라 굳게 믿었던 걸까. 정작 나조차 그동안 너를 떠나 있었으면서.

사실 나는 작년에 네 홈페이지에 들어가서 BGM을 전부 다운받았었어. 그런데 한 달인가 전쯤에, 그러니까 네가 사라지고도 몇 달이나 더 지난 그 때에, 용량이 부족해서 정리를 하다가 그것도 다 지워버리고 말았지. 그 때 내가 했던 생각은, '뭐 다음에 또 들어가서 받으면 되겠지' 였어. 그리고 오늘 BGM을 받으러 들어간 내가 이제 다시는 너를 볼 수 없다는 걸 알게 된거고. 알고 있었어. 점점 사람들도 적어지고 있고, 내가 마지막으로 플레이 했던 작년하반기 때부터는 업데이트 소식조차 올라오지 않았다는 걸, 근데도 나는 철썩같이 믿고 있었어. 너는 언제나 내 곁에 있을 거라고, 그래서 내가 떠났다 돌아와도 언제나 그 자리에 있을거라고….

그것도 무리는 아니지. 나는 네가 베타 시절일 때부터 기억하고 있으니까. 그 때는 웁스부두에 레벨 10짜리 블루펭귄들이 몹으로 나왔을 때였어. 너는 그 베타 시절을 거쳐, 넷마블의 AD 시절로, 그리고 게임트리의 R로 넘어갔다. 정확한 날짜가 기억나지 않아서 찾아보니, 2003년부터 서비스 했다고 하니까 거의 10년 넘도록 함께 달려왔구나. 넌 그렇게 계속 그 자리에서 내가 올 때마다 웃으며 반겨주었지만, 정작 나는 그렇게도 많이 떠나갔었어. 그런데도 매번 일정한 주기를 두고 계속 생각나서 찾아왔었지. 마치, 더 넓은 세상을 보기 위해 뛰쳐나간 어린아이가, 세상사에 지치고 상처입어 터벅터벅 걸어 돌아올 때마다 품어주는 고향처럼. 그리고 그 아이가 다시 기운을 찾고 세상으로 뛰어들기 위해 나아가면 망설임없이 보내주고 응원해주는 그런 고향으로.

넌 내 게임 인생에서 영원한 고향이었다. 난 한 번도 널 잊은 적이 없었어. 지금 와 돌이켜 생각해보니 내 게임 인생의 많은 것들이 너로부터 비롯되었음을 알겠다. 내가 난생 처음 쓴 팬픽도 생각해보니 너에 대한 거였어. 내가 제일 처음으로 만든 길드도 너에서였어. 게임 인생을 통틀어서 게임 지인들과 가장 재미있게 놀았던 추억이 존재하는 게 바로 너였고, 내가 가장 레벨을 많이 올린 게임도 너였고, 지금 내 그림체에 대한 취향도 생각해보니 너한테서 비롯된 거였더라. 또 난 어렸을 때부터 보석 이름을 많이 아는 편이었는데, 그게 네 속에서 드릴질하며 파낸 보석들 덕분이었던 거 아니? 나한테 상상과 탐험이란 즐거움을 제일 처음 주었던 것도 너였고 가상 공간에서 사람들과 어울리는 즐거움을 주었던 것도 너였어. 넌 이렇게도 많은 걸 나한테 주었어. 그거 알아? 2003년은 내가 초등학교 1학년이었을 때다. 그리고 2014년 지금 나는 고등학교 3학년이야. 초등학교 1학년에서부터 고등학교 3학년, 내 학창시절 전부에, 네가 있었던 거야.

나는 요새 그런 생각을 많이 한다. 이제 조금만 지나면 나도 어른이고, 그게 두렵다고 느끼고 있어. 물론 어른들이 보기에 나는 아직도 어리겠지만, 그런데도 돌아보면 나는 벌써 이렇게 많이 자라나버렸다, 라는 생각이 드는거야…. 여태까지 내가 살던 세상에서 벗어나야 된다는 두려움이 마구 드는거야…. 그런데 네 홈페이지에 들어가서, 저 위에 있는 화면을 딱 보는 순간, 알았어. 아, 말로만이 아니라, 정말로 나는 정말로 자랐다. 그렇게 많은 시간이 지나고 그렇게 많은 추억들을 남기고 나는 자라나 버렸다. 너는 내 학창시절 전부에 있었다고 내가 아까 전에 말했지, 네 속에 담겨있는 그 추억들은 아직 어린 시절의 나야. 아직 자라지 않았던 나야… 그리고 네가 나를 떠나감으로써 나는 확실히 깨달았어. 이제 나는 자랐다. 어린 시절의 나는 죽었다. 가버렸다. 더 이상은 없다. 너와 함께, 사라졌다. 이제는 추억 속에서나 존재할 것이다. 인생이든 게임이든 언제나 시작과 끝이 있을 것이고 너는 내 소중한 학창시절의 처음과 끝이다. 그것이 불가피한 것이고 자연스러운 것이고 받아들여 마땅한 것임을 알겠다. 

그래서 내가 해줄 수 있는 말은 그저 고맙다는 말 뿐이다. 고마워. 너무 고마워, 눈물이 날 정도로 고마워. 나한테 그 많은 추억들을 줘서 고마워. 나한테 그 많은 하나하나가 다 매력적인 캐릭터들, 이야기들, 너의 세계를 경험할 수 있게 해줘서 고맙고, 내가 지쳐 돌아올 때마다 말없이 받아들여주고 변함없이 거기에 있어줘서 고맙고(아마 그 점 때문에 네가 서비스 종료를 한 것일수도 있지만), 네 세계 속에서 그 많은 사람들과 즐거운 이야기들 나눌 수 있게 해줘서 고맙고, 그렇게 오래 있어줘서 고맙고, 마지막 너를 떠나보내면서 나의 성장을, 나도 이제 어린 시절을 떠나보내도 좋다는 걸 알게 해줘서 고맙다. 나의 게임 인생에는 너한테서 받은 영향이 아주 곳곳에 있다. 마치 서구권 국가에서의 로마와도 같은 존재라고나 할까. 언제 돌아봐도 그립고 가고 싶고 찬란한… 막상 거기 갔을 때는 그렇지도 않았던거 같은데 말이야….

벌써 몇 달 전에 모두에게 인사하고 너머로 사라져 버린 너. 그렇지만 나는 오늘에서야 너에게 작별한다. 잘 가, 내 친구, 내 고향, 내 추억. 단순한 게임이라 할지라도 넌 내게 추억 그 자체다. 추억 속에서 모든 게 미화되기 때문일 수도 있지만, 그렇더라도 앞으로 너와 같은 존재를 다신 만날 수 없다는 걸 안다. 이미 지나간 학창시절을 한 번 더 경험할 수는 없는 거잖아. 그저 추억이란 액자 속에서 웃음 지으며 오래오래 들여다 볼 뿐….

그러니까 이제 안녕, 잘가.

안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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