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런 사람이 있다.
주변 사람들을 흡수하는 포용력.
적당한 상식과 적절한 어휘 구사력.
상대방을 섬세하게 챙기는 배려.
무엇이든 척척 잘 할 것 같은 능력.
낭중지추라 불릴 만큼은 아니더라도
어디에 내 놓아도 꿀리지는 않을듯한 사람.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은 공평한듯 하다.
좋아하는 사람 앞에서 한 없이 작아지고
나의 단점들만 생각나며 스스로 초라해지는
연애 자존감이 바닥을 치는 사람이 있다.
그런 사람은 자세히 들여다보면
연애 자존감뿐만 아니라 자존감 자체가 낮다.
포용력은 자신의 외로움을 채우기 위한 몸부림이며
그 사람의 언변은 자신의 부족함을 감추기 위함이며
섬세한 배려는 실은 을(乙)을 자처하는 낮은 자세이다.
무엇이든 왠만큼 하지만 그 깊이가 깊지 못하다.
나는 그런 사람을 아주 잘 알고 있다.
바로 내 자신이다.
내가 가진 장점보다 단점을 들키는 게 더 두려운 사람이다.
좋아하는 사람 앞에서 늘 내 자신은 초라하기 그지없다.
조언도 많이 듣고 연애심리학 책도 많이 읽지만
결국 난 좋아하는 사람에게 신경만 쓰다 늘 끝이 난다.
다 합쳐도 1년이 안 되는 짧디 짧은 연애기간 동안
내가 겪은 모든 사랑은 반 쪽짜리 사랑이었다.
21살의 나는 내 친구들과 게임하는 것이 너무나 좋았고
나를 좋아해주던 사람에게 무심하여 헤어지고 말았다.
그 때의 나는 그저 연애를 한 번쯤 해보고 싶었던 것 같다.
24살의 나는 모든 것이 조심스러웠고 용기가 없었다.
그렇게 4년을 좋아하던 사람과 시작한 연애는
2달이 채 못 가서 가까워지지 못하고 끝나버렸다.
29살의 나는 다급한 마음이 앞서는 찌질한 사람이었다.
4년을 좋아하던 사람에게 용기내어 고백했지만
같은 마음이었던 시간은 이미 끝이 나있었고
처음으로 사랑에 대한 통증을 깊게 느꼈던 것 같다.
그리고 32살의 나는 남들보다 못한 삶을 살고 있다.
내가 좋아하는 사람은 결혼까지 생각한 사람과 트러블이 있고
아직까지 헤어지지 않은 그녀을 좋아하는 내 자신이
너무 비참하고 바보같고 쓰레기 같이 느껴진다.
동료들과 스타트업을 하면서 내가 갚아야 할 빚 1억 5천만원.
일하면서 생긴 사고로 평생을 안고 가야 할 발등의 통증과 지병
4년을 매일같이 쉬지않고 밤새며 하던 그 사업에서도 빠지려 한다.
이제 나는 빚만 남은 백수가 될 예정이다.
이런 상황에서 누군가를 좋아할 자격이 있는지는 모르겠다.
적지 않은 나이에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는 나는 연애도 결혼도 자신이 없다.
아니다. 사실 이런 상황이 되기 전에도 자신은 늘 없었다.
이런 나지만, 나는 오늘만 사랑할 것처럼 그녀가 너무 좋다.
그녀의 불확실한 남친과의 상황을 비집고 들어가고 싶지만
좋게 말하면 순애보, 나쁘게 말하면 병신같은 나는
멀리서 바라보기만 할 뿐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
그렇다. 나는 무지하게 비겁하고 찌질한 놈이다.
포기할 용기도, 도전할 용기도 아무것도 없는 그런 놈이다.
그저 며칠 뒤 연말 송년회에서 그녀를 볼 생각에 설레고
없는 돈에 예쁜 옷을 입는다고 옷도 사버렸다.
어쩌면 내년에 그녀를 다시 보게 될 때는
나는 하객, 그녀는 신부로 서로 마주하게 될지도 모르겠다.
그녀가 나에게 청첩장을 건낸다면 나는 어떤 표정일까.
진심으로 그녀의 행복한 삶을 위해 축하를 할 수 있을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를 바라보고 무언가를 주었던
그 짧은 시간은 30년 넘는 인생에서 가장 행복햇던 것 같다.
그 행복한 꿈을 되뇌이면서 이제 잠에 들려고 한다.
내일이면 또 다시 바쁜 시간 속에 그녀를 그리며 애태우겠지만
내 의지로 가능하다면 마치 영화의 한 장면처럼
행복한 추억에 갖혀 영영 깨지 않는 잠에 빠지고 싶다.
주변 사람들을 맴도는 어정쩡한 태도.
적당한 관계를 위해 쥐어짜내는 어휘력.
존중받는 법을 몰라 스스로 낮아지는 비굴함.
어느 것 하나 깊이 있게 할 수 없는 얕은 능력.
그리고 용기도 포기도 못 하는 짝사랑만 하는 낮은 연애 자존감.
그런 사람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