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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기장수설화의 주인공 우투리는 왜구수괴였는가?(루리웹펌)
게시물ID : history_18518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MICHALLE
추천 : 1
조회수 : 5478회
댓글수 : 1개
등록시간 : 2014/10/26 13:10:25
http://bbs2.ruliweb.daum.net/gaia/do/ruliweb/default/327/read?bbsId=G005&articleId=22955134&itemId=145


[BGM] 아기장수 우투리는 사실 왜구의 수괴인가? [34]

명장한니발 (tanitpene****)
작성글보기쪽지보내기마이피
출석일수 :623일 |  LV25
49%49%
추천 42 | 조회 9885 | 일시 2014.10.05 (14:48: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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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이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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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GM정보 : 브금저장소 - http://bgmstore.net/view/J3Lv4




직접쓴 글입니다.








'아기장수 우투리'설화는 중학교 1학년 국어교과서에 등장해서 많은분들이 한번쯤은 들어들봤을껍니다. 이 설화는 우리나라의 다양한 곳에서 구전되어 지역마다 약간씩 다른 형태를 띄고 있습니다.

일단 모르시거나 까먹으신 분들을 위해 '아기장수 우투리' 설화를 간단히 요약하겠습니다.









"나라가 파탄에 빠지고 민생이 혼란에 흽싸일떄, 가난하고 핍박받는 백성들은 영웅을 바라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어느 지리산 산골짜기에 살던 가난한 노부부사이에서 한 아이가 태어나게 됩니다. 이 아이는 태어날때부터 범상치않은 용모를 지녔는데, 아이가 태어날때 탯줄이 어느도구를 사용해도 안잘리다가 억세풀로 베어 자를수 있었으며, 겨드랑이가 붙은 작은 날개로 이리저리 날라다닐수 있었습니다. 노부부는 이 아기의 이름을 '우투리'라고 지었죠.

노부부는 아이가 생겼지만, 아이의 용모에 불안을 떨치지 못했습니다. 겨드랑이에 날개가 붙은 아이는 장차 '파탄난 나라를 뒤엎고 영웅이 될 상'이었는데, 이는 기득권층에게는 굉장히 불쾌한 것이었습니다. 임금이 군대를 보내 우투리를 죽일지 모른다는 생각에 노부부는 지리산 깊숙히 들어가서 은거하도록 합니다. 이에 우투리의 행방이 임금의 귀에까지 들어가게 되고, 임금(다른 설화에선 조선건국자 태조 이성계라고도 함)이 우투리를 죽이기 위해 군대를 파견하였습니다.

임금에 파견한 군대는 우투리의 행방을 뭍기위해 노부부를 찾아 고문했지만, 노부부마저 우투리가 어디갔는지 정확히 모르기에 일단은 사면될수 있었습니다. 우투리는 군사들이 물러나자, 집으로 돌아왔으며 고문당한 노부부를 위로하면서, 자신의 갑옷을 만들기 위해 콩 한말을 볶아 달라고 요구했습니다. 노부부는 콩을 볶는 도중 너무 배가 고픈 나머지 한알을 삼켜버렸고, 우투리는 볶은 콩으로 갑옷을 만드는 데, 하필이면 노부부가 먹은 한알때문에 왼쪽 겨드랑이를 가릴수 없었습니다.

우투리는 노부부에게 정부군이 몰려들어 전투중 자신이 죽게 되면, 바위 뒷산에 콩,쌀,팥 서되씩을 뭍고 3년동안 아무에게도 가르쳐주지 말라고 부탁했습니다. 우투리가 노부부에게 부탁한 사이, 정부군은 다시 우투리를 죽이기 위해 쳐들어왔습니다. 우투리는 용감히 맞서싸웠지만 노부부가 먹은 콩한알이 없어 가리지 못한 왼쪽 겨드랑이에 화살을 맞아 죽고맙니다.

우투리가 죽자, 노부부는 슬퍼하며 우투리의 마지막부탁대로 콩,팥,쌀을 서되씩 뭍어주었습니다. 한편, 우투리가 죽었지만 시간이 지나도 백성들은 우투리가 부활하여 나라를 뒤엎을거라는 소문이 확산되자 임금은 불안하여 다시한번 군대를 일으킵니다. 임금은 직접 군대를 이끌고 가서 우투리의 행방을 물었고, 가차없이 고문을 행하였습니다. 고문에 못이겨 노부부는 우투리의 행방을 실토했고, 우투리의 시신을 뭍은 바위를 찾아갔으나 아무일도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임금은 노부부가 우투리가 태어날때 억세풀로 탯줄을 잘랐다는것을 알고, 억세풀을 꺾어 바위를 내려치니 바위가 열리고 우투리와 콩,팥, 쌀이 대규모 군대가 되어가고 있었죠. 하지만 3년중 딱 하루를 못넘기고 바위가 열렸기에, 우투리와 콩,팥, 쌀로 만들어진 군대를 눈녹듯이 햇살에 사라지고 맙니다.

그리곤 우투리가 죽자, 지리산의 날개돋힌 천마가 구슬피 울었으며 이에 백성들은 우투리가 아직도 어딘가 있을거다 하고 설화는 끝납니다."








다른 버전의 우투리 설화에선 우투리를 죽일려고 하는 왕이 바로 '조선건국자 태조 이성계'라고 나오는데, 임금이 이성계라면, 우투리는 어떤 실제 역사속 인물을 모델로 했을까요? 여기에 대해서는 '아기장수 우투리' 이름자체가 힌트를 내포하고 있습니다.


이성계는 조선건국자이전, 고려의 장군이로써 한반도 남북을 통틀어 이리저리 활약한 맹장이었습니다. 고려 말기 한반도 남부에서의 왜구피해는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극심하였고, 국가의 존망을 가릴 문제였습니다.






이당시 왜구는 '훈도시입은 반나체 깡마른 병사'가 아닌 갑옷을 단단히 입고 화살을 아무리 맞아도 끄떡조차 않으며, 진을 짤줄아는 전문적인 군대였습니다. 학자들은 일본의 남북조 시대의 혼란을 틈타, 패퇴한 남조의 일본의 병력이 왜구가 되어 고려를 침략한걸로 추측하고 있습니다. 당시 고려는 이러한 왜구의 칩입에 임진왜란급의 국가존망이 걸친 사태를 겪고 있었으며 백성들은 왜구가 두려워 해안가에서 50리 떨어진 곳에 무조건 피난해 있었고, 고려군은 왜구만 봐도 줄행량을 칠만큼 헬오브 헬인 상황이었니 말입니다.



이는 1378년에 벌여진 해풍전투에서 알수있는데, 이때당시 왜구들은 고려의 수도에서 개경으로부터 얼마떨어지지않은 해풍으로 몰려들어 "개경을 치겠다고 선전포고"까지 한 상황이었습니다. 당시 명장이었던 최영이 이를 막기위해 군사들을 이끌고 출전했는데, 그조차 "이 전투가 고려의 사직존망을 가르게 될것이다" 라고 말할정도로 고려는 막장인 상황이었죠. 최영의 군대는 여기서 중과부적으로 패퇴위기에 몰리고, 당시 왕이었던 우왕은 최영이 패배할경우를 대비해 수도를 떠날 준비까지 다 마친상황이었습니다. 하지만 뒤에서 나타난 이성계의 군대가 왜구들을 덮치면서 가까스로 고려의 승리가 되었습니다.







1380년에 왜구들은 한반도 각지에서 활약하던 무리끼리 연합세력을 꾸려 일종의 '왜구 연합'을 이루게 됩니다. 이들은 전라도에 모여 수도까지 밀고 올라가겠다고 고려에 선전포고를 하였으며, 고려조정은 이성계및 9원수들을 보낼정도로 아에 왜구와 총결전을 준비하고자 했습니다. 당시 '왜구 연합군'의 규모는 고려사, 조선왕조실록에도 정확히 기록되지 않았지만, 대략 이성계의 휘하군대보다 10배이상은 많았다는게 추론입니다.

진포대첩당시 왜구의 선박은 총 500척 이상이었으며, 여기에 1992년 발굴되어 14세기말의 왜구선박으로 판명난 '진도 통나무 배 유물'을 보아 30~40명은 거뜬히 탈수있는 정도였기에, 15000명에서 20000명의 왜구가 이성계와 대적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또 이성계와 대적하기 이전 왜구 연합군은 고려의 두원수가 보낸 5천명에서 최대 1만명의 군대를 격파했었기에(전투상 비슷하거나 더 많은 숫자의 군대가 붙는게 당연함으로) 이에대한 설명을 더욱 뒷받침해줍니다.






전라도지역을 기점으로 북으로 올라올려는 왜구연합과 이를 막고자 하는 이성계군이 1380년, 황산에서 일대의 전투를 벌이게 됩니다. 이 전투는 역사에 길이 남을 전투이자 이성계를 '당시 고려의 영웅'으로 인정받게될 전투였습니다. 왜구 연합군은 상당수의 기병을 보유하고 있었으며, 일부 왜구 기병은 전신을 갑옷으로 무장하였기에 아무리 화살을 쏘거나 베어도 끄떡없는 '미친 존재감'을 보였습니다. 이들중 가장 유명한 인물은 바로 왜구기병이자 수장이었던 '아지발도(阿其拔都)'로서, 이름이 역사적 기록에 남을만큼 고려군에게 위협적인 존재였습니다.

그런데 이 '아지발도'라는 왜구장수는 위에서 설명한 '아기장수 우투리 설화'의 우투리와 상당히 유사한 점이 많습니다.






첫번째: 이름의 유사성

우투리의 이름은 '우두머리'를 뜻하는 말이 어원인걸로 보이며, 다른 설화에서도 이러한 경향은 흔하게 볼수있습니다. 그의 별명인 아기장수는 이상하게도 황산대첩당시 왜구수장이었던 '아지발도'와 상당히 유사한 어원을 보입니다.


我軍稱阿其拔都(아군칭아기발도)
우리 군사가 '아기발도'라 일컬었다. - 《조선왕조실록》 태조 1권 총서66


'아지발도'란 이름은 왜구수장의 이름이 아닌, 이성계 휘하의 고려군이 '미친 존재감을 과시하는 왜구수장'을 지멋대로 지어낸 별명입니다.

여기서 '아지'는 송아지, 망아지, 강아지 할때의 '아지'와 같은 말로서, '아기(어린애)'와 같은 말입니다. 당시 이성계와 그 휘하들은 아지발도가 상당히 어렸던 소년장수였다는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발도'는 몽골어 '바토르(용장, 장수)' 의 이두식 표현이며 당시 고려는 몽골의 간접지배를 받는 속국에서 막벗어난 시기였기에, 몽골의 문화와 말이 민중들에게도 쉽게 퍼진 상태였습니다.

즉 아기장수=아지발도로써, 아기장수 우투리는 이름상 왜구수장인 아지발도일 가능성이 높다는 겁니다.




두번째: 아지발도와 아기장수 우투리의 사망플래그의 유사성.


이름뿐만 아니라, 사망플래그도 둘은 상당히 유사합니다.

우투리는 노부부에게 콩을 볶아서 갑옷을 만들었지만 노부부가 콩한알을 몰래 집어먹었기에, 왼쪽 겨드랑이에 가릴수 없어 그곳에 화살을 맞고 죽습니다.

아지발도 역시, 이성계의 의형제인 이지란에게 투구꼭지를 화살에 맞고 투구가 벗겨지자 맨살이 드러나면서, 드러난부분을 이성계가 화살로 쏘아 죽고 맙니다.





세번째: 우투리와 일본갑옷의 약점의 동일성


우투리의 약점인 '겨드랑이' 또한 당시 일본의 갑옷의 약점과 상당히 유사한 부분을 보이고 있습니다. 당시 고려는 '포형'갑옷이라 해서 몸통과 팔부분 일체형으로 되어있기에 '겨드랑이 부분'을 치켜세워도 충분히 방어할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당시 일본 갑옷은 몸통갑옷과 팔방어구가 따로 분리되어있기에 '겨드랑이 부분'을 노출시킬경우 방비가 제대로 되지 못했죠.




당시 왜구들이 입었던 일본 갑옷, 겨드랑이를 노출시킬 경우 아무런 방비가 되지 않습니다.




당시 고려군 갑옷, 겨드랑이를 노출시켜도 갑옷과 일체형이기 때문에 방비가 됩니다.






4번째 죽은 지역 위치의 동일성.





지도를 보면 왜구연합군은 지리산 부근에서 북으로 출발햇음을 알수있습니다.

우투리는 지리산 부근에서 싸우다 죽었으며, 아지발도 역시 지리산을 방패삼아 남원지역으로 부터 북으로 올라가려는 도중 패배하여 죽었습니다.









아지발도는 왜 '아기장수 우투리'가 되었나?



여기에 대해서는 여러 의견이 엇갈리고 있는데 이는 다음과 같습니다.


첫번째: 이성계에 의해 멸망한 고려 잔당들이 '조선을 무너뜨리고 고려의 부흥을 위해 왜구와 연합'하여 그들과 협조하였고 이것이 구전되면서 우투리 설화가 되었다.


두번째: 아지발도 토벌이후 이성계의 영웅담이 조선시대까지 쭉가다가, 조선후기되서 왕조에 대한 불만때문에 '주인공'과 '적'이 서로 뒤바뀌어 버린 경우


세번째: 고려말 하도 백성에 대한 수탈이 심해지자, 차라리 왜구에게 붙어 살던 일부 고려백성들의 이야기가 다른의미로 와전된 경우










아기장수 우투리와 아지발도의 유사성은 이와같습니다. 하여튼 아지발도의 이름은 오래도록 남아 조선건국의 창업자 이성계의 영웅성을 더욱 정당화 시켜주었습니다. 그리고 황산전투이후 이성계역시, 왜구의 대규모 칩입에 제대로 대응도 못하면서 도망갈 궁리만 하는 조정을 바라보곤, 더는 안되겠다는 마음으로 아에 갈아엎어버려 조선을 건국합니다.



고려말 왜구의 칩입도. 흔히들 '단순 왜구'로 치부해서 무시하는 경향이 크지만, 고려는 이당시 국가의 존망이 걸린 문제였습니다.




이후 조선은 왜구에게 당했던 지난 쓰라린 과거를 되새김질하면서 군사력과 무기들을 대폭 업그레이드시켰습니다. 이에 왜구들의 활동은 기하급수적으로 줄거나 아에 절멸된 상황이 되었으며, 임진왜란때까지 '국가를 파멸시킬정도로 강력한 왜구의 침략'은 결코없게 됩니다.








'설화속 민중의 구원자'인 아기장수 우투리가 사실은 고려 민중을 닥치는 대로 살육했던 '왜구의 수괴' 아지발도였다는 점이 참으로 아이러니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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