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렇지 않았다는 사실을 선조16년에 있었던 여진족 니탕개의 난에서 찾을 수 있다.
니탕개의 난은 함경도 북단 경원진과 종성진에서 여진족 족장인 니탕개가 조직한 최대 3만여의 병력과 충돌한 전역이었다.
조선군은 최종적으로 8천여명이었던 걸로 기록에 남아있다.
조선전기 최대규모의 군사분쟁이었고, 이 전역에서 유명한 신립이 무용을 쌓은바 있다.
당시 조선기병의 전투력은 막강해서, 인근 여진족이 공포에 떨었을 정도였다.
그러나 만단위의 대규모 군사분쟁을 통해, 조선전기 군사체제(진관제-지역방어)가 이런 규모의 군사분쟁에 효과적으로 대응할 수 없음을 절감하고, 이후 여러가지의 군제개혁을 추진하게 된다. 여러가지가 있으나 다음과 같은 내용이었다.
1. 궁기병 집단의 체제를 여진족과 같은 중기병 중심으로 변경
2. 부족한 병력의 보강을 위해 천민의 신분상승을 대가로 한 모병체계를 도입 : 서얼과 공사천도 무과 응시 가능해짐
3. 기존의 화포가 기동력이 부족한 점을 보강하기 위해 경량의 승자총통 도입
4. 지역방어 중심의 진관제에서 중앙에서 병력/지휘관을 파송하는 제승방략으로 변경
기록을 봤을때, 당시 조선군의 전투력과 이후 군제개혁은 북방의 여진족에게는 상당한 효과를 발휘했다고 판단할 수 있다.
문제는 이 군제개혁이 철저히 여진족대응을 위한 전술과 체계였고, 북방지역을 중심으로 했다는 것이다.
여진족 대응중심의 중기병 체제는 임란때 창보병 중심의 일본군과 접전하면서 막대한 피해를 냈고,
( 전략게임에서도 잘 나오지만, 창병은 기병킬러 )
북방중심의 제승방략도 남방에서는 제대로 효과를 발휘하지 못했다.
( 함경도와 같은 북방지역에서는 여진의 침략이 잦았기 때문에, 병력의 숙련도나 전투력이 남방의 그것과는 사뭇 달랐다 )
정리하자면, 조선의 군체제가 무능하여 임란초기의 급속한 무너짐이 일어났다기 보다는
북방중심으로 최적화된 군체제가 전혀 다른 전술과 체제를 가진 일본군에 대응해지 못했다는 쪽이 정확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