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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원전 218년경의 카르타고 제국(분홍색. 카르타고 시의 위치는 흰색 원),
마쉴리(노란색) 누미디아족, 마사이쉴리(어두운 녹색) 누미디아족의 대략적인 영역.
기원전 3세기 말에 스페인에서 성공적인 정복을 수행한 후, 카르타고 제국은 최소한 외형상으로는 1차 포에니 전쟁과 그 후의 "용병 전쟁"으로 인해 상실한 만큼의 국세를 회복하는 정도를 넘어 그 이상 거대해진 것으로 보였을 것이다. 하지만 카르타고의 말기 역사는 결국 로마를 빼놓고는 생각하기 힘들고, 이 '중흥한' 카르타고 제국의 힘이 로마와 비교하면 어떠했을까 하는 것은 따라서 몹시 관심가는 주제가 아닐수 없다. 하지만 역시나 결정적인데서 자료 부족 때문에 이 문제에 답하기란 대단히 어렵다. 카르타고의 인구를 잘 알 수가 없는 것이다.
카르타고에서 인구 조사 기록이라고 부를만한 것은, 그 멸망 즈음에 "도시"(즉, 카르타고시)에 70만명이 살았다는 스트라보의 기록(17.3.15) 정도이다. 어의를 따지자면 그것은 과장임에 분명해 보인다. 기원전 2세기 중엽에 카르타고시에 70만명이나 살았을 가망성은 거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를 당시 카르타고에 소속된 전체 인구로 받아들일 수 있다면, 그럭저럭 쓸모를 찾을 만한 자료가 되기는 한다. 만약 이 자료에 의지할 수 없다면 우리는 전쟁에 투입된 병력 기록이나 근대의 경작지 면적 같은 훨씬 덜 직접적인 자료에 주의를 더 기울여야 할 것이다.
하지만 병력 기록은 과장되기 쉽다. 특히 광역의 총인구를 추정하는데 사용할 수 있을것처럼 보일 만큼 거대한 병력일 경우는 더욱 그런 의심을 받곤 한다. 예를 들어 "용병 전쟁" 당시 7만명의 리비아(*고대의 리비아)인들이 반란군에 가담했다는 이야기가 있지만,(Polyb.1.73.3) 역시나 이 기록도 과장 의혹을 사고 있으며[Walbank I, p139] 그 논의가 상당히 강하여 무시하기란 곤란하다.
Beloch의 고전적인 연구에서는, 기원전 200년경 카르타고령 아프리카의 인구가 그 당시의 이탈리아와 비슷했을 것으로 보고 3~400만명을 추정치로 제시했다. 그러나 McEvedy-Jones는 기원전 2세기 중엽에 튀니지 영역 전체에 60만명 상당만이 거주했고 그 서쪽 북아프리카 지역의 인구는 250만 정도였다고 보았다. 전자와 비교했을 때 후자는 훨씬 비관적인 수치를 제시한 것이 된다. 근래 케임브리지 고대사 시리즈에서 Frier는 후자의 설명을 채택하여 1세기 초 오늘날의 리비아 이서 북아프리카의 인구를 350만으로 두었다.(+트리폴리타니아/키레나이카 40만)
나는 굳이 따지자면 Beloch의 생각만큼 카르타고 인구가 많지는 않았을 것으로 생각한다. 포에니 전쟁 중에 카르타고는 인력난을 가정하지 않으면 설명되기 힘든 움직임을 자주 보였다. 카르타고령 아프리카의 주민이 이탈리아 반도만큼 되었을 것 같지 않다. 내가 보기에 스페인을 상실한 후 자마 결전까지 약 5년간, 카르타고에서 내놓은 병력은 해외에 나가 있던 군대가 돌아올 때 까지 지상과 바다를 합쳐 7만명을 많이 넘지 못한다. 그렇다면 대략 인구의 5~7%를 전장에 투입하는 것이 매우 큰 노력임을 인정할 때, 위의 관측은 카르타고 본토의 주민이 한 100만~140만 정도로, 즉 멸망 즈음의 "70만" 이라는 것이 정말 영역 전체의 인구가 아니었는가 하는 생각을 하게 만든다.
아마 기원전 204년 이후로는 스키피오에게 항복하거나 교통이 차단되어 인력을 기여하지 못한 지방도 있었을텐데, 이를 20만 정도로 잡는다 해도 아프리카에는 120~160만명이 존재한 것이 된다. 멸망 즈음의 카르타고는 서부와 트리폴리타니아를 상실하고 대략 27,000평방km에 국한되었을 것이다. 거대 카르타고시의 주민을 20만명으로 두면 수도를 제외한 영역의 인구 밀도는 20%의 조사 오차를 설정할 때 25명/평방km이다. 여기가 카르타고 본토의 핵심 지역이었을 것이므로, 반세기동안 상실한 4만 평방km에 대해서 15~20명/평방km의 인구 밀도를 배당해보면 합은 150~170만명이다. 양쪽 계산이 비슷한 것 같아 보이기는 하지만, 사실 후자는 거의 숫자 놀음에 가깝다. 카르타고의 영토 경계선이라는 것 자체가 그리 확실치 않기 때문이다.
아무튼, 다음으로 스페인 영토 약 13만 평방km에는 9명/평방km를 적용할 때(~갈리아 키살피나) 120만명 정도가 살았을 것이다. 이제 아프리카와 합치면 240~290만명으로, Beloch식 계산보다 100만에서 많으면 250(~300?)만명 쯤이 빠진다. 어쩌면 비관적인 데로 너무 나가버렸는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전쟁 중기까지는 "일종의" 속국이었던 마쉴리족을 합치면 실질적인 인력이 한 300만쯤 되는게 아닌가 하는 생각은 든다.
그리고 다음은 방증이라기보다는, 앞의 추정을 전제로 삼을 때 좀 더 자연스럽게 이해될 수 있는 상황들이다. 먼저 2차 포에니 전쟁 첫해에 아프리카와 스페인에 수비 병력을 배치했을 때, 그 내역 가운데 스페인 출신은 16,420명, 아프리카 출신은 16,600명이었다. 양자가 거의 비슷하다. 이탈리아 내에서 한니발이 전투를 벌일 때에도 어느 한쪽이 압도적이었던 것처럼 보이지는 않는다. 아프리카와 스페인의 인력 풀의 규모가 대강 비슷했기 때문이 아닐까? 다음으로, 기원전 212년에 카르타고가 일으킨 군대를 총 15만명(함대~6만, 시칠리아~3만, 스페인~5만, 본토 방어~1만)으로 잡을 때, 이는 단번에 전체 인구의 5~6%에 도달하는 값으로, 역시 대단한 노력을 시사한다. 따라서 시칠리아 전역(기원전 213~210)에서 패배한 후 전황이 급격히 나빠진 것은 자연스러운 현상이라고 할 수 있다.
물론 아주 기본적인 전제-전쟁중에 카르타고인들이 "열심히" 군대를 준비하고 싸웠으리라는 것 자체가 받아들여지지 않을 수 있다. 고전적으로 카르타고에 대해서는 "도축될 날이 다가오는 것을 모르고 먹는데만 열중하는 돼지"같은 이미지가 없다고 할 수 없다. 그러나 나는 그런 이미지가 실상으로 뒷받침되는지 의문이다. "용병 전쟁"시 제공되는 단서 가운데는, 1차 포에니 전쟁 도중에 리비아에서 도시의 세금이 두배로 오르고, 농부들로부터는 예외없이 수확물의 반을 거두어 갔다는 이야기가 있다.(Polyb.1.72.2) "두배의 세금"과 "수확물의 반"이 같은 맥락에서 나온 것이라면, 평시 세율은 아마 25%가 아니었나 싶은데[Walbank I, p137] 그것만으로도 상당한 압제로 보이지만 전쟁을 위해 여기서 세금을 두배로 올렸다고 하는 것은 무리라고 할 수도 있는 수준까지 국력을 기울였음을 시사한다. 하지만 1차 포에니 전쟁에서 카르타고의 병력은 가장 많을 때에도 10만을 크게 넘었다고 보기 어렵다. 사람의 생각이 언제, 어떻게 바뀔지 모르지만 최소한 지금 생각하기에, 카르타고는 두번의 포에니 전쟁에서 정말로 가진 모든 것을 퍼부어 싸웠다가, 지고, 끝장이 난 것이다.
K. J. Beloch, 『
McEvedy-Jones, 『Atlas of world population history 』(1978)
F. W. Walbank, 『A historical commentary on Polybius』vol.1(1970)
The Cambridge ancient history, vol.XI: The High Empire, A.D. 70–192 (20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