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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자왕과 삼천궁녀의 이야기
게시물ID : history_18405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Lemonade
추천 : 3/5
조회수 : 2642회
댓글수 : 1개
등록시간 : 2014/10/17 12:55: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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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론 부터 말씀 드리자면 일제 근원설(?)은 사실이 아닙니다.

세종 실록 지리지의 공주목 부여현 편을 살펴보자면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습니다.

<상략>

호암사로부터 물을 따라 남쪽으로 내려가 부소산(扶蘇山)에 이르면, 산에 한 괴상한 바위가 있어 강가에 걸터 앉아 있는데, 바위 위에 용을 낚던 흔적이 있다. 민간에 전하기를, “소정방(蘇定方)이 백제를 칠 때, 비·바람이 갑자기 닥쳐서, 흰말[白馬]로써 〈미끼를 삼아〉 용을 낚은 후 쳐 이겼으므로, 강을 백마(白馬), 바위를 조룡대(釣龍臺)라 하였다.” 한다. 대 서쪽에 또 1백 길이나 되는 깎아지른 바위가 있는데, 민간에 전하기를, “의자왕(義慈王)이 신라에게 패하게 되매, 궁녀들이 이 바위로 달아나 스스로 강물에 떨어져 죽었으므로, 낙화대(落花臺)라 하였다.” 한다.

<하략>


이미 오래전 부터 민간 설화적으로 이미 궁녀들의 투신 이야기가 전래되고 있었음을 알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언제부터 이러한 사실이 전래되었나 되짚어 나가자면 가장 오래된 기록으로 삼국유사를 들수가 있겠습니다.

삼국유사 1권 제1기이 태종춘추공편에 본다면 아래와 같은 기록이 있습니다.

백제고기 (百濟古記)에 이르기를 “ 부여성 (扶餘城) 북쪽 모서리에 큰 바위가 있는데, [바위의]아래는 강물과 만난다. 서로 전하여 내려오기를 의자왕 과 여러 후궁들이 화를 면하지 못할 것을 알고 서로 일컬어 말하기를 ‘차라리 자진을 할지언정 남의 손에 죽지 않겠다.’하여 서로 이끌고 이곳에 이르러 강에 몸을 던져 죽었으므로 속칭 타사암 (墮死岩)  이라 한다.”라고 했으나, 이것은 속설이 와전된 것이다. 다만 궁인들은 그곳에서 떨어져 죽었으나 의자왕이 당 나라에서 죽었음은 당사 (唐史)에 명백히 쓰여 있다.


기록에는 일종의 문학적인 수사를 엿볼수가 있는데, 이러한 속설과 기록이 이후 황음무도荒淫無道 즉 주색에 빠져 사람으로서 마땅히 할 도리를 하지 않았다는 의자왕에 대한 혹독한 비평과 어우러져 삼천 궁녀설이 되었다는 것을 짐작해볼수 있겠습니다.


의자왕이 어떠한 평가를 받는 인물인가를 보자면 세조 실록 16년에 이이의 상소를 사례로 들어볼수 있겠지요,

병조 판서 이이(李珥)가 상소하여 시사(時事)를 극진하게 진달하였다. 그 상소에, “삼가 아룁니다. 흥망은 조짐이 있고 치란은 기미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일이 닥치기 전에 말을 하면 흔히 신임을 받지 못하고 일이 닥친 뒤에 말을 하면 구제하려고 해도 할 수 없습니다. 

신이 예전 역사를 읽다가 장구령(張九齡)과 성충(成忠)의 이야기에 대해서 매양 책을 덮고 깊이 탄식하면서 마음을 잡지 못하였습니다. 백제(百濟) 의자왕(義慈王)의 어둡고 용렬한 것이야 본래 말할 것도 없지만 당나라 현종(玄宗)처럼 명철한 지혜로서도 선견지명에는 어두웠으니, 의자왕이 성충의 말을 쓰지 않은데 대해 후회한 것이나 현종이 곡강공(曲江公)242) 에게 제사를 지내준 것이 난망(亂亡)에 무슨 도움이 되겠습니까.

<하략>

당파를 초월한 인재 등용과 폐정의 혁신을 논하는 상소인데, 당대의 지식인들의 의자왕을 바라보는 시각을 볼수가 있지 않나 합니다.


더욱이 이 낙화암은 여러모로 일종의 타산지석의 상징으로서 받아들여지고는 했습니다.

가령 세종 15년의 기록을 보면 이렇습니다.


<상략>

술의 해독은 크니, 어찌 특히 곡식을 썩히고 재물을 허비하는 일뿐이겠는가. 술은 안으로 마음과 의지(意志)를 손상시키고 겉으로는 위의(威儀)를 잃게 한다. 혹은 술 때문에 부모의 봉양을 버리고, 혹은 남녀의 분별을 문란하게 하니, 해독이 크면 나라를 잃고 집을 패망(敗亡)하게 만들며, 해독이 적으면 성품(性稟)을 파괴시키고 생명을 상실(喪失)하게 한다. 그것이 강상(綱常)을 더럽혀 문란하게 만들고 풍속을 퇴폐하게 하는 것은 이루 다 열거(列擧)할 수 없다. 우선 그 중에서 한두 가지 경계해야 할 것과 본받아야 할 것만을 지적하여 말하겠다. 

<중략> 

또 우리 나라의 일을 가지고 말한다면, 옛날 신라가 포석정(鮑石亭)에서 패(敗)하고, 백제가 낙화암(落花巖)에서 멸망한 것이 술 때문이 아닌 것이 없다. 고려의 말기(末期)에는 상하가 서로 이끌고 술에 빠져 제멋대로 방자하게 굴다가 마침내 멸망하기에 이르렀으니, 이것도 또한 가까운 은감(殷鑑)이 되는 것이니 경계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하략>



덧붙이자면 왕포암 혹음 타사암 등의 이름이 언제부터 낙화암으로 불렸는가는 알수 없는게 사실이나 

고려 시대에 이색(李穡)의 아버지인 이곡이 지은 ‘하루 아침에 도성이 기왓장처럼 부서지니 천 척의 푸른 바위가 이름하여 낙화암이러라(一日金城如解瓦 千尺翠巖名落花)’라는 시나, 고려 후기의 문신이자 시인인 이존오가 ‘낙화암 밑의 물결은 호탕한데 흰 구름은 천 년을 속절없이 떠도누나(落花巖下波浩蕩 白雲千載空悠然)’라는 시를 지은 것을 보면 최소한 고려 시대에는 이미 낙화암이라는 이름으로 불리고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또한 사료에서는 찾아볼수 없는 3,000이라는 궁녀의 숫자를 정확하게 지목한 것은 조선 중기 민재인의 시 백마강부의 '구름같은 삼천궁녀 바라보며 후궁들의 고운 얼굴에 눈이 어두웠네' 라는 구절에서 유래합니다, 말 그대로 많은 수를 가리키는 말이지만 이 것은 어느새 41년 야담사에서 나온 윤승한의 역사 소설 김유신이나 62년 이홍직의 국사대사전에 공식적으로 기록되는등 사실로 둔갑되기 시작했지요,

일제 근원설(?)을 믿으시는 분들은 대중가요 백마강을 가져오시고는 하지만 실상 이러한 기존의 속설과 기록들을 토대로 나온 것이라고 밖에는 볼수가 없는게 사실입니다.



*최초로 공식적인 학술적 서적으로 3천 궁녀설을 기재한 국사대사전에서는 3천 궁녀설의 논거로 신동국여지승람을 제시하나 해당 사료에는 그러한 기록이 없습니다.



>일전에 작성한 글이나 이야기가 나옴김에 재탕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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