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회장님(전편)
나의 회장님(중편)
“한 번 생각해봅시다.”
그분은 확답하지 않았어. 하지만 흥미를 느낀 건 틀림없었지. 그러지 않았다면 내가 제시한 색상을 한동안 유심히 보지는 않았을 터.
“회장님, 조감도나 도면 좀 볼 수 있겠습니까?”
“조감도는 박 차장 뒤에 있고...”
뒤를 돌아보니, 회장실 입구 벽면 중앙에 화려하게 그려진 조감도가 큰 액자에 담겨 걸려 있었고
“도면은...”
테이블 옆, 아무렇게나 쌓아 놓은 서류 더미를 뒤져 두꺼운 설계도면을 내게 건냈지.
“사진 좀 찍어도 되겠습니까? 회장님.”
“사진은 뭐하러?”
“공장 모형을 만들어 회장님께 선물하고 싶습니다.”
그제야 뭔말인지 짐작한 그분은 고개를 끄덕였고 화질이나 기능이 지금과는 비교가 안 되는 폰으로 조감도와 설계도면 일부를 찍었지.
새벽부터 찾아온 내가 기특했는지, 아니면 미팅이 흡족했는지 회장님은 근처 해장국집 같이 가자 하셨어. 하지만 난 회사 핑계를 댔지. 밥이야 모든 일 마무리된 후에라도 언제든 가능할 터. 고함소리에 놀랐던 난, 혹시나 이 까탈스런 사람과 밥 먹다 행여 실수라도 할까 걱정되었고 무엇보다 시급히 처리할 일이 생겼으니...
출근 중인 팀원에게 전화 걸어 오전 일정 취소하라 하고는 난 친구가 운영하는 건축사 사무실로 차를 몰았어.
“아크릴 이런 거 필요 없고... 두꺼운 종이로 하면 된다.”
“언제까지?”
“3일....”
“돌았나, 자슥아...”
무리란 건 나도 알았지. 건축사 친구는 전날 과음으로 사우나 갔다 느긋하게 출근하려던 참이었어. 급하단 말에 아침 댓바람부터 사무실 나온 것만 해도 짜증 나는 일인데 돈 안 되는 일에 시간까지 독촉하니 이건 뭐...
“시간이 없다...”
“빨라도 보름이다 자슥아, 이기 뭐 장난인 줄 아나?”
커피를 홀짝이며 휴대폰에 저장해 놓은 조감도와 도면을 쳐다보던 친구는 어처구니없다는 듯 나를 쳐다봤어.
“도로, 나무, 사람... 이런 거 필요 없다. 건물만 딱 나오면 된다니까...”
“여기 보니까 이 부문은 유린데...”
“그거 필요 없다고!, 그냥 딱, 이 색상으로 건물만 딱 나오면 된다고...”
“....”
친구는 말없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어.
“임마, 니 사무실 차려 일 없어 빌빌거릴 때 내가 니한테 연결해준 것만 해도 몇 갠데? 이제 배부르다, 살만하다 이거가? 이거 잘되면 100억 짜리다 자슥아, 이것만 있는 줄 아나? 2차, 3차 더 있다. 그거 니한테 갈지 누가 아나? 하기 싫으면 차뿌라 자슥아~”
언성을 높혔어, 괜히 해보는 말이었지. 그만큼 중하고, 급하다는 걸 인식시키려면 다른 방법이 없었거던.
“동*아, 내 좀 도와주라. 내 이 껀, 꼭 함 해보고 싶다.”
술이 덜 깬 친구는 냉장고에서 생수병을 통째로 가져와 벌컥벌컥 마시더니, 직원에게 내 폰에 담긴 조감도와 도면을 출력하라 시켰어. 그리고선 작업대 옆에 동그랗게 말아 수북이 쌓아 놓은 종이뭉치를 이리저리 디비더니 하나를 골라 왔어.
“이 색으로 하란 말이제...”
고개를 격렬하게 끄덕였지.
“이걸로 공장 지으면 예쁘기는 하겠다. 음... ”
직원이 출력한 조감도와 도면을 가져오자, 친구는 짧은 탄식을 하며 번갈아 봤어. 자신이 한번도 설계에 반영하지 못한 색상에 흥미를 느낀 것도 같았고.
“일주일..., 더 빨리는 죽었다 깨도 안 된다.”
지금이야 건설경기 바닥이라 모형도는 대부분 외주 처리해. 하지만 당시만 하더라도 설계사무실에서 직접 모형도까지 만들었지. 한아름 정도밖에 되지 않는 아담한 크기의 모형도, 하지만 무리란 건 나도 알았지. 제대로 하려면 한달 정도 걸리는 일. 일주일은 다른 일 제쳐두거나 야근해야 맞출 수 있는 시간이었거던.
모형도가 나온 다음 날 아침 07:00, 회장님은 내가 가져온 공장 모형도를 이리저리 살폈지. 마침 해가 떠올랐고.... 그러자 형광 불빛에 하얗게 빛나던 공장 색이 자연의 빛과 어우려져 아이보리 색상으로 바뀌는 듯했어. 난 얼마전 여기서 분명히 보았거던, 장식장에 진열된 하얀 도자기가 시간이 지남에 따라, 그러니 태양의 이동에 따라 조금씩 색이 변하는 것을.... 말을 하지 않아도 전해지는 듯 했어, 나의 생각이 말이야. 도공이 도자기 빚는 마음으로 공장을 지으시라. 백자의 은은하고 오묘한 빛깔처럼 공장 역시 태양이 비추는 방향에 따라 시시각각 변하는 장면을 보게 되리라...
일군업체보다 비싼 가격임에도 우리 회사 제품으로 결정되었을 때의 기쁨은 말로 표현하기 어려웠지. 이후 직접 들은 얘기로는 마지막까지 고민을 많이 하셨대. 2% 정도 추가되는 공사비, 허나 3차까지 가정할 땐 10억 가까운 돈, 적은 금액이 아니었으니까. 하지만 주변 공장 돌아보고 집무실에서 와 모형도를 보면 생각이 달라지더라는 거야. 아침, 저녁으로 미묘하게 변하는, 하얀색이 주는 오묘한 매력에 빠져든 게지. 밀도 높은 단열재, 두꺼운 철판... 최종 낙찰 되었음에도 미련이 남은 듯 회장님은 굳이 그럴 필요 있냐 했지만, 난 밀어부쳤어.
1공장 공사는 순조롭게 마무리되었어. 날 불러 공장 둘러보며 흐뭇해하셨지. 그렇게 인연이 된 거지. 정말 까다로운 분이셨어, 성격도 괴팍했고. 한번은 말이야. 점심이나 하자며 부르더라. 차를 공장에 세워두고 회장님 차로 근처 청국장집엘 갔지. 한술 뜨시더니 갑자기 당신 회사 사장 차는 뭐냐고 묻더라. 에쿠스라 했지. 순간, 갑자기 젓가락을 탁자에 쎄게 탁 내리치는 거라. 놀란 표정으로 쳐다봤지. 뭐라는 줄 알어? 당신 사장 차는 좋은 차고 내 차는 똥차라서 문을 그리 쾅쾅 닫냐며 화를 내는 거라. 허 시벌~. 그러니 내가 내릴 때 차문 쎄게 닫은 게 거슬렸던 거야. 그렇다고 그리 화를 내시나? 다음부터 조심해 닫으라면 될 것을.
2차 공사 얘기가 나오던 어느 여름날, 태풍이 한바탕 쓸고 간 다음 날, 실로 오랜만에, 회장님에게서 전화가 왔어. 점심이나 먹자면서 1공장으로 오라 하셨지. 그 바쁜 사람이 말이야.
공단 입구에 들어서니 난리가 아니었어. 몇십년 만의 태풍으로 공단지대는 쑥대밭이 된 거라. 지붕 날라간 건물, 강한 바람으로 벽면이 찌그러진 공장... 새로 지은 대부분의 공장에 크고 작은 피해가 생겼던 거지. 하지만 태풍이 지난 후 눈 시리도록 청명한 날, 단 하나의 공장만이 온전한 모습으로 우뚝 서 있었어.
3차까지 계획된 공사는 2차를 끝으로 중단되었지만 내게 신뢰를 느낀 그분은 이후에도 업무와는 무관한 이런저런 사소한 부탁을 했었고 난 그때마다 최선을 다해 도왔어. 농반진반 스카웃 제의도 하셨지. 니 같은 놈 하나만 있으면 좋겠다면서 말이야. 어림없는 일, 그분 밑에서 일하면 수명이 최소 10년은 단축되었을 거야. 어느 정도여야지 말이지.
시간이 지나니 심부름도 시들... 그렇게 몇 년이 흐르고... 난 독립했고, 배운 게 도둑질이니 철강사업을 시작했고, 장사는 잘 안되고... 직원 급여일은 순식간에 다가오고...
직원 눈치가 보여 거래처 간다 해놓고 산에나 가려 사무실을 나설 때였지. 저장되지 않은 번호가 휴대폰 액정에 떠는 거라.
“박 차장, 독립했으면 연락해야지.”
너무도 귀에 익은 목소리
“사무실로 함 들어오소. 그때 못 지은 3공장 지어야지..."
돌아보면 말이야. 아마 그때가 내가 가장 열정적으로 일한 시긴 거 같어. 회장님을 만난 것도 행운이었고. 뜻밖의 전화, 새벽의 방문, 백자를 공장 색상에 적용시키고... 모형도까지. 아이디어가 샘솟았고 일에서 성취감을 느끼던 시절이었지. 3공장 공사를 진행하면서 나의 사업도 순조롭게 풀렸어. 내겐 은인이었지. 직장생활할 땐 그 건으로 다음 해 이른 승진할 수 있었고, 독립 해서는 빌린 돈 다 갚고, 지금까지 크게 벌진 못해도 못 산다는 얘기는 안 들으니 말이야. 열심히 한다고, 최선을 다한다고 일이 다 잘 되는 건 아니지. 하지만 기회가 결실로 가려면 최소한 준비는 하고 있어야는 거지. 새벽 3시에 메일 열어보는 사람, 차문 쎄게 닫았다고 화내는 사람, 하지만 난 그분에게서 정말이지 많은 걸 배웠어. 사소한 의전부터 일에 임하는 자세까지. 어쩌면 그게 내가 얻은 가장 큰 수확이었고 지금의 든든한 사업 밑천인지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