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사 3년 차 되던 가을 무폅인가, 한창 일에 재미 붙일 무렵, IMF 외환위기란 게 왔어. 후퇴를 몰랐던 한국경제, 민초들은 물론이거니와 성장에 성장을 거듭해오던 국내기업들은 난생 처음 겪는 상황에 맨붕이 왔었지.
우리 회사도 마찬가지였어. 툭 하면 부도, 멀쩡한 회사도 대금 결제가 미뤄졌지. 하지만 우린, 운이 좋았어. 업종이 철강이었으니까. 미리 말하자면 우리 회사는 외환위기 덕(?)에 회사를 더 키운 경우야.
환율이 무지막지하게 오르기 시작했어. 1,000원대를 넘나들다 1,300에서 1,500원 1,800원 넘어 치솟았으니까. 영민했던 대표이사와 경영진은 수출 올인 전략을 짰지. 중국, 일본 에이젼트들을 다 불러 모았어. 당시 에이전트 수수료는 매출액 대비 1%, 회사는 세 배인 3%를 제시했어. 당시로선 획기적이었지.
그래놓고 철강재를 사들이기 시작했어. 도산했던 회사, 자금이 급한 업체들로부터 싸게 사들인 거야. 그때, 지레 겁먹고 회사를 넘기거나 고의 부도를 낸 사장님들, 나중 땅을 치셨지.
10억 수출하면 그냥 7-8억이 떨어지는 거야. 제품 마진과는 별도로 환차익만 어마무시하게 생겨났지. 그기에 에이젼트 수수료 3%, 3천만원은 그야말로 껌값에 불과했어. 헐값에 매입한 철강재는 속속, 중국으로 일본으로 엄청난 이익을 회사에 안겨주며 팔려나갔어.
그러던 중, 중국 담당 에이젼트에게서 연락이 왔어. **시의 당 간부와 **시 경제관련 고위인사, 현지 기업체 해외사업부 총감이 공장을 방문하고 싶다는 거였어. 월 10억, 연간 100억 넘는 물량을 거래하고 싶은데 우리 회사가 그럴 능력이 되는지 직접 확인하고 싶다는 거였어.
생각해봐, 만약, 이 거래가 성사된다면 환차익만 50억~80억... 이건 뭐... 방문 날짜가 2달 후로 정해지자 회사는 준전시상태 돌입. 다른 말 필요 없었어. 모토는 하나 ‘이 껀, 무조건 성사시켜야 한다.’
지금이야 중국인들이 별 어려움 없이 외국을 넘나들 수 있지만, 그땐 아주 까다로왔어. 우리가 초청장을 보내야 했고 중국 당국의 심사를 받아야 했지. 당시 중국 관료나 경제인들의 파워는 해외 나갈 때 얼마나 많은 인원을 대동할 수 있냐는 거였어. 그러니 어렵사리 만들어진 해외 기업체 순방에 가족, 사돈에 팔촌까지 함께 갈 수 있다면 상당한 권력의 소유자라 할 수 있었지.
에이젼트가 보내 온 초청 대상 명단엔 예상한 대로 한 명당 가족이나 친지로 보이는 사람들이 서너명씩 끼워져 있었어. 근데 특이하게 **시 당 간부만 혼자인 거야.
여느 사회주의 국가와 마찬가지로 중국 역시 당이 제일 우선, 다음이 군, 마지막이 국가야. 당이 제일 먼저 생겼고, 이후 군대를 만들었고, 마지막으로 혁명에 성공, 국가를 만들었기 때문이지.
회사를 방문키로 한 세 명의 경제관련 인사들의 서열은 당 간부, **시 경제관련 인사, 기업체 총감 순이었어. 근데, 가족들을 대거 대동한 다른 사람들과는 달리 당 간부, 이 사람만 홀몸으로 온다는 거지. 에이젼트 말에 의하면 이 사람이야말로 실세 중 실세. **시의 경제관련 업무를 총괄하는 자라는데 말이지.
3박 4일 일정, 공장 견학, 회의, 관광, 쇼핑, 접대... 세세한 부문까지 점검 또 점검... 10여명 초청자들의 일정은 분 단위까지 체크 되어 수정에 수정을 거쳤지. 주요 인사들의 성향은 물론이거니와 동행하는 친지들의 기호까지 파악하려 노력했어.
하지만 가장 큰 과제는 따로 남아 있었지. 바로, 주요 인사 3인의 접대... 또는 저녁 술자리. ‘꽌시’라고 들어봤을 거야. 중국인들은 파트너와의 관계를 중요시한다는 거지. 아무리 좋은 거래 조건을 제시해도 서로 간의 사적인 믿음이 없으면 어렵다는 거지. 서로 간 허물 벗고 쉬 친해질 수 있는 건 우리나 그들이나 술자리만한 게 없었지. 그기에 가무까지 곁들인다면 금상첨화...
거사를 앞두고, 중국 에이젼트가 브리핑을 위해 회사를 방문했어. 대략적인 건 이미 서로가 주고받은 터, 문제는 역시 접대였어. 이틀 밤 동안 이 세 사람을 얼마나 구워삶아 놓느냐에 따라 거래량은 물론, 조건 또한 달라질 수 있었으니 말이야. 에이젼트가 3인이 좋아하는 술, 주량, 잘 부르는 노래, 특이한 술버릇, 심지어는 여성 파트너의 취향 등 사소한 부문까지 말하더니 마지막에 한마디를 붙이는 거야.
“당 간부인 쉬*동은 당에서도 인정받는 젊은 인재입니다. 이 사람 정말 중요한 사람입니다. 이 사람이 **시 기업체를 다 관장하는데, 잘 되면 이 건 외 추가 거래가 성사될 수도 있습니다. 애가 젠틀하고 다 좋습니다. 근데 좀 특이한 게 있다면...”
잠시 뜸을 들인 그는 또박또박 말했어.
“가슴 큰 여자를 좋아한다는 겁니다.”
오로지 말술이라는 이유로 쟁쟁한 선배들을 제치고 저녁 접대 자리에 끼게 될 난 순간 피식하고 웃었지. 그렇잖아, 엄마 젖 못 먹은 애도 아니고... 같이 듣던 전무님, 수출부 팀장도 서로 가벼운 웃음을 주고받았어.
“인물, 몸매 이런 거 필요 없습니다. 가슴만 크면 됩니다.”
에이젼트는 자신이 정작 중요한 정보를 주는데 우리가 대수롭지 않게 여긴 게 못마땅한지 한번 더 강조했어. 가슴 큰 여자를 말이야.
“걱정 마십시오. 그건 우리가 알아서 하겠습니다.”
창업 공신에 회사를 위해 사심 없이 충성했던 분, 내가 마음으로 존경했던 분, 지금은 대표이사가 된 당시 전무님께서 웃으며 말하셨지. 아마 속으론 가슴도 크고 몸매도 좋고 얼굴도 이쁜... 뭐 그런 아가씨는 천지삐까리라 생각하셨겠지.
하지만, 그땐 진짜 아무도 예상치 못했어, 뒤에 벌어진 황당하고 오줌 지렸던 절대절명의 상황을 말이야.
거사 삼일 전 부터, 나를 포함 접대 자리에 참석할 3인은 당일 최상의 컨디션을 위해 금주에 돌입한 건 물론, 접대 자리에서 벌어질 수도 있는 돌발상황까지 가상 시나리오를 짜 대처방법을 의논했지. 50도짜리 백주(빠이주)를 음료수 마시 듯 들이 붓는 사람들, 점심 반주로 두서너병을 가볍게 비우는 술 귀신들에 비하면 우린 뭐... 우리 또한 술이라면 한자락들 했지만, 독한 백주에 단련된 그들의 위장과 우리의 그것은 애초부터 달랐던 게지.
내가 먼저 분위기를 잡아, 기필코, 반드시, 3인에게 중상을 입히고 장렬히 전사하면 그담 수출부팀장이, 마지막엔 적당히 마셔가며 분위기 파악하는 전무님이 자리를 마무리하기로... 그렇게 우린 천진난만한 전략을 심각하게 짰었어.
거사 당일, 두 대의 고급 세단과 한 대의 20인승 콤비버스가 오후 세 시 경 회사 앞 정문에 도착했어. 본관 현관 입구엔 큼지막한 환영 플랭카드가 걸려 있었고, 필수 현장 인원을 제외한 모든 임직원이 도열 해 열렬한 박수로 손님을 맞았어.
당시 좀 놀랐던 게, 얼굴색이나 입은 옷들이 상상 밖이었다는 거야. 당장 시내 중심가에 내 놓아도 꿀릴 게 없는 차림새였어. 다들 멋쟁이들이었단 게지.
예정된 일정은 대표이사가 참석한 저녁 환영 만찬으로 끝이 나고, 준비된 수순에 의거, 같이 온 친지들은 쇼핑을 위해 백화점으로 이동, 통역인 에이젼트와 함께 우리는 오로지 '꽌시'를 위해, 광안리 술집으로 향했어. (후편에서 마무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