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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短)한니발의 "3대 명장"론이 내포한 정치적 위험성(역개루 펌)
게시물ID : history_18277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토츠카
추천 : 6
조회수 : 1433회
댓글수 : 1개
등록시간 : 2014/10/07 00:23:01


기원전 193년에 "있었다고 일컬어지는"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와 한니발 사이의 대담 중에 나온 명장론의 내용은 너무나도 유명하므로 굳이 여기서 재차 설명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이 에피소드에는 근본적으로 커다란 문제가 있다. 정확히 그런 사건이 정말 존재했을 가능성이 별로 없다는 것이다. 어째서인가? 기원전 193년 당시 한니발은 셀레우코스 제국의 조정에 있었다. 따라서 그와 스키피오가 만날 수 있으려면, 그 해에 스키피오가 아시아를 방문했어야 한다. 리비우스가 인용한 클라우디우스 콰드리가리우스의 글에서는 스키피오가 당시 셀레우코스 제국에 파견된 로마 사절단의 일원이었던 것으로 처리되어 있지만,(Liv.35.14.5) 정작 그 앞부분에 나오는 사절단 명단에는 스키피오가 없다.(Liv.34.59.8)

 

이것은 그저 리비우스 책의 앞뒤 모순으로 끝나는 문제가 아니다. 34권 후반의 외교 교섭 부분에 스키피오의 파견 이야기가 나오지 않고, 35권에서 하필이면 클라우디우스 콰드리가리우스의 글로부터 이 에피소드가 인용되었다고 하는 것은 폴리비오스가 스키피오의 아시아 사절행을 언급하지 않았음을 강하게 시사한다. 이 시기 역사에서 폴리비오스가 갖는 권위도 권위지만, 특히 스키피오의 인생 경로에서 이런 중대한 사건이 정말 존재했다면 그것을 폴리비오스가 누락시켰다고는 보기란 어렵다.

 

 

아마 이 이야기는 나중에 좀 더 자세히 할 기회가 있을 것 같다. 단, 기묘한 것은, 한니발이 기원전 193년에 셀레우코스 제국에 온 로마 사절을 만난 것 자체는 그 에피소드 외의 기록에서도 확인된다는 점이다. 기원전 199년도 집정관을 지냈던 P.빌리우스(타풀루스)가 에페소스에서 한니발과 "자주" 만났다고 하기 때문이다.(Liv.35.14.2) 그렇다면 위의 에피소드는, 아주 다른 방식으로 재해석될 수가 있다. 사실 한니발은 스키피오를 만난 자리가 아니라 P.빌리우스와 대화하던 도중에 저것과 비슷한 명장론을 말했을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그런데 나는 일단 진짜 대화 상대가 누구였건 간에, 한니발의 입에서 실제로 저런 명장론이 나왔다면 정치적으로 한니발 본인에게 별로 좋지 않았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어째서인가? 명장 순위 1, 2, 3위가 정확히 누구누구였는지에 대해 플루타르코스가 매우 다른 보고를 하고 있기는 하지만, 리비우스-아피아노스 계열이건 플루타르코스 계열이건 그 순위에는 큰 문제점이 있다.

 

 

한니발 본인은 들어가는데, 바로 그 당시 한니발의 '주군'이던 셀레우코스 제국의 제왕, 안티오코스 3세는 안 들어간다.

 

 

뭐, 당연히 세계사에서 명장을 꼽을 때 안티오코스 "대왕 폐하"를 머리속에 떠올릴 사람은 오늘날 단 한명도 없기는 할 것 같다. 하지만 이것은 그런 문제가 아니다. 윗사람에 대한 평가를 꼭 솔직히 말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단지 간접적인 암시라고 해도 말이다. 굳이 이 이상 길게 설명할 필요는 없어 보인다. 

 

별로 유명한 이야기는 아니지만, 기원전 193년 한니발과 로마 사절의 만남은 안티오코스 3세의 의심을 불러일으켜 결과적으로 셀레우코스 제국 내각에서 한니발의 입지 추락을 초래했다.(Liv.35.14.4,19.1) 나는 그것이 꼭 "대왕님"의 졸렬함을 보여주는 증거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사실상 적국인 나라의 고위 인사를 만나 저런 소리나 하고 있었으면 누구라도 의심을 안 할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나중에 한니발은 의심을 풀기 위해 그 유명한 "내가 어렸을때 아버지와 함께 신전에 가서 영원히 로마와 싸우겠다고 맹세했소"라는 발언을 하게 된다.(Liv.35.19.3) 이 말이 왕에게 다소 감동을 주었던 모양이기는 하지만, 결국 로마와 전쟁을 개시하는 시점에 이르렀을 때 안티오코스 3세는 한니발에게 군대를 맡겨 아프리카쪽으로 보내려던 계획을 버림으로써 "제왕이야말로 유일한 영도자이자, 장수여야 한다. 한니발에게 군대를 맡겨 보낸다면 승리의 공적은 왕이 아닌, 한니발의 것이 된다"는 토아스의 주장을 받아들인 셈이 되고 만다.

 

 

기본적으로 한니발의 이런 불안한 입지가, 꼭 명장론 때문일 리는 없다. 하지만 카르타고에서 도주해서 객장 생활을 하던 시기에, 그가 분명히 불신을 살 수 있었고, 스스로도 처신에 주의를 기울였어야 하는 입장이었음은 의심의 여지가 없을 것이다. 그런 상황에 "명장론"이 실제로 나왔다면, 과연 영웅의 과거 회상담 정도로 받아들여졌을지 의문이다. 한니발이 P.빌리우스의 함정에 빠져서 말실수를 했던게 아닌가 하는 의심까지 들 정도이다.(한니발과 빌리우스의 만남 자체가 로마인들의 함정이었다는 해석은 Polyb.3.11.2, Nepos:Han.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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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개루 thwmunba님 글





thwnmuba님은 로마사에 굉장히 해박하신 분입니다.

(근데 국내엔 리비우스의 로마사나 폴리비우스의 역사는 국역 안될까요. 사실 번역하더라도 질이 좀 개판일 것 같아서 기대는 안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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