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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가 스키장에서 구조당한 이야기
게시물ID : humordata_1825912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Story
추천 : 16
조회수 : 3135회
댓글수 : 28개
등록시간 : 2019/07/28 17:3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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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창작글
친구가 해준 이야기입니다.

-

때는 봄을 바라볼만 하던 어느 겨울이었다.
언제나처럼 생존을 위한 최소한의 움직임으로 방바닥에 붙어 생활하던 나에게 한 통의 전화가 왔다.

'야 보드타러 가자.'
'그래 내일 가자.'

전화는 용건만 간단히 하고 끊어졌다.
별 것 없는 내용이었지만 중요한 건 전화를 주고받은 둘 다 평생
스키장 눈도 안 밟아 본 인간들이었다는 사실이었다.

전화가 다시 왔다.

'너 근데 보드 탈 줄 아심?'
'아니? 네이버에 검색해보면 나오지 않을까?'
'그래 그러면 오늘 중에 배워서 내일 타자.'

다시 전화를 끊고 누운 나는 뭔가 불안했지만 썰매는 잘 타니까 상관 없지 않을까? 하고 그냥 잠이 들었다.




다음날.

우리는 패기있게 스키장으로 향했다.
그런데 옷이랑 보드는 어떡하지? 하면서 가던 중에 대문짝만하게 대여점이라고 써있는 아무 가게나 들어갔다.
대충 곰팡내 나는 옷 몇 벌을 입어보고 적당한 옷을 골랐고 대충 보드를 골랐다.

무조건 오래 타는 게 좋은 거라며 종일권을 끊었고, 개장시간에 맞추어 당당하게 들어갔다.
생각보다 높다고 생각하며 우리는 보드를 들고 천천히 슬로프를 올랐고 눈밭을 굴러다니며 겨우 보드에 발을 고정했다.

'이거 빠지진 않겠지?'
라고 생각하며 일어날 때 쯤, 그날의 악몽이 시작되었다.



일어나자마자 일직선으로 미끄러져 내려가며 순식간에 가속도가 붙었다.
나는 양팔을 휘두르며 다리를 뻗어 넘어질 자리를 딛고 균형을 잡고 싶었으나 보드에 붙어있는 다리가 뽑힐리 없었다.

영상과 달랐다.

나는 어떻게든 살아남겠다는 생각으로 어떻게든 균형을 잡았으나 체감상 엄청났던 가속도는 감당이 안 되었고,
이건 넘어져야 한다. 어떻게든 넘어져야 산다. 하고 생각했다.

일단 넘어졌다.

앞으로 넘어지면 정말 죽을 수도 있다는 생각으로 뒤로 넘어져 엉덩방아를 찧었다.
개장한 지 얼마 안 되었고 끝물이라 아직 사람이 별로 없었지만 옆으로 스치고 지나가는 사람들을 보며 민폐가 되어선 안 된다고 생각했다.

그래, 옆으로 좀 피해주자. 저 정도는 갈 수 있겠지 하고 살짝 일어나려는 찰나,
그대로 미끄러져 스키장 옆 끝에있는 철망 펜스로 돌진해버렸다.




하얀 눈 위에 누워서 한참 생각했다.
지난 날 내가 얼마나 잘못 살았는가.
나는 뭘 잘못해서 이 하얀 지옥에 고립 되었는가.

철망에 부딪히며 보드가 갈 수 있는 길은 막혔고, 일어나려 할 때마다 점점 철망을 밀어낼 뿐, 아무 효과가 없었다.
보드에서 발을 빼는 방법을 몰랐다.
뭔가 풀려고 이것저것 만져보면 점점 와이어가 발을 죄어왔다.

그래서 그냥 그대로 누워서 하염없이 하늘을 보다가 간간히 고개를 돌려 재밌게 노는 사람들을 볼 뿐이었다.

친구는 어찌 되었을까.
궁금했지만 알 길이 없었다.
나의 제한된 몸 움직임과 그로인해 제한된 시야도 문제였지만 적어도 내가 넘어지기 전 까지 나를 지나간 적 없었으며,
넘어진 이후에도 지나가는 걸 본 적이 없었다.




한참 누워있다가 문득 생각했다.
옆으로 굴러가자.

나는 허리를 돌려 보드를 옆으로 세웠고 그대로 몸을 옆으로 꺾으며 경사 아래로 몸을 대차게 굴려보았다.
결과는 어찌 되었을까.

우리는 물리학을 배워야한다.
상식적으로 회전 반경이 큰 쪽과 작은쪽이 연결되어있다면 당연히 큰 쪽의 이동거리가 길지 않겠는가.
굴러갈 거라고 생각했던 그 절망적인 상황에서의 그릇된 판단은 대자연의 물리법칙 상 적용되지 않았으며
내 몸의 절반이 스키장 밖으로 빠져나갔다.

그대로 흙의 텁텁함과 스키장의 눈이 입속으로 들어왔고 나는 반사적으로 팔꿈치를 짚어 플랭크 비슷한 자세로 버티게 되었다.
아 생각났다. 훈련소에서 매일 아침 시키던 코브라자세였다.
나는 그대로 스키장의 한 마리 코브라가 되었다.

한 바퀴 더 구르는 건 생각도 할 수 없었다.
구르는 도중 보드가 찍혀 넘어가는 순간 허리가 꺾이는 게 방바닥에서 뒹굴거리기만 하던 나의 연약할 척추에는
고통을 주기 충분한 타격이었기 때문이었다.

경사 위쪽을 바라보는 자세가 되니 저 멀리 대자로 누워있는 친구의 모습이 보였다.
내가 좀 더 내려왔다는 알 수 없는 승리감과 함께 저새기도 나를 구하러 올 수는 없겠구나 하는 좌절감이 들었다.



신앙심 같은 건 급똥이 찾아왔을 때나 느껴지는 줄 알았다.
난생 처음 온 스키장 구석에 처박혀 코브라 자세를 하고 있는 자세에서 기도를 하게될 줄 몰랐다.

나는 얼마나 오랜 시간동안 이 설원에 갇혀있어야 할까.
어쩌면 죽을지도 모르겠다.
아니지 눈이라도 먹고 배가 정말 고프면 여기 이름 모를 풀을 뜯어먹을 수도 있을 것이다.
생존은 생각보다 쉬울 것 같았으나 어찌되었든 괴롭게 살아가야겠지.

싸구려 보드복에서 풍기는 곰팡내 사이로 한기가 스며들었다.
하도 오래 눈에 파묻혀있다보니 제 기본적인 기능도 잃어버린 모양이다.
친구는 기운이 좀 남아있는지 발버둥을 치다가 보드를 공중으로 한 바퀴 크게 돌리며 옆으로 돌았다.
그도 나와 같은 코브라 한 마리가 되었다.

그의 이름을 크게 한 번 불러보았다.
대화라도 된다면 이 지독한 외로움을 견딜 수 있을까 싶어서였다.
그러나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안내방송이 나오기 시작했다.
이미 설원에 조난당한 내 귀에는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연약한 허리로 코브라 자세를 버티기란 쉽지 않았다.
좀 더 차갑지 않은 흙 바닥 쪽에 스키장갑을 낀 손을 포개어 볼을 대고 최대한 편안한 자세를 찾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내 이상적인 자세를 찾은 나는 잠깐 졸았다.

눈을 떴을 때 누군가 나를 부르고 있었다.
어떤 사람들이 제트스키 같은 것 타고 와서는 한심하다는 눈으로 내려다보고 있었다.



처음 든 생각은 보드따위가 아니라 저딴 걸 빌려 탔어야 했다는 빌어먹을 생각과,
그 다음으로 몰려오는 생각은 부끄러움이었다.

인간의 잠재력이 언제 폭발한다고 생각하는가.
목숨이 위태로워질 때가 아니다.
바로 쪽팔림을 느낄 때이다.

한심하다는 눈초리로 스키장에서 자다 일어난 나를 내려다보는 구조요원이 마이크에 대고 말했다.
'여기서 주무시면 안 됩니다!'

나는 차마 보드를 처음 타봐서 이렇게 되엇다는 말을 못하고 우물쭈물 무릎을 꿇고 잃어났다.
'빨리 내려가세요!'

나는 머릿속으로 엄청나게 많은 변명을 생각하다가 마지막으로 한 번 더 보드를 풀어보자는 생각에 보드쪽으로 손을 가져다 댔다.
어찌할 줄 모르는 손으로 마구 보드화를 더듬자 빨리 벗으라고 채근하는 구조요원의 목소리와 동시에 딸깍, 하고 보드가 풀렸다.

나는 순간 울뻔했다.
여기서 영원히 살 줄 알았는게 이게 이렇게 쉽게 풀리는 거였다니.
나는 어금니를 꽉 깨물고 흐느낌을 참으며 보드를 풀었고 구조요원을 뒤로한채 저벅저벅 스키장을 내려갔다.

내려가다가 문득 친구가 생각났다.
돌아보니 경사를 올라간 제트스키에서 구조요원이 내려 친구를 싣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내 옆을 지나 내려가는 제트스키에서 그녀석과 눈이 마주쳤다.
붉어진 눈시울이 보인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그렇게 우리는 내려가서 우동 한 그릇을 먹으며 서로의 생존에 대해 안도해하며
반나절 동안 우리를 집어삼켰던 설원의 광경과, 그 위에서 자유롭게 노니는 사람들을 보며 다시한 번 생명의 소중함을 느꼈다.
출처 친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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