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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부로 알고 있다며 나대지 말아야겠다' 고 생각한 순간(역개루 펌)
게시물ID : history_18257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토츠카
추천 : 17
조회수 : 1850회
댓글수 : 12개
등록시간 : 2014/10/05 10:24:22
에 한번 똑같은 내용으로 언급한 적이 있긴 있었던것 같지만……



역사라는 분야에 대한 사회적인 인식을 가끔 보면, 사회에서 이것을 중요하게 여기는것과는 별개로 과연 이것을 학문으로 대하는것인가, 하는 생각이 들 경우가 있습니다. 이를테면 소위 '인격 도야'를 위해 물리를 공부해야 한다거나 하지는 않지만 역사는 다르니까요. 사람들마다 역사 공부는 정말 중요하다고 말하고 역사 공부에 힘을 쓰지 않는것을 죽을 죄를 지은 대역죄인 처럼 비분강개해서 말하는 경우는 많지만 이렇게 말하는것을 보다보면 역사라는 분야를 '학문' 으로 대한다기 보다는 뭔가 좀 다른 느낌이 들때가 많습니다.


하지만 말할 것도 없이 역사도 학문입니다. 비분강개한 목소리와 감정적 해석 대신 정교하고 사고의 틀을 한번 더 넒혀야 하고 소위 인터넷에서 흥미거리로 올라오는 떡밥류와는 거의 연관 없는 자료들을 분석하는 작업들이 있습니다.


역사도 무슨 인격 도야를 위해 필요한 무슨 뭐시기 한 그런게 아니라, 정말 물리나 다른 무엇처럼 학문이다...라는 느낌을 받으려고 한다면 물론(너무나 당연한 소리지만)역사를 학문적으로 연구하는 연구자들의 글을 읽으면 될 일이긴 합니다.


개인적으로 그런 연구자들 이야기 중에 인상 깊은 일화가 있습니다.






서울대 김호동 교수는 국내의 중앙 아시아 사 - 유목 세계 관련 분야에서는 아주 유명한 분이고 제일 유명한 분입니다. 뭐 굳이 여기서 김호동 교수 이력 이야기를 언급할 필요조차 없을테고……


유목사라는게 어떤 한 국가나 객체만 중점적으로 보는것이 아니다보니 여러가지 언어 소화 능력이 필요한데, 알려지기로는 이 분의 경우는 10개 이상 국어를 하시는 분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런데 이 분이 하버드에서 공부할 당시에, 지도 교수 였던 분으로 플레쳐 교수라는 분이 있었습니다.





Joseph Francis Fletcher, Jr 1934 - 1984



이 플레쳐 교수의 학문적 성과에서 주목할 만한 부분은 청사, 즉 청나라 역사의 연구의 방향에서 '구청사' 가 '신청사' 로 나아가는데 물줄기를 열어준 사람 중에 한명이라는 부분 입니다. 구청사와 신청사 사이의 차이를 한가지로 잘라 말하긴 그렇지만, 짦게 말하자면 청나라를 전통 중국 왕조 중에 하나로 보는 시각에서 벗어난 독자적인 만주 왕조의 개념을 찾아보는, 그런 부분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여하간 이 교수와 김호동 교수가 처음 만났을 때의 일입니다. 당시에 김호동 교수도 이미 서너 개의 국어를 사용할 줄 아는 상태였는데, 김호동 교수가 중앙 아시아사를 공부한다고 하니 플레쳐 교수가 대뜸 이랬다고 합니다.


"일단 러시아어를 배워보지?"


그 말에 김호동 교수는 바로 러시아어를 배웠습니다. 어느정도 러시아어를 소화할만 해지자, 플레쳐 교수는 다시 이러는 겁니다.


"그렇다면 이제 페르시아어를 배워보게."


그 말을 듣고 김호동 교수는 페르시아어를 배웠습니다. 페르시아어를 소화 가능해지자 이번에는 이렇게 말합니다.


"몽골어를 배워야 하지 않겠나."


그 다음은?


"터키어."


그것도 배우고 나자?


"위구르어."


이렇게 계속해서 끝없이 한 국가와 종족의 언어 습득을 리포트 하나 내주듯이 내주는데, 김호동 교수도 지시에 따라서 이를 배웠습니다. 


플레쳐 교수가 다양한 언어의 습득을 요구한것은, 중앙 아시아 역사란 대단히 다채롭고 복잡하며 독특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플레쳐 교수는 몇개 언어를 사용할 수 있었을까? 김호동 교수 말로는 모국어인 영어 뺴고도 14개 국어를 사용했다고 합니다. 즉 15개 언어 사용자인데, 대학에 들어오기 전에 독일어, 프랑스어, 라틴어, 그리스어를 배웠고, 대학에 들어온 뒤에는 러시아어, 중국어, 일본어, 몽골어, 만주어, 티베트어, 아랍어, 그리고 고대 - 중세 - 현대 튀르크어를 배웠습니다. 



어째서 그렇게 언어를 배우는데 열심이었을까? 언어 자체를 배우려는 행위가 이유가 아니라, 오직 연구에 도움이 되기 위해서 입니다.


앞서 플레쳐 교수가 구청사에서 신청사로 나아가는데 큰 역할을 했다고 말한 바 있습니다. 플레쳐 교수가 이 과정에서 한 역할은, 바로 '만주어' 의 학습 필요성에 대한 지적 입니다. 지금 기준이라면 무언가 이해가 잘 안될 수 있어도, 당장 몇십년 전만 해도 서양권의 청사 연구자들 중 거의 대부분은 '청나라 역사를 연구하는데 굳이 만주어를 배울 필요는 없다' 는 기조 였습니다. 이건 단순히 천체 망원경이 있으니 돋보기가 필요없다는 식의 인식이 아니라 청나라에 대해 바라보는 시각과도 연결되어 있는데, 전설적인 페어뱅크 교수와 그 영향력 아래서 늦어도 19세기 말까지 중국 내 모든 만주족은 동화, 혹은 페어뱅크의 표현대로 “漢化(“sinicized” 혹은 “sinified”)되었다는게 일반적인 시각이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만주어 연구가 시작되면서 만주족의 독자적인 면모가 여러가지 연구 성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그런데 웃기게도, 플레쳐 교수의 주된 연구에서 청나라는 그렇게 중요한 부분이 아니었습니다. 수당시대 중국사 연구자에게 1920년대 군벌 항쟁기의 중국 판도가 그렇게 중요한 영역이 아니듯 말입니다. 플레쳐 교수의 연구에서 청나라가 가장 큰 의미를 가지는 부분은 몽고와 투르키스탄 정복 부분이었는데, 그 부분의 연구를 위하여 만주어라는 그동안 학계에서도 사장되어 있던 하나의 언어를 배우고 중요성을 설파했던 겁니다. 플레쳐 교수는 이를 위해 대만에 거주하는 시보족 역사가 광록(廣祿)이라는 인물을 찾아가서 만주어를 배웠습니다.



플레쳐 교수가 사용하던 언어 중에는 아랍어도 있는데, 교수가 늦게 아랍어를 배우게 된 경위는 다음과 같습니다. 중앙 아시아사를 연구하던 플레쳐 교수는 문득 마명심(馬明心)이라는 인물의 생에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습니다. 마명심은 청나라 건륭 시기 감숙, 청해 지방의 이슬람 계통 종교 지도자 입니다. 그리고 플레쳐 교수는 이 사람의 생에를 연구하기 위한 목적 하나로 아랍어를 배웠습니다.  


그 후, 아랍어 능력이 생긴 플레쳐 교수는 수 많은 아랍어 자료를 뒤졌는데, 미국에서 구할 수 있는 문헌은 물론이고 현지에서도 수 많은 자료를 뒤졌습니다. 그리고 1977년 6월 9일, 북예멘의 자비드라는 곳에서 마명심을 비롯한 중국 출신의 무슬림들이 그 곳의 한 교단에서 수학했음을 보여 주는 자료를 발견했습니다. 한 인물의 생에를 알기 위해 한 언어를 배우고, 사료 발굴을 해서 사장되고 잊혀진 자료를 세상에 다시 내놓았던 겁니다.


김호동 교수가 플레쳐 교수의 집에 간 적이 있는데, 이때에 대해서는 이렇게 회고 했습니다.


"나는 논문지도를 받는 도중에 언젠가 그의 집을 방문했다가 개인 서재를 볼 기회가 있었다. 한 20평은 됨직한 넓은 지하실 전체를 서재로 쓰고 있었는데, 온 사방이 책으로 빽뺵했다. 그 중에는 우리도 갖기 힘든 한문 서적들도 많았다. 고급 나무로 짠 함 속에 들어있는 중국 이십이사는 물론이고, 청나라 떄 편찬된 선장본 자료들도 즐비했다. 가운데에는 커다란 책상 세 개가 이곳 저곳에 놓여 있고, 그 위에는 책과 서류로 원고들이 어지럽게 쌓여 있었다. 책상이 왜 여러 개냐고 물었더니 각각 동시에 다른 작업을 하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런 교수가 사망할 당시, 교수가 작성하던 원고의 상당수는 아직 완성이 되지 않는 상태였습니다. 그 자료가 꽤나 많았음에도 불구하고 모든 미완의 원고를 태워버라고 지시했는데, 완벽한 상태가 아닌 연구를 감히 세상에 꺼내놓아서는 안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이는 플레쳐 교수의 스승이자 미국내 중국사 연구자 중에서는 거의 전설적 인물인 페어뱅크 교수가 직접 설득해서 간신히 만류하는데 성공했고, 교수의 타계한 뒤에 여러 원고가 세상에 나왔습니다. 게중에 몽골 제국의 탄생에 관한 글은 그 분야의 백미라고 합니다.







이 일화를 접하고 나서는, 너무나 친숙하게 느껴지고 수 많은 사람들이 여러가지 이유로 무슨 '양심' 이나 '당연히 갖추어야할 상식' 정도로 치부되어서 종종 학문이라는 사실이 실감이 가끔 안나는 역사라는게, 정말 '학문' 이다라는 생각이 절로 들더군요. 


그리고 무엇보다 부족한 지식으로 마치 다 안다며 함부로 얄팍하게 단언하여 말하는것이 얼마나 위험천만한 일인지 실감이 나고 말입니다. 굳이 무슨 언어 능력에 대한 부분을 떠나서, 전문분야의 무엇을 위해 그렇게 진지하게, 말하자면 인생을 바칠 정도로 진지하게 다가가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냥 넷상에서 끼적거리며 안다는 듯이 댓글 상에서 깝치는게 얼마나 위험할 지 싶기도 합니다. 


특히나 비전공자인 저 같은 경우에는 책 몇개 주워 들고 글 쓰는게 요즘에는 두려워지기 까지 했습니다. 너무나 무책임한게 아닐까 싶기도 해서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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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역개루, 신불해님 글



저도 지난 학기때 배철현 교수님의 강의를 들은 적이 있었는데 수메르어, 히브리어, 그리스어, 라틴어, 아카드어 여러 언어를 넘나들면서 강의를 하셔서 놀랐지요. 영어 하나만 가지고도 쩔쩔매는 공대생으로서는 상상도 못할 노력이 필요한 분야가 역사가 아닌가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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