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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세자와 관련된 그외의 기록
게시물ID : history_18159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시끄러운세상
추천 : 4
조회수 : 1731회
댓글수 : 0개
등록시간 : 2014/09/24 22:41:52
요즘 비밀의 문이 방영되는 바람에 이에 대해 말이 많아서 가입하자마자 글을 계속 올리게 되었습니다. 한중록은 주관적인 기록이라고 워낙에 공격(?)을 많이 받는 자료라 보조자료로 활용만 하고 다른 자료들을 중심으로 해서 글을 쓰겠습니다.

일단 현재 비밀의 문도 왜곡이 많은건 사실입니다.

사도세자의 나이 20세 무렵을 다루고 있으니 아직까지 별다른 왜곡이 없다고 하는데 그것은 틀린 말입니다. 가장 잘못된 것이 김택이라는 가상의 노론 영수입니다. 경종 독살설이고 택군이고 간에 그런걸 감안하고 보더라도 당시에는 이미 영조를 꺾을 수 있을만한 노론의 영수가 없었습니다. 삼정승은 영조가 마음대로 갈아치웠고 당론의 당자만 꺼내도 영조에게 호통을 받기 일수였습니다. 물론 당쟁이나 권력투쟁이 아예 없었던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영조를 압박할만한 영수 자체가 없었습니다. 그러니 김택이라는 영수가 살아서 영조를 압박하고 있는 상황부터 왜곡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능행 역시 왜곡입니다.


15115306750_60200010.jpg


(아래 내용은 다른 편지에 적힌 것입니다. 위 사진에 있는 편지의 내용은 아닙니다. )

大抵余年今已過十五 之春久矣 一未能展拜明陵

"내가 이미 15살인데 아직 한 번도 숙종대왕의 능에 참배하지 못했습니다."

한중록에서도 능행을 따라가지 못해서 세자가 속상해했다는 구절이 있는데 사도세자가 직접 이렇게 편지로 남겨놓았습니다.
이것만 보아도 이미 15세 이후부터 아버지와의 관계가 좋지 못함을 알 수 있습니다.(정상적인 세자라면 능행을 따라가고도 남았을테니까요.)

사도세자가 능행을 처음으로 가게 된 것은 그의 나이 22세때 일입니다.

영조 88권, 32년(1756 병자 / 청 건륭(乾隆) 21년) 8월 1일(정유) 1번째기사
명릉에 거둥한 후 익릉·경릉·창릉·순회묘를 배알하다    
임금이 명릉(明陵)에 거둥하였는데, 왕세자가 어가를 따랐다. 이때 연일 비가 내려 대신과 여러 신하들이 물려 행할 것을 청하기까지 하였으나, 궁을 나설 때가 되자 날씨가 시원하게 갰다.

어째서 이 때 처음으로 능행을 가게 된 것이냐고 확신하냐 하시겠는데, 

영조 88권, 32년(1756 병자 / 청 건륭(乾隆) 21년) 8월 7일(계묘) 1번째기사
설서 이휘중이 원릉의 어가를 수행한 일에 대해 상서하다    
설서 이휘중(李徽中)이 상서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이번에 저하께서 원릉(園陵)의 어가를 수행하신 것은 진실로 정례(情禮)를 한번 펴는 데서 나온 것이나, 이는 곧 저하께서 처음으로 기전(畿甸)에 출행(出行)하신 것이기도 합니다. 성인의 목격하고 도를 보존하는 뜻에 있어서, 산과 내를 보고서 산이 되고 웅덩이를 가득 채우는 공력을 생각하고, 성지(城池)와 농사일을 보고서 방어를 굳게 할 방도를 생각하여 먹고사는 일의 어려움을 걱정하신다면, 접촉하는 사물마다 미루어 아는 것도 또한 지극한 이치가 있는 것이니 강마(講磨)하는 공부와, 사물의 이치를 궁구하는 도리가 오로지 문자에만 있는 것은 아닌 것입니다.”
하니, 왕세자가 깊이 유념하겠다고 답하였다.


이 상소를 보시면 알 수 있습니다.
기전은 경기도 일대를 말하는 것으로 이휘중의 상소는 세자가 처음으로 경기도에 출행을 했다는 것을 증명해주고 있습니다. 
예전에 사도세자가 능행을 따라간 적이 있었다면 처음으로 경기도에 출행을 갔다고 말하지 않았겠지요.

따라서 드라마에서 20세의 사도세자가 능행을 따라간 것은 왜곡이라 할 수 있습니다.

사도세자와 영조의 사이가 을해옥사 전까지 좋았다는 설정이기 때문에 이렇게 그린 것 같습니다만 사도세자와 영조는 이처럼 20세 무렵에 이미 그 갈등이 깊었습니다.

게다가 당시 사도세자는 이미 심각한 우울증을 앓고 있었습니다.

"겨우 먹고 잘 뿐, 허황되고 미친 듯하다"

入侍罷火盛鬱極 悶煩若狂
"임금을 뵙고 나오니 열은 높고 우울증은 극에 달해 답답하기가 미칠 듯합니다."

"나는 본디 남모르는 울화의 증세가 있는데다, 이런 증세는 의관과 더불어 말할 수 없습니다. 약을 지어 남몰래 보내주면 어떻겠습니까”"

1753~1754년에 걸쳐 사도세자가 홍봉한에게 보낸 편지의 한 구절입니다.

아버지를 뵈면 열이 높아지고 우울증이 극에 달해 답답하다고 호소하고 있으며 울화병이 있으니 약을 지어 달라고 장인에게 부탁하고 있습니다.
비밀의 문의 배경은 1754년, 영조 재위 30년입니다. 
그런데 실제의 사도세자는 이와 같이 아버지때문에 압박을 받아 우울증이 극심해져서 약을 먹을 정도에 이른 상황이었습니다. 
드라마가 실제와 비슷하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죠.

사도세자가 친필로 직접 쓴 편지인만큼 거짓말로 볼 수는 없을겁니다. 
그리고 그는 2년후에는 장인에게  “한 가지 병이 깊어 나을 기약이 없으니, 민망해할 따름입니다” 하고 편지를 보내기도 하였고, 약을 구해도 차도가 없다고 호소하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사도세자는 이미 예전부터 우울증때문인지 아니면 아버지의 압박때문에 반항심이 생겨서인지 몰라도 공부를 멀리하였습니다. 
공부를 한다고 해도 그저 듣기만 할 뿐 적극적으로 할 생각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신료들이 그것을 걱정하는 상소를 올리기도 하였습니다.

영조 82권, 30년(1754 갑술 / 청 건륭(乾隆) 19년) 9월 15일(신묘) 2번째기사
영의정 이천보가 성심으로 자문하고 정사를 돌보기를 아뢰다    

영의정 이천보(李天輔)가 차자를 올렸는데, 대략 이르기를,
“우리 저하께서는 성품이 드레지고 말이 적은 것이 너무 지나쳐서 서연(書筵)에서 강독할 때에 청수(聽受)는 있으나 문난(問難)이 없으시니, 거의 겉치레로 채우고 마는 것 같습니다. 대저 말이 적은 것은 사람의 미덕이 되지 않는 것이 아닙니다마는, 치우치게 말이 없으면 또한 병통이 되지 않는 것이 아닙니다. 저하께서는 총명을 타고나셔서 경전(經傳)의 의리의 근원과 역대의 치란(治亂)의 자취를 번거롭게 강독하지 않더라도 소상하게 이해하실 수 있겠지만, 또한 어찌 의심스러워 막히는 부분과 이해하지 못하여 표현하지 못하는 단서가 없겠습니까? 안연(顔淵)은 아성(亞聖)인데, 지식이 많은 사람으로서 지식이 적은 사람에게 묻고 재능이 있는 사람으로서 재능이 없는 사람에게 물었습니다. 더구나 의심스러워 막히는 부분이 있어도 캐묻지 않고 이해하지 못하여 표현하지 못하는 단서가 있어도 계발(啓發)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덕을 진취시키고 학업을 닦겠습니까? 정사(政事)에 이르러서는 대조(大朝)께서는 그 강령(綱領)을 통괄하시고 저하께서 그 조목(條目)을 맡으셨으므로, 모든 법문(法門)·제도의 종핵(綜核)과 전곡(錢穀)·갑병(甲兵)의 호번(浩繁)한 것과 팔방의 문장(文狀)과 백사(百司)의 직무가 모두 저하의 한 몸에서 재품(裁稟)되지 않는 것이 없는데, 저하께서 대리하신 지 오래 되지 않았으니, 어찌 낱낱이 두루 알고 환히 살피실 수 있겠습니까? 성심으로 자문하고 부지런히 힘쓰시되, 이미 알고 있는 것은 훤히 깨달아 익숙해질 수 있게 하고 미처 모르는 것은 환히 이해할 수 있게 함으로써 이것을 정령(政令)과 사업에 조치하여 자세히 널리 통달하여 각각 극진한 데에 이르러야 진실로 마땅할 것입니다. 신이 5일의 빈대(賓對)를 보건대, 뭇 신하들이 일을 아뢰었을 때에 한 번도 상의하여 확정한 답을 받지 못하고 다만 관례에 따라 분부를 받고 물러 갔습니다. 아! 저하께서 더불어 나라의 일을 다스리기를 도모하는 자는 묘당의 여러 신하들인데, 저하께서는 엄연히 연대(筵對)하여 예경(禮敬)만 보일 뿐이고 더불어 마음을 열고 묻지 않으시니, 정사의 도리를 깊이 강구하는 실속이 어찌 있을 수 있겠습니까? 이렇게 하여 마지 않으신다면, 저하께서 혹 기무(機務)에 유궐(遺闕)하는 바가 있을 뿐만 아니라, 신하들의 지우(智愚)·장단(長短)을 저하께서는 또 무엇을 연유하여 다 살피시겠습니까? 그런데도 놀며 세월을 보내는 데 일임하여 백관이 퇴폐하게 하시겠습니까? 신은 민망스럽게 여깁니다.”
하였는데, 답하기를,
“근심하고 사랑하여 면계(勉戒)를 아뢰니, 명심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하였다.

이 상소문은 강학을 할 때 사도세자가 그저 묵묵히 듣기만 하고 묻지도 않고 토론도 하지 않으니 좀 더 적극적으로 공부에 임할 것을 권하고 있습니다.리고 정무를 볼 때도 관례에 따라 대답만 할뿐 진심으로 상의를 하지 않으니 정사를 성심으로 돌볼 것을 청하고 있습니다. 

상소를 올린 이천보는 노론의 동당계열에 속하는 사람입니다. 

그렇다면 노론인 이천보가 사도세자를 압박하기 위해 하는 말이 아닌가, 하는 의문이 있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천보는 사도세자의 평양행을 감싸다가 자결했다는 소문이 떠돌만큼 사도세자를 보호하려 했던 인물로 손꼽힙니다. 물론 그 소문은 낭설입니다. 이천보는 1월에 죽었고 사도세자는 4월에 평양행을 감행했기 때문입니다. 이천보는 당시 병사로 보입니다. 하지만 고종때 사도세자가 추존되면서 이천보 역시 사도세자를 보호하려다 자살하였다는 사실을 인정받아 영구히 나라에서 제사를 지내주기로 결정하였습니다. 실제로는 자결이 아니더라도 당대에도 그런 소문이 돌았고 후대에까지 알려진 것으로 보아 그만큼 사도세자를 보호했다고 널리 알려진 대표적인 인물이라는 뜻이 되겠지요. 따라서 그의 상소문 역시 세자에게 진심으로 올리는 충고라 할 수 있습니다.


또 박필균이라는 자는 이런 상소를 올렸습니다.

영조 81권, 30년(1754 갑술 / 청 건륭(乾隆) 19년) 4월 3일(임오) 1번째기사
대사간 박필균이 언로의 개폐에 관해 상서하다    
대사간 박필균(朴弼均)이 상서하기를,
“저하(邸下)께서 자주 강관(講官)을 만나 경사(經史)를 토론하시므로 예학(睿學)이 날로 진취합니다마는, 한 번 서연(書筵)을 파하면 좌우에 환관(宦官)·궁첩(宮妾)이 있을 뿐이니, 보시는 것이 어떤 글이며 들으시는 것이 어떤 말인지 모르겠습니다. 바로 이른바 어진 사대부(士大夫)를 만날 때는 적고 환관·궁첩을 가까이할 때는 많다는 것이니, 어떻게 학문을 진취시키고 덕을 닦겠습니까? ~~~"

서연을 하지 않으면 환관과 궁첩하고 어울린다는 이야기로 볼 수 있습니다.

그 외에도 세자에게 학문에 힘쓰고 서연을 열심히 하라는 이야기들이 실록에 많이 남아 있습니다.

심지어 영조조차 이렇게 말했습니다.

영조 81권, 30년(1754 갑술 / 청 건륭(乾隆) 19년) 5월 9일(정해) 1번째기사
숭문당에서 소대하여 관저장을 강하게 하다

임금이 춘방관 이수봉(李壽鳳) 등을 불러 묻기를,
“동궁(東宮)의 강학(講學)에는 요즈음 진취하는 보람이 있는가?”
하자, 대답하기를,
“예학(睿學)이 고명(高明)하여 때때로 혹 묻는 것은 다 뜻이 깊은 말입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동궁이 매우 오래 서연(書筵)을 멈춘 것을 내가 매우 민망히 여겼었는데, 일전에 내가 꾸짖어 가르쳤더니 동궁이 자못 뉘우치는 뜻이 있었다. 그대들이 보도(輔導)하는 도리로서는 본디 서연에 임하여 권강(勸講)하고 일에 따라 규면(規勉)해야 한다. 오늘 그대들이 주달한 것은 내가 듣고 싶은 것이 아니다.”
하였다.

서연을 오래 멈추었다는 이야기가 있지요.

이처럼 세자는 이미 20살무렵에 학문을 멀리하는 것이 문제가 되었던 인물입니다.


그리고 다음해인 1755년에는 드디어 병증이 겉으로 드러나게 됩니다.

 영조 84권, 31년(1755 을해 / 청 건륭(乾隆) 20년) 4월 28일(신미) 2번째기사
약방 도제조 이천보가 동궁에게 가미이진탕을 조제했음을 말하다    
임금이 약방의 입진을 명하였다. 도제조 이천보(李天輔)가 말하기를,
“삼가 의관의 말을 듣건대, 동궁이 근래에 가슴이 막히고 뛰는 증후(症候)가 있어 발자국 소리만 들어도 이런 증세가 일어난다고 합니다. 의관이 대조(大朝)께 품하여 고할 것을 청하였더니, 우선은 앙달하지 말고 탕제를 먼저 조제해 들이라고 하교하셨기 때문에 온담탕(溫膽湯) 20첩으로 의논해 정했습니다. 그러나 이미 증세를 대조께 우러러 아뢰지 않고 갑자기 약명(藥名)을 써서 아뢰면 관계된 바가 어떻겠습니까? 그래서 이름을 고쳐 가미이진탕(加味二陳湯)으로 조제해 드렸다고 합니다. 대개 동궁께서 약을 드시려면 반드시 대조께 진달한 후에 비로소 조제해 올려야 하나 온담탕은 바로 문호(門戶)의 약이기 때문에 심상하게 드시는 이진탕으로 바꾼 것이니, 사세는 비록 부득이하나 끝내 미안합니다.”


온담탕
기(氣)가 울체되어 담연(痰涎)이 생겨 밤에 잠을 잘 못자고 꿈을 많이 꾸며 잘 놀라고 가슴이 두근거리며 항상 불안한 것을 치료하는 처방임
심(心)과 담(膽)이 허약하고 겁이 많아 사소한 일에도 놀라고 꿈자리가 사나우며, 잠을 자지 못하는 것을 치료하는 처방임
[네이버 지식백과] 온담탕 (용어해설)

이처럼 사도세자의 병이 무엇이었는지는 온담탕을 처방한 것을 보면 짐작할 수 있습니다. 

사도세자는 아버지에게 이미 너무 큰 압박을 받아서 발자국 소리만 들어도 깜짝 깜짝 놀라고 불안해서 잠도 제대로 자지 못하는 상태였던 겁니다. 이런 상태의 세자가 아버지와 노론에게 맞서서 정치적인 저항을 했을까요? 그리고 이런 상태의 세자가 과연 정무를 제대로 보았다 할 수 있을까요? 무엇보다 영조 실록에는 세자의 병에 대해서 아무런 말이 없고 멀쩡하게 대리청정을 했다고 하는 항간의 이야기들이 과연 맞는 말일까요? 이미 세자가 이처럼 병에 시달렸다는 명백한 사실이 적혀 있는데 말입니다. 그것도 죽기 7년전부터요.


그리고 오유에 올라온 글들을 읽다보니 서프라이즈에서 다루었던 사도세자의 묘지문에 대해서도 오해가 많다는걸 발견했습니다. 서프라이즈는 묘지문의 일부분만 떼어내어 전혀 다른 이야기를 만들어낸 것입니다. 실제로 묘지문은 그런 내용이 아닙니다.

다음의 묘지문의 원문을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사도세자묘지문 - 영조   금석문 / photolog  
2012/10/22 14:27
복사http://blog.naver.com/sohoja/50152974718 (출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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御製誌文                                            어제 묘지문
有明朝鮮國思悼世子墓誌                      유명 조선국 사도세자 묘지
思悼世子諱愃字允寬臨御十一年歲         사도세자 휘는 선이요. 자는 윤관이라 재위11년
乙卯正月二十一日誕生卽暎嬪所誕         을묘년(1735년) 정월 21일 탄생했는데 영빈이 낳았다.
也生而穎悟及其長也文理亦通其有         나면서 남달리 영특했고 자라면서 문리 역시 통해
朝鮮庶幾之望嗚呼不學聖人反學太         거의 조선의 희망이었다. 오호라 성인을 배우지 않고 도리어 태갑을 배워
甲慾敗縱敗之事嗚呼訓諭自省編心         망할 일로 가려고 하니 슬프다. 스스로 깨닫고 마음을 잡기를 가르치고
鑑便作言敎狎昵群小將至國亡噫自         수시로 말했으나 소인배 무리를 가까이해 장차 나라를 망칠 지경이었다. 오호 
 
古無道之君何限而於世子時若此者         자고로 무도한 임금이 어찌 없다 하리오만 세자 시절에 이런 자는
予所未聞其本生於豐豫不能攝心流         나 들은 바 없었다. 그 근본은 넉넉하고 좋게 태어났으나 마음을 잡지 못해  
於狂也夙夜所望若太甲之悔悟終至         미치는 데로 흘렀다. 새벽부터 밤까지 태갑의 뉘우침 같은 것을 바랐으나
於萬古所無之事使白首之父作萬古          마침내 만고에 없는 일에까지 가서 머리 센 아버지가 만고에 없는 일을   
所無之事乎嗚呼所惜者其姿所歎者          저지르도록 했구나. 오호라 애석한 것이 그 자태요. 한탄스러운 것이 
述編嗚呼是誰之愆卽予不能敎導之         이 적는 글이다. 슬프다 이 누구의 잘못이란 말인가? 내 그를 옳게 가르칠 수
致於爾何有嗚呼十三日之事豈予樂         없어 이런 일까지 이르니 어찌 하리오. 슬프다 13일의 일은 어찌 내가 즐거워서
爲豈予樂爲爾若早歸豈有此諡講書         했으리오. 즐거워서 했으리오. 너 만약 일찍 돌아왔다면 어찌 이런 시호 있으리.
院多日相守者何爲 宗社也爲斯民            세손 강서원에서 여러날 서로 지키는 것이 어찌 종사를 위하며 백성을 위한
也思之此良及欲無聞逮至九日聞不          것 아닐까. 이것이 잘되기를 바라고 소식 없기를 바랬는데 9일만에 숨길 수 
諱之報爾何心使七十其父遭此境乎           없는 소식을 듣게 되었다. 너는 어찌 칠십 애비가 이런 지경에 이르도록 했느냐
至此不忍呼寫歲玄黓敦牂月夏五閏           이에 이르니 참지 못하노라. 해를 적으면 임오년이오 여름 윤오월하고
而卽二十一日也乃復舊號特賜諡曰          이십 일일이라. 이에 도로 호를 회복하고 특별히 시호를 내리니
思悼嗚呼近三十年爲父之恩義伸于          사도라. 슬프다. 근 30년 아비로 은의를 베푼다는 것이 이것에 불과하구나.  
此矣此豈爲爾嗚呼辛丑血脈之 敎             이것이 모두 너를 위한 것이구나. 슬프다 신축년 혈맥의 가르침에
今只有世孫寔爲 宗國之意也七月             다만 세손 식(정조)이 나라를 받들어라는 뜻이 있구나. 7월
 
二十三日葬于楊州中浪浦酉向原嗚          23일 양주 중랑포 유향(서쪽) 들판에 장사지냈다. 슬프다 
呼無他施惠賜嬪號曰惠嬪於斯盡矣          다른 시혜없이 세자빈의 호를 혜로 내려주었다. 이것이 빈에게는 전부였다. 
此非詞臣代撰者故臥而呼寫表予三          이것은 신하에게 대신 짓게 한 것이 아니다. 누워 불러서 내뜻을 옮겼다.
十年之義嗚呼思悼將此文而無憾于          삼심년의 의리다. 슬프다 사도여. 이에 글지으니 나에게 원한 품지 말아라  
予矣壬戌入學癸亥行冠禮甲子行嘉          임술년(1742) 입학하고 계해년(1743) 관례를 하고 갑자년(1744) 가례를 하는데
禮娶豐山洪氏卽領議政鳳漢之女永          풍산홍씨를 취했는데 영의정 봉한의 여식이었다.
安尉柱元五代孫嬪誕二男二女一懿          영안위 주원의 5대손이다. 빈은 2남 2녀를 낳았는데 하나는 의소세손이고
 昭世孫一則世孫嘉禮于淸風金氏卽         하나는 현재 세손이라 가례는 청풍김씨 즉 
  
參判時默女府院君五代孫也長女淸          참판 시묵의 딸과 했다. 부원군의 5대손이다. 장녀는 청연군주이고
衍郡主次女淸璿郡主側室亦有三男          차녀는 청선군주이다. 측실 역시 3남
一女矣                                                1녀다.
崇禎紀元後百三十五年壬午七月 日         숭정기원후 135년(1762년) 임오 칠월  일
 

물론 중간의 구절을 보면 잘되기를 바라고 소식 없기를 바랬는데 9일만에 숨길 수 없는 소식을 듣게 되었다고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저 부분은 이렇게 해석도 가능합니다.

"강서원에서 그 여러 날 너를 지킨 이유는 무엇이었겠느냐. 종묘사직을 위한 것이고, 이 나라 백성들을 위한 것이었다. 생각이 여기에 이르자 참으로 아무것도 듣고 싶지 않았거늘, 아흐레째 되던 날 피치 못할 보고를 들었도다. 너는 무슨 마음으로 일흔 살 먹은 지 애비를 이런 지경에 처하게 한다는 말이냐.[講書院多日相守者何 爲宗社也, 爲斯民也. 思之及此, 良欲無聞, 逮至九日, 聞不諱之報. 爾何心使七十其父遭此境乎]"

즉 잘되기를 바라고 소식없기를 바랐다는 것이 오역이고 아무것도 듣고 싶지 않았는데 라고 해석하는 것이 맞다는 의견입니다.

후자쪽이 아무래도 매끄러운 해석이 아닐까 합니다만, 전자라 하더라도 영조가 사도세자를 죽이려는 마음이 없었는데 죽였다는 이야기로 볼 순 없습니다. 묘지문 앞부분에 이미 너처럼 세자시절에 무도한 자는 없었다고 말하고 있고 소인배를 가까이하여 나라를 망칠 지경에 이르렀다고 말하고 있으니까요. 따라서 묘지문에서 너 죽으라고 내가 그랬다는 말을 할 수는 없으니 저런 식으로 돌려서 말을 한 것이 아닐까 합니다.

어쨌든 묘지문의 원문을 보시면 영조가 사도세자를 죽인 것을 후회하거나 실수로 한 일이 아니라 자신의 행위를 합리화하고 있는 뉘앙스인건 확실합니다. 

그리고 이처럼 한중록이 아닌 기록을 뒤져봐도 사도세자는 아버지와의 성격적 갈등때문에 우울증을 오랫동안 앓았고 그 우울증때문인지 많은 잘못을 저질러 훗날에는 더이상 세자의 지위를 수행하기 어려운 상태가 되었습니다. 영조가 사도세자를 처분하기로 결심한 것은 사도세자가 더이상 어떻게 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잘못을 저질렀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다행히도 영조의 마음에 쏙드는 후계자인 정조가 잘 자라고 있어서 사도세자를 대체할 수 있었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홍봉한은 영조가 그런 결정을 내렸기 때문에 더이상 세자를 보호하지 않고 영조의 뜻에 따라 손자와 자신의 집안이나마 보호하고자 하였던 것입니다.
후에 그 문제로 사위를 버렸다던가 혹은 사위가 살아있을때 잘못을 제대로 간쟁하지 못하게 막고 잘못을 감추는데 급급해서 사위를 망쳤다는 비판을 받게 되었지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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