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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세자가 사람을 죽였다는 기록
게시물ID : history_18145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시끄러운세상
추천 : 12
조회수 : 3397회
댓글수 : 31개
등록시간 : 2014/09/23 19:35:34
영조 99권, 38년(1762 임오 / 청 건륭(乾隆) 27년) 윤5월 13일(을해) 2번째기사 
 
처음에 효장세자가 이미 훙하였는데, 임금에게는 오랫동안 후사가 없다가 세자가 탄생하기에 미쳤다. 천자가 탁월하여 임금이 매우 사랑하였는데, 10여 세 이후에는 점차 학문에 태만하게 되었고, 대리한 후부터 질병이 생겨 천성을 잃었다. 처음에는 대단치 않았기 때문에 신민들이 낫기를 바랐었다.정축년 무인년 이후부터 병의 증세가 심해져서 병이 발작할 때에는 궁비와 환시를 죽이고, 죽인 후에는 문득 후회하곤 하였다.임금이 매양 엄한 하교로 절실하게 책망하니 의구심에서 질병이 더하게 되었다.임금이 경희궁으로 이어하자 두 궁 사이에 서로 막히게 되고 또 환관 기녀와 함께 절도 없이 유희하면서 하루 세 차례 문안을 모두 폐하였으니, 임금의 뜻에 맞지 않았으나 이미 다른 후사가 없었으므로 임금이 매양 종국을 위해 근심하였다. 


실록에 일단 저렇게 몇명인지는 적혀있지 않지만 발작할 때마다 죽였다고 합니다.

그리고 

한중록에 따르면 1757년 여름에 사도세자가 장번내관 김한채를 먼저 죽이고 그 머리를 잘라서 세자궁 사람들에게 보여줬다고 합니다. 일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고 그 후로 여러명을 더 죽였다고 하죠.

그런데 이 사건도 실록에 있습니다.  
  
영조 91권, 34년(1758 무인 / 청 건륭(乾隆) 23년) 3월 6일(임진) 2번째기사 
  
세자는 관의합에 나가 앉아 좌의정, 우의정을 불러 하령하기를, "승지는 글로 쓰라. 근래에 기가 올라가는 증세가 더 심해져서 작년 가을의 사건이 있었는데, 이제 성상께서 하교하신처지에 삼가 감읍함을 견디지 못하겠다. 지나간 일을 뒤따라 생각하니 지나친 허물임을 깊이 알고 스스로 통렬히 뉘우치며 또한 간절히 슬퍼한다. 내관 김한채등에게 해조로 하여금 휼전을 후하게 거행하여 나의 뉘우쳐 깨달은 뜻을 보이라."  라고 합니다.

여기서 한중록이 말한 김한채가 거론됩니다. 그런데 해조에서 휼전을 후하게 거행하라는 것은 죽은 사람에게 장례비용을 내려주어서 후하게 장례를 치뤄주라는 소리입니다. 

그러자 다음 날 영조가 좌의정과 우의정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영조 91권, 34년(1758 무인 / 청 건륭(乾隆) 23년) 3월 7일(계사) 1번째기사 
  
"이제 세자의 하령을 보니 슬프고 가엾음을 어찌 비유하겠는가? 여섯사람에게 판을 주고 베를 주어 해부의 관원으로 하여금 간검하여 매장하게 하며, 그 처자는 후하게 돌보아 주어 자신에 한하여 호역을 면하게 해주라." 

김한채를 포함하여 죽은 사람이 모두 6명이라는 이야기죠. 영조는 세자가 그 일을 후회하고 있으니 죽은 사람 장례를 후하게 치뤄주라고 말합니다.

한중록에서는 1758년 2월 말에 영조가 어디서 소문을 듣고 와 세자에게 그날따라 조용하게 무슨 잘못을 했는지 고하라고 했다 합니다. 그러자 세자가 순순히 김한채 등 6명을 죽인 이야기를 했고 영조가 어째서 그랬냐고 물으니 세자가 화가 나면 사람을 죽이거나 동물을 죽여야 풀린다고, 마음이 상하고 사랑받지 못해 그렇다고 대답했다 합니다. 그러자 영조가 앞으로 너를 사랑해주마 하고 토닥였다고 합니다. 실제로 혜경궁이 거론한 그 날짜의 실록을 살펴보면 영조가 그날 세자를 불러서 따뜻한 말을 해주었다고 되어 있습니다. 

그러고 나서 며칠 후에 김한채를 비롯한 6명의 장례를 치뤄주라는 위와같은 명이 있었죠.

따라서 세자가 김한채외 6인을 죽였다고 직접적으로 적혀 있지는 않지만, 병이 발작하면 내관을 죽였다는 실록의 사관의 글과 당시 사도세자가 자신의 허물이고 기가 승해서 일이 있었는데 6명이 죽었다고 했으니 간접적으로 그 6명을 세자가 죽였다고 인정한 기록으로 봅니다. 그래서 사도세자의 살인을 부정하는 학자는 없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후궁을 죽인 일도 기록이 있습니다.

영조 99권, 38년(1762 임오 / 청 건륭(乾隆) 27년) 5월 22일(을묘) 2번째기사 
  
"네가 왕손의 어미를 때려 죽이고, 여승을 궁으로 들였으며, 서로에 행역하고 북성으로 유람했는데, 이것이 어찌 세자로서 행할 일이냐? 사모를 쓴 자들은 모두 나를 속였으니 나경언이 없었더라면 내가 어찌 알았겠는가? 왕손의 어미를 네가 처음에 매우 사랑하여 우물에 빠진 듯한 지경에 이르렀는데, 어찌하여 마침내는 죽였느냐? 그 사람이 아주 강직하였으니 반드시 네 행실과 일을 간하다가 이로 말미암아서 죽임을 당했을 것이다. 또 장래에 여승의 아들을 반드시 왕손이라고 일컬어 데리고 들어와 문안할 것이다. 이렇게 하고도 나라가 망하지 않겠는가?" 

나경언의 고변이 있고 난 후에 영조가 이렇게 말하며 사도세자를 야단쳤습니다.
여기서 사도세자가 때려 죽였다는 왕손의 어미가 빙애로 수칙 박씨이며 은전군의 어머니입니다. 한중록에서도 사도세자가 의대증이 도져서 시중을 들던 빙애를 때려 죽였다고 합니다. 실록의 기록과 일치하고 있죠. 그러니 사도세자가 빙애를 때려 죽인 것은 부정할 수 없습니다.

또한 여승의 아들을 왕손이라고 일컬어 데리고 들어와 문안할 것이다라고 했는데, 


영조 99권, 38년(1762 임오 / 청 건륭(乾隆) 27년) 윤5월 14일 1번째기사)

환자(宦者내관) 박필수와 여승 가선 등이 복주되었다. 처음에 박필수가 세자를 따라 유연(잔치)하면서 세자를 종용하여 좋지 못한 일을 많이 저질렀고, 여승 가선이란 자는 바로 안암동의 여승인데, 머리를 기르고 입궁하였다. 이때에 이르러 임금이 박필수와 가선 및 서읍의 기녀 다섯 명을 참하라고 명하였다. 
 
이처럼 실록에 사도세자가 궁에 들였던 여승과 기녀 5명이 참형에 처해진 기록이 있습니다.

따라서 실제로 사도세자는 여승을 머리를 길러서 데려와 후궁으로 삼았고 기녀도 5명이나 불러 들여서 내관과 잔치를 벌였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실록의 기록을 다 믿을 수 있는가,하는 의문이 생길 수 있습니다.

하지만

정조가 직접 쓴 아버지 사도세자의 행장을 보면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병신년 봄에 이르러 《정원일기(政院日記)》와 공가(公家)의 문적 중 정축년부터 임오년까지의 차마 말하기 곤란한 점이 있는 내용은 모두 세초(洗草)하라고 명하면서 하교하기를 ‘세손(世孫)의 이 상소문을 보고 특별히 그의 청을 허락하는 것이다. 지금의 나의 마음은 슬픔을 견딜 수 없다.’라고 하고는, 옥루(玉淚)를 비오듯이 떨구었다. 또 전교를 쓰라고 명하면서 이르기를 ‘지금 내가 밤낮으로 오로지 생각하는 것은 조종(祖宗)이 물려준 나라에 있다. 금번의 이 조처는 실로 나이 어린 아들을 위한 것이다. 아, 임오년 윤5월의 일기에 대하여 사도(思悼)가 까마득한 저승에서나마 아는 것이 있으면 틀림없이 눈물을 삼키면서 「내가 장차 여한이 없게 되었다.」고 여길 것이다. 그 때의 일기를 실록의 규례에 따라 승지와 주서가 함께 차일암(遮日巖)에 가서 세초하도록 하라. 아, 내가 덕이 없는 탓에 만고에 없는 일을 당하였는데 말세의 인심이 수선을 떨고 있다. 비록 일기를 본 사람이라 하더라도 그 문자(文字)를 다시 제기하고 나선다면, 마땅히 무신년 못된 무리들의 잔당으로 쳐서 엄하게 징치할 것이다. 더구나 훗날에야 더 말할 것이 있겠는가. 이후로 임오년의 일을 언급할 경우, 마땅히 역률로 논죄할 것이니, 모두가 이것을 듣고 나라의 법을 범하는 일이 없도록 하라. 어린 아들이 이미 면유(面諭)를 받들었으니, 내 이제는 마음놓고 편한 잠을 자게 되었다.’고 하였다.


영조가 병신년봄에 승정원 일기와 공적인 문서에서 사도세자의 병이 심각해졌던 정축년부터 시작하여 그가 죽었던 임오년까지의 기록들 중 말하기 곤란한 점이 있는 내용을 모두 세초하라고 했다는 이야기입니다. 당시 세손이었던 정조가 대리청정을 시작하면서 영조에게 상소를 올려 아버지 사도세자의 기록중 남들에게 보이기 참혹한 것들을 지워달라는 상소를 올렸습니다. 그래서 영조가 특별히 그 청을 들어주어 유례없이 사도세자의 기록중 차마 남들에게 알리기 어려운 점들을 지워 버렸습니다. 

따라서 노론이나 누가 관여를 해서 사도세자를 폄하하기 위해 저런 기록을 남긴 것이 아니라 정조가 부탁을 해서 어느정도 심각한 기록들을 걸러낸 후에 남은 기록들이 저런 것입니다. 

정조 본인이 쓴 행장에 저렇게 남아 있으니 누가 꾸며서 쓸 수도 없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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