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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밑에 스코틀랜드 독립투표 관련 이야기가 있어서;;;
게시물ID : history_18139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리볼버오셀롯
추천 : 10
조회수 : 1054회
댓글수 : 11개
등록시간 : 2014/09/23 12:32:47
출처 : http://pgr21.com/pb/pb.php?id=freedom&no=53929

https://twitter.com/orankae/status/512831355445473281

다음 토탈워 카페에서 이 트윗을 봤을 때는 사실 충공깽이라서 유게에 올릴까 진지하게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몇가지를 이야기 하고자 자게에 씁니다. 

사실 이 기자가 범하고 있는 문제는 잉글랜드-스코틀랜드 관계를 본국 식민지 관계로
파악하고 있는 것인데 이건 상당히 위험한 도식입니다. 

양국 간의 통합은 스코틀랜드 국왕 제임스 6세가 엘리자베스 여왕 사후 제임스 1세로 잉글랜드 군주와 스코틀랜드
군주를 겸하면서 시작됩니다. 물론 양자간의 국가는 이 때 지금과 같은 형태가 아니었습니다. 이후 종교를 빌미로 한
수많은 전쟁, 영국-프랑스간 충돌, 청교도 혁명, 크롬웰 통치, 왕정복고, 명예혁명, 그리고 자코바이트의 난(명예혁명으로
퇴위된 제임스 2세와 그 후손을 왕으로 인정하는 왕당파의 난) 등 여러 정치적 변혁을 거친 후, 최종적으로 
잉글랜드의 국운이 융성하고 스코틀랜드가 경제적으로 파산하는 이벤트까지 발생하여 1701년 스코틀랜드 의회의 
요구를 통해 당시 군주 앤이 이를 적극 잉글랜드 의회에 요구하면서 성립된 것이었습니다. 

인터넷 포털 댓글에서 이 통일령에 이르는 수많은 이벤트가 마치 잉글랜드 vs 스코틀랜드의 전쟁 혹은 잉글랜드의 스코틀랜드
정복기 처럼 쓰이나 사실상 이 이벤트 대부분은 잉글랜드 가톨릭 왕당파 vs 잉글랜드 신교도 의회파 vs 이를 통해 어느 정도
이익을 확보하려는 스코틀랜드 3파전으로 구성되엇고 스코틀랜드 정부는 때로는 왕을 의회파에 팔아 먹거나(찰스 1세...)
매몰차게 왕을 버리는 것(명예혁명)까지 하면서 나름 독자적으로 역사적 이벤트에 참가 합니다. 물론 스코틀랜드도 한통속은
아닌지라 자코바이트 난 당시 나름의 제임스 2세 쪽과 아닌 쪽으로 나뉘었지만 이는 스코틀랜드의 총의도 아니었고 
사실 이 자코바이트 난에서 가장 핍박받고 많이 죽은 쪽은 아일랜드였다는 점을 생각하면(제임스 2세는 아일리쉬와 같은 가톨릭 신자였고, 
크롬웰의 통치에서 가장 의회를 증오하는 쪽은 아일랜드) 이 역시 도식에 맞지도 않습니다. 참고로 자코바이트의 난이 바로
아일랜드 민족주의 시작이라고 평해지죠.

정말 본국-식민지 도식에 어울리는 건 영국-아일랜드라는 게 증명된게 아이러니하게도 몇몇이 근거로 삼는 자코바이트의 난인 것이죠.

아무튼 통일령은 스코틀랜드 사회를 많이 바꾸어 놓았는데 이 사건을 통해 스코틀랜드 민족이라는 개념이 탄생되게 됩니다. 
애초 스코틀랜드의 문화는 엄청 다양했습니다. 수도 에딘버리는 옛날에는 의외로 앵글로 색슨족 거주지었습니다. 이덕에 앵글로 색슨의
영향이 강한 곳입니다. 그리고 영국과 국경지역으로 즉 남쪽 산악 지역은 로마화된 브리튼족의 영향이 강한 곳입니다.
그리고 글래스고가 위치한 클라이드 강 유역은 북부 아일랜드에서 이주한 아일랜드의 영향이 강하죠. 
물론 사실상 로우랜드로 불리는 이 남부지역은 당시 영국화가 심하게 된 지역이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북부 하이랜드 지역은 고대로 부터 이어진 픽트족의 영향이 강했는데 겔트라고 이야기 하지만 사실상 겔트란 민족 개념은
근대적인 민족개념은 아니고 여러 같은 계열 민족의 통칭과 같은 거라 세세히 보면 많이 다릅니다. 당장 고대에서 픽트 족과
브리튼 족은 적입니다. 애초 브리튼 족이 색슨족을 이 섬에 끌어들인 이유가 픽트족의 침공 때문이었습니다. 또한 픽트 족은
노르웨이와 많은 접촉이 있다 보니... (당장 브리튼 족의 후예인 웨일즈 어랑 스코틀랜드 게일어는 같은 켈트 계열이지만 상당히
거리가 멉니다. 오히려 웨일즈어랑 아일랜드어는 근연성이 있지만요.)
그리고 섬 지역들은 걍 바이킹의 후예들입니다. 물론 남부 섬들은 스코틀랜드와 그나마 융화가 많이 되었지만 북부 섬들은 바이킹 전통이 여전히 강한 곳이죠.

아무튼 이 다양한 문화권의 국가가 잉글랜드와 한 국가가 되자 이들의 머리 속에는 스코틀랜드가 잉글랜드와 다른 점이 뭔가에 대해
많은 고심이 있었던 거 같고 점차 하나의 스코틀랜드적 특성이 발명되게 됩니다. 이 과정을 담고 있는게 바로 유명한 에릭 홉스봄의
만들어진 전통이라는 책이죠. 

18~19세기 스코틀랜드 지도층들은 스코틀랜드적 특성을 발명하고 통일했는데 그건 바로 하이랜드적 특성에 보다 겔트적인 아일랜드
적 특성을 첨가하는 것이었습니다. 클랜 문화랑 게일어, 그리고 킬트 모두 이런 과정에서 재창조되었습니다. 

그들의 목표는 그러나 독립은 아니었습니다. 대영제국을 만드는데 스코틀랜드의 역할과 단결을 위해서 주로 이런 시도를 한 것을 보이는데
월터 스콧이나 기타 대부분 민족주의자들이 엄청난 대영제국 빠라는 걸 알 필요가 있습니다. 
기실 당시 스코틀랜드를 파악하는 건 차라리 로마 제국같은 다민족 국가와 그 제국을 구성하고 있는 일원으로  파악하는게
더 나을지도 모르겠네요. 한마디로 대영제국의 번영을 위해 공헌함과 동시에 잉글랜드와 다른 민족임을 잊지 않는 그런 식으로 말이죠.

아무튼 우리가 보기에 우스워 보이긴 하지만 스코틀랜드 민족주의라는게 태초에는 대영제국 속에서 스코틀랜드인에서 시작된 것이고
이런 사고는 여전히 강합니다. 당장 이번 고든 브라운 독립 반대에서 주장한 UK에서 스코틀랜드의 역할 같은게 그 사람의 민족주의적
사고가 부족해서가 아니라 월터 스콧 같은 태초 스코틀랜드 민족주의자의 전통에서 시작된 것입니다. 오히려 독립을 주도한 살먼드 같은
사람이 이런 맥락이라면 좀 특이한 것이라면 특이하겠네요.

사실 덧붙이면 UK의 민족주의라는게 다 이런 식입니다. 물론 너무 혹독하게 정말 식민지 처럼 당했던 아일랜드는 제외하고요.
여기는 정말 한일관계는 갖다 대기도 힘들죠. 아무튼 웨일즈 민족주의도 정작 웨일즈인이라는 개념은 강하지만 연합왕국에서
웨일즈 인이라는 개념이고 최근 생기는 콘웰민족주의 같은 경우 마찬가지입니다. 이번 웨일즈인에게 한 독립 설문조사만 봐도
오히려 스코틀랜드 자치권을 줄이고 대신 우리 자치권은 좀 늘려주세요. 그리고 독립은 무슨.... 이런 식이죠.(애초 웨일즈 민족주의란
개념 만든 사람 중 가장 유명한 사람은 독립투사나 이런 사람이 아닌 훗날 영국 수상 로이드 조지였죠.)

아무튼 이런 글은 그냥 다민족국가라는 개념에 대한 이해 부족 그자체 입니다. 그리고 오지랖도 넓지 스코틀랜드가 독립하고 말고는 그나라
선택이지 이런 비평을 하는 것도 웃기구요. 무슨 스코틀랜드 독립투사 빙의한 것도 아닌데 말이죠.

출처 댓글중에 이런 내용이 있음. "스코틀랜드는 어떤 기준으로 봐도 식민지 (colony )보다는 연합이나 연방 내 하나의 주체 (state) 에 훨씬 가깝다" 한마디로 이번 독립투표가 부결되었다고 스코틀랜드 인들에게 "식민지 근성에 찌든 놈들 ㅉㅉ" 라고 비난하는 것은 부당한 일이라고 생각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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