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3장 조선의 반격
1597년 12월 26일 아침 도산성 인근 조․명연합군 진지
“전군. 진격하라!”
“둥 둥 둥”
조선군의 독전고를 울리는 고수가 천천히 느리게 장단을 맞추었다. 군사들은 북소리 한번에 20보의 속도로 도산성을 향해 나아가고 있었다.
“도원수 각하. 더 이상의 접근은 위험합니다. 군사들의 지휘는 삼군 대장들에게 맡기시고….”
“부관. 그게 무슨 소리인가? 조선군의 단독 작전일세. 내 이날을 얼마나 기다려 온 줄 아는가? 번쩍번쩍한 두석린갑 입고선 뒷방 늙은이로 주저앉는 건 이 도원수 권율의 본새가 아니라네. 하하.”
대오도 당당하게 전진하는 조선군과 함께 백마에 올라탄 도원수 권율이 만류하는 부관을 꾸짖었다. 그는 이전과는 달리 투박해 보이는 두정갑(금속이나 가죽 등으로 만든 찰을 의복 내부에 쇠못으로 박아 만든 갑옷)을 입고 있었다. 이날은 연이어 공성에 실패한 명군을 대신하여 조선군의 힘만으로 본성 공략이 시작됐다.
“둥둥둥둥둥”
왜성의 본성에 가까워져 오자 고수의 북소리가 점점 더 빨라지기 시작했다. 조선군들은 북소리 한번에 1보씩 빠르게 전진했다. 그때였다.
“탕탕탕”
“슉슉슉”
네모났고 세모난 왜성의 총안과 궁안에서 총탄과 화살비가 조선군에게 쏟아지기 시작했다. 곳곳에서 병사들이 쓰러지기 시작했다.
“등패수는 뭐하는가? 앞서 나와 적의 흉탄을 막아라!”
권율이 호령하자 방패를 든 군졸들이 앞장을 섰다. 그 뒤에는 나뭇가지와 갈대를 지게에 진 병졸들이 전진을 계속했다. 다가오는 조선군을 향해 왜군의 사격소리도 점점 커졌다.
“장군. 저길 보십시오. 일진이 적의 왜성 앞에 당도했사옵니다.”
“좋아. 미리 약조한 계획대로 움직인다. 우선 궁수들과 항왜들에게 활과 조총으로 성 위의 왜군을 쏘도록 하게. 시간을 벌어야 해.”
“알겠습니다. 장군.”
부관의 신호에 따라 후방에서 따라오던 궁수와 조총병들이 사격을 개시했다. 왜성 안으로 화살이 날아들자 왜군들의 총소리가 잠시 잦아들기 시작했다.
“지금이다. 일진의 군사들은 젖은 갈대와 지푸라기로 연기를 일으켜라.”
도원수가 보검을 뽑아 호령하니 성벽에 도착한 병사들이 물기 있는 갈대와 싸리 등을 이용하여 매캐한 흰 연기를 성 위로 올려보냈다.
“켁켁. 시로이 케무리가...”
“콜록콜록. 나니고래...”
자욱한 연기 속에서 왜군들은 우왕좌왕하고 있었다.
“부관. 울산의병장 박응량의 부대와 별장 김응서의 군사들에게 수신호를 보내라.”
“예. 도원수 대감”
부관은 미리 정해둔 신호를 박응량과 김응서에게 전했다. 그들은 신속히 본성 주위로 흩어졌다.
“접반사의 계책이 잘 맞아야 하는데…. 어쨌든 이제부터는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을 다한다. 부장은 들어라. 적성 앞 일진에게 화공을 준비하라 일러라.”
“예.”
권율의 군령을 받은 성벽 밑의 조선군들은 가지고 왔던 장작을 쌓았다. 그리고 기름을 부어 불을 질렀다. 적의 단단한 석벽을 훼손하고자 함이었다.
“으악…. 다스케데 구다사이. 코니다상”
“푹.”
성벽 넘어 살을 가르는 날카로운 소리와 비명이 교차하고 있었다. 왜군 전체를 감시하는 코니다부대가 혼란스러운 왜군 진영을 공포로 다스리기 시작한 것이다.
“툭….”
코와 입을 막고 불을 키우는데 여념이 없던 최전방의 조선군에게 작은 돌 하나가 떨어졌다. 어깨에 돌을 맞은 병사 하나가 성벽 위를 쳐다본 순간이 그가 생전에 마지막으로 본 광경이었다.
“우르르 쾅쾅”
성 밑의 조선군에게 돌들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어른 주먹만 한 것부터 수박만 한 크기의 돌들이 불길 속으로 쉼 없이 낙하했다.
“으악….”
이번엔 조선군에서 비명이 터져 나왔다. 등패수가 이를 악물고 방패를 들어 낙하물을 막으려 했으나 중과부적이었다. 충격에 빠진 병사 몇몇이 진을 무단으로 이탈하기 시작했다. 그때였다.
“슉.”
도원수 권율이 직접 활을 재어 달아나는 병졸들에게 화살을 날렸다.
“물러서지 마라. 아직 아군에게 시간이 더 필요하다. 지엄한 군율을 어기고 물러나는 자는 내 칼이 용서치 않으리라!”
권율을 달아나는 군졸을 응징하며 병사들을 독려했다. 궁병과 조총수들이 쉴 새 없이 왜성을 향해 총탄과 화살을 퍼부었다. 사방천지가 불길과 화염 비명과 고함으로 얼룩졌다. 지옥도가 따로 없는 처참한 모습이었다.
“뎅 뎅 뎅”
“도원수 각하. 본진에서 퇴각 신호가 왔습니다. 퇴각신호가….”
“흠…. 작전이 성공한 것인가? 그렇게 된다면야 만사형통인데…. 어쨌든 아군의 피해도 있으니 본진으로 후퇴한다.”
“알겠사옵니다. 장군.”
도원수 권율이 이끄는 군대가 조․명연합군 진영으로 물러나자 동일한 진형으로 사면을 포위하고 있던 삼군대장들의 군사들도 퇴각했다. 이 전투로 인해 조선군은 어제의 명군 못지않게 피해를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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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보시게. 접반사. 어떻게 되었는가?”
전투지휘를 막 마치고 쉴 겨를도 없이 학성산의 연합군 수뇌부 진지로 달려온 도원수가 이덕형의 막사를 찾았다.
“방금 양 경리의 군막에 들러 전후 사정을 고했습니다. 경리께서 크게 기뻐하시더군요.”
“그렇다면….”
“계책은 얼추 맞아 떨어진 것 같습니다. 저 성의 가등 청정 이하 왜추들은 더는 깨끗한 물 한 모금 마실 수 없을 겁니다. 하하”
모처럼 만에 접반사 이덕형이 파안대소했다. 전날 명나라 상인 장 대인의 얘기를 듣다가 스쳐 가는 생각이 있었다. 얼마 전에 왜성이 탈출한 조선 여인의 증언이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부녀가 말하기를 ‘왜성 안에는 우물이 아직 없다.’라고 했다. 당시에는 전황이 바빠 넘어갔던 것인데, 장 대인과 돼지고기를 보면서 계책을 찾아낸 것이다.
이덕형은 그 길로 경리 양호를 찾아가 작전을 소상히 짜서 올렸다. 공명심에 불타는 양호는 명군을 희생시키지 않고 이길 수 있다는 말에 그의 계획을 지지해 주었다.
“울산의병들과 김응서의 군사들이 근처의 우물을 돌로 메우거나 독을 탔으니 왜적들은 갈증이라는 새로운 적에 맛서 싸워야 하겠지요.”
“그래도…. 저기 태화강의 강물이 있지 않소? 적병이 출혈을 감수한다면야 강물을 길어 먹을 수도….”
“아. 도원수 대감. 제가 알려드리지 않았습니까? 이미 경리에게 말씀드려서 적의 시체를 강물에 던지라 하였소이다. 당분간 태화강은 왜적에게 죽은 강이 되겠지요.”
“한음의 계책이 놀랍구려. 우리 사위가 접반사에게 형님 소리를 하겠소이다. 허허.”
도원수는 웃으며 화답했다. 권율의 사위는 이덕형과 막역지우인 오성부원군 이항복이었다. 사실 오성의 나이가 한음 보다 다섯 살이 위였다. 그래서 권율은 농을 친 것이다.
“여기서 끝이 아닙니다. 적들은 점점 더 자신의 목을 쥘 테니 두고 보십시오. 장군.”
이덕형의 마지막 말에 귀기가 서렸다. 순간 권율은 자신의 연세와 지위에도 불구하고 전신에 한기를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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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은 시각. 도산성 인근 조선군 아동포살수대 군영 막사
“산이 안에 있니?”
사내아이치고는 가는 목소리가 한 군막 밖에서 울렸다. 막사 안에서는 어떠한 대답도 없이 정적이 가득했다.
“아동포살수대 초관 산이 나리. 포수 울이가 이렇게 간곡히 면회를 청하옵니다.”
“...”
“야. 나 들어간다.”
이도 저도 반응이 없자, 답답함을 못 참고 폭발해 버린 울이가 장막을 걷고 안으로 발을 밀어 넣었다.
“어. 여기 있었네. 죽은 송장도 아니고 왜 대답이 없어?”
“할 말 없다. 나가라.”
한쪽 구석에서 웅크리고 앉아 있던 산이가 조용히 입을 때었다.
“그날 이후로 벙어리가 되었다고 진중에 흉흉한 소문이 돌던데…. 그건 아닌가 보네. 다행이다. 헤헤.”
울이가 샐쭉 이며 산이를 바라보았다. 그는 무릎에 고개를 파묻고 있었다.
“야. 사내가 뭐 그런 걸로 그러냐? 치마 두른 계집도 아니고…. 명나라 오합지졸 놈들 방자한 거야 하루 이틀도 일이냐.”
울이는 꼬리 내린 강아지 마냥 기가 죽은 그를 위로하고자 말을 꺼냈다. 전날 도산성의 삼환지에서 명군을 위협했다는 죄로 지휘관이었던 산이는 근신처분을 받고 아동포살수대는 금일 공성전에서 배제되었다. 조선군들 사이에선 초관인 그가 적의 식량 창고를 불태우는 공을 세우자 명군병사가 시기하여 그를 무고 하는 것이라고 말들이 많았다.
“그런 거 아니다. 대꾸해줄 힘도 없으니 어서 가라.”
산이는 낮은 목소리로 울이에게 답했다. 울이는 뿌루퉁한 얼굴을 하고 그의 곁으로 다가와서 앉았다. 초관은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보며 놀라워했다.
“왜…. 왜 이러느냐? 평소에 근처에만 가도 사나이의 자존심에 몹쓸 짓을 하면서….”
“그거야. 네가 실없는 농을 하니깐 그렇지. 정말 장한유협경박자가 따로 없다니깐.”
“...”
“아오. 또 풀이 죽었네. 차라리 까불거리는 게 더 낮을지도 모르겠다. 어휴.”
울이는 작게 한숨을 내쉬고는 품속에서 한지로 싼 꾸러미를 꺼내 들었다.
“자. 이거 받고 힘내라.”
“뭐냐? 이건.”
“동기 좋다는 게 뭐겠냐? 내 거금을 들여 월병 몇 개 샀다. 너 줄려고.”
“월병?”
“그래 월병. 장 대인인가 하는 그 명나라상인이 데리고 온 상단에서 구했다. 명국 제일의 상단이라고 하더니만 중추절에 먹는 월병도 있더라. 전쟁터에서는 단것이 잘 팔린다나….”
산이는 울이가 준 월병꾸러미를 쳐다보다가 다시 울이에게 내밀었다.
“가지고 가서 너나 실컷 먹어라.”
“허참. 배배꼬이기가 만수산 드렁칡 같네…. 나. 이만 간다. 쉬어라.”
“헉”
울이는 산이가 내민 꾸러미 안에서 월병 하나를 꺼내 산이의 입에다 손수 쳐넣어 주었다. 그리곤 장막을 걷었다. 대충 월병을 씹어 넘기고선 산이가 소리를 질렀다.
“우물우물 읔 야!”
“할 말 있으면 내일 밤 도산성 앞 우물가로 와라. 그때처럼 달구경이나 하자. 보름도 다가오니….”
산이가 답할 여유도 주지 않은 채 그는 막사를 빠져나갔다. 산이는 울이가 던져준 월병을 바라보고는 눈물을 흘렸다.
‘울이야 고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