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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 비잔티움의 황제 바실리우스2세에 관한 글입니다.
게시물ID : history_18017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형만믿으면되
추천 : 11
조회수 : 5525회
댓글수 : 2개
등록시간 : 2014/09/08 21:19:44
출처 : 네이버캐스트 http://navercast.naver.com/contents.nhn?rid=75&contents_id=5017
신께서 나를 돌아보시고 세상을 지배하는 황제로 삼으신 이후, 나의 창은 하루도 쉴 날이 없었다. 나는 평생을 한시도 쉬지 못하며, 서방과 동방을 가리지 않고 용감하게 원정하였다, 그래서 제2의 로마를 온전히 지켜냈다.”
비잔틴의 황제이며 마케도니아 왕조의 아홉 번째 황제였던 바실리우스 2세(바실레이오스 2세)의 묘비명이다. 실제로 그의 인생은 전쟁으로 점철되어 있었다. 그는 위대한 정복자이며 통치자였고, 무엇보다도 무사였다. 오직 칼과 방패가 부딪치는 금속성 소리와, 피비린내만이 그의 삶을 일깨우는 감각이었다.

비잔틴의 반격

바실리우스 2세 이미지 1
476년 서로마의 멸망 이후, 동로마, 즉 비잔틴 제국(비잔티움 제국)은 동서남북에서 계속해서 강력한 적수를 맞이하며 로마의 이름과 그리스 제국의 전통을 애써 지켜나갔다. 6세기 초에는 유스티니아누스 대제의 영도 아래 한때 지중해의 패권을 되찾는 듯도 했지만, 북방의 슬라브족, 서방의 게르만족뿐 아니라 동방의 사산조 페르시아의 끊임없는 침략에 시달리다 보니 국력이 날로 쇠퇴해갔다. 무엇보다도 7세기에 등장한 이슬람이야말로 비잔틴 최대의 위협이었다. 우마르 1세에게 아나톨리아를 제외한 아시아 영토를 빼앗기고, 우마이야 왕조 시절인 8세기 초에는 수도 콘스탄티노플이 몇 차례나 포위되는 상황에 처했다. 한편, 불가르족을 비롯한 북방민족들도 거침없이 침공하여 8세기에는 콘스탄티노플 일대를 제외한 유럽 영토가 대부분 상실되기도 했다. 그 사이에 서유럽에서 등장한 “서로마의 계승자”들과도 성상파괴 논쟁 등이 걸리면서 쉽게 손을 잡지 못하는 상황이었다. 이쯤 되자, 제2의 로마라는 콘스탄티노플의 운명도 제1의 로마를 따를 때가 머지않아 보였다.
그러나 9세기 중반을 넘기며 서방 기독교 제국과의 관계가 개선되고, 이슬람 쪽은 아바스 왕조가 쇠퇴의 조짐을 보이면서 비잔틴에 회생의 서광이 비치기 시작했다. 끊임없는 위기에 맞서 제국을 지키기 위하여 혈통이나 학식보다도 무용에 뛰어난 군사지도자로서의 황제상이 강력히 요구되었는데, 이에 가장 잘 부응했던 황제들이 867년부터 1056 년까지의 ‘마케도니아 왕조’의 황제들이었다. 그 창시자인 바실리우스 1세는 마구간지기 출신의 천한 신분이었으나 실력과 담력으로 황제의 자리까지 오른 사람이었고, 그 후계자들도 제각기 구 황족과 이런저런 혼맥을 맺어 정통성을 높이기는 했지만, 군사지도자로서의 실력으로 국내외의 인정을 받는 사람들이었다. 그중에서도 가장 뛰어난 업적으로 비잔틴의 중흥기 내지는 전성기를 이룩했다고 여겨지는 사람이 시조 바실리우스 이후 백 년 만에 나타난 바실리우스 2세였다.

‘이름뿐인 황제’로 보낸 오랜 세월

바실리우스 2세는 로마누스 2세 황제와 황후 테오파노의 아들로 958년에 태어났다. 그는 비잔틴 역사상 가장 오래 재위한 황제이기도 한데, 세 살의 나이에 즉위해 67세로 숨지기까지 65년이나 황제의 자리에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가 실제로 명실상부한 황제가 되기까지는 오랜 세월과 많은 위기가 필요했다. 960년에 부황 로마누스 2세에 의해 공동황제가 되고, 3년 뒤에 부황이 승하하자 동생 콘스탄티누스와 함께 황제라는 이름을(또한 목숨을) 유지하기 위해,모후 테오파노의 술책으로명장 니케포루스 포카스를 공동황제로 삼게 된다. 니케포루스는 요한네스 브링가스를 비롯한 유력한 귀족들의 도전을 물리치고 6년 동안 실질적인 단독 황제로 군림했으며, 969년에는 그를 시해한 요한네스 치미스케스가 다시 7년간 황제 노릇을 했다.
바실리우스 2세(왼쪽)와 동생 콘스탄티누스를 새긴 금화
976년에 요한네스가 병사(독살설도 있다)하자, 이번에는 시종장이던 바실리우스 레카포네스가 실권을 휘두르기 시작했다. 그는 환관 출신이었으나 로마누스 1세의 사생아로서 바실리우스 2세에게는 종조부뻘이었으며, 제국 최고의 재력을 갖추고 있어 어린 공동황제들을 제거하고 스스로 황제로 나설 꿈을 꿀 법도 했다. 그것도 모자라서, 두 사람의 황제 참칭자가 나타났다. 요한네스 황제의 매부인 바르다스 스클레루스는 요한네스의 사망 직후 동방에서 황제를 자칭하고는 수도로 진격했으며, 니케포루스 황제의 조카인 바르다스 포카스는 이보다 앞서 반란을 일으켰다가 키오스 섬에 유배 중이었다. 스클레루스의 공세로 콘스탄티노플은 위기에 직면했지만, ‘이이제이’의 술책이 효과를 보았다. 바르다스 포카스를 사면하고 수도 방위를 맡긴 것이다. 돌아온 포카스는 스클레루스를 물리쳤으며, 이후 두 세력이 견제하는 사이에 시종장 바실리우스를 전격 실각시켰다. 그리고 키예프를 다스리던 블라디미르 1세의 힘을 빌려 포카스를 무찌르고, 스클레루스 역시 처치했다. 그리하여 989년, 바실리우스 2세는 즉위 29년째가 되어서야 비로소 황제로서 제국을 온전히 다스릴 수 있게 되었다 (그의 동생 콘스탄티누스가 공동 황제 자리를 유지했으나 실권은 없었다).

“토지를 농민들에게 돌려주라”

명실공히 황제가 된 바실리우스의 적은 국내외에 모두 있었다. 동방의 아바스 왕조는 쇠약해져 있었으나 남쪽 이집트의 파티마 왕조가 호시탐탐 노리고 있었고, 서쪽에서는 사무엘 차르가 이끄는 불가리아가 있었다. 그리고 아나톨리아의 대토지 소유 귀족들이 왕권을 견제하고 백성들을 착취하며 국가재정을 좀먹는 내부의 적이었다.
무엇보다 중대한 적은 불가리아였다. 당시의 불가리아는 흑해에서 아드리아해까지 발칸반도의 대부분을 장악한 대국이었는데, 976년부터 비잔틴을 침공해 왔다. 바실리우스는 두 참칭 황제들을 아직 처리하지 못한 상태였던 986년에 불가리아를 공격, 수도 소피아를 포위했으나 후방의 지원이 끊기면서 식량 부족으로 철수해야 했었다. 그리고 철수 도중 트라야누스 관문을 지나다가 매복을 만나 처절한 패배를 겪고, 반드시 불가리아를 쓰러트리겠노라 다짐했던 것이다.
다시는 치욕을 겪지 않기 위해, 그는 공들여 병력을 확충하고 전술을 다듬었다. 신중하고 냉정한 성격이었던 그는 감동적인 연설이나 용맹의 과시를 통해 병사들의 사기를 끌어올려 용감하게 싸우도록 유도하는 방식을 불신했다. 그 대신 그는 군대 전체를 하나의 기계처럼 정밀하고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도록 했으며, 그리하여 서서히 밀려드는 밀물처럼 적진을 차근차근, 그러나 확실하게 무너뜨리게끔 했다. 그러기 위해 병사들이 대열을 유지하고 부대 간 통신이 정확하게 이루어지도록 훈련을 거듭했으며, 일부 병사가 스스로의 판단으로 적진에 뛰어들어 영웅적인 분투를 하면 오히려 벌을 주면서 각자 주어진 역할대로만 행동할 것을 강조했다. 또한, 봄에 출정하여 여름에 전쟁을 하고 가을이 되기 전 귀환하는 기존의 전쟁 방식을 뛰어넘어, 눈이 오나 폭풍이 부나 아랑곳없이 행군하고 전투하는 군대를 만들어냈다.
이렇게 준비를 마친 바실리우스는 991년에 불가리아 원정에 나섰다. 하지만 특유의 신중함 때문에 진격을 늦추는 동안 동방에서 급보가 날아들었다. 파티마 왕조의 군대가 알레포를 포위했으며 안티오크까지 위협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바실리우스는 말머리를 돌려 동방으로 진격했는데, 상황의 급박성에 맞춰 기발한 방법으로 진격 속도를 높였다. 병사들에게 노새를 지급해서 주 병력인 보병대를 임시 기병대로 만들었던 것이다. 그리고 밤낮으로 행군하여 16일 만에 알레포에 도착, 파티마군을 격파하고 계속 남하하여 에메사와 트리폴리까지 휩쓸어 버렸다. 이로써 파티마는 한동안 비잔틴을 위협하지 못했으며, 비잔틴의 시리아 지배가 안정되었다.
원정에서 이기고 개선하는 바실리우스 2세
동방 원정을 성공적으로 마치고 수도로 귀환하던 바실리우스는 아나톨리아 토지귀족들이 불법적으로 대토지를 점유하고는 황제도 놀랄 정도의 사치를 일삼고 있음을 눈으로 확인한다. 그리고 귀환 직후에 힘으로 빼앗은 토지를 원주인에게 모두 돌려주라는 법령을 공포한다. 이로써 토지귀족들이 힘을 잃고, 소규모 자영농들의 기반이 마련되었으며, 국유지였던 토지도 반환됨에 따라 제국의 재정기반도 충실해졌다. 바실리우스는 농민의 세금 부담도 줄였으며, 상이군인들과 전사자의 가족들을 돌보는 복지제도를 마련했다. 그리하여 일반 백성, 군대, 국가의 살림살이가 모두 넉넉해졌다. 또한 그 자신은 문필가들의 나약함을 경멸하기도 했지만, 학자들의 문화사업은 후원했으며 그의 치세 동안 많은 문인과 학자가 배출되어 “마케도니아 르네상스”가 가능해졌다.

불가르족의 학살자?

그러나 강적 불가리아를 그대로 두고서는결코 안심할 수 없었다. 그는 대규모의 원정으로 단숨에 자웅을 결하기보다 매년 소규모의 원정대를 보내 적의 힘을 조금씩 줄여나가는 전략을 썼다. 불가리아는 매번 비잔틴군을 물리쳤으나, 어느새 조금씩 뒤로 후퇴하고 있었다. 1000년이 넘으면서는 발칸 반도 동부의 상당 부분이 비잔틴의 수중에 들어가 있었으며, 불가르족의 전술과 지형에 능통한 고참 장교와 병사들도 많아짐으로써 불가리아가비잔틴군을 격퇴하는 일도 점점 힘들어져 갔다. 바실리우스는 전쟁뿐 아니라 회유책도 써서, 사무엘 차르의 친인척을 포함한 여러 장군들이 비잔틴군에 항복했다.
불가르족을 ‘학살’하는 비잔틴 병사의 그림
마침내 1014년 7월 29일, 바실리우스는 클레이디온 전투에서 불가리아군을 결정적으로 격파했다. 수많은 불가르족이 포로로 잡혔으며, 사무엘 본인도 한때 붙잡혔지만 그의 아들 가브리엘의 분투 덕에 간신히 달아났다. 전해지기로는 바실리우스가 이 전투로 잡은 포로 1만 5천 명의 눈을 모두 뽑아버리되, 100명당 1명씩은 외눈만 남기게 해서 눈먼 동료들을 인도하여 본토로 돌아가게 했다고 한다. 본거지로 돌아와 있던 사무엘 차르는 이 무시무시한 행렬을 보고 기가 막혔으며, 끝내 심장마비로 죽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당시에는 이미 불가리아의 국력이 크게 기울어 있었으므로 1만 5천씩이나 포로로 잡힐 만한 병력이 있었을 것 같지 않고, 포로의 눈을 뽑는 일은 당시 흔히 행해지던 일이었으므로 사무엘이 심장마비를 일으킬 만큼 충격적이지는 않았을 것이라며 이를 나중에 만들어진 전설이라고 보기도 한다. 이 ‘잔혹 행위’의 결과 바실리우스에게 붙게 되었다는 “불가르족의 학살자(불가록토누스)”라는 별명도 당대의 문헌에는 보이지 않으며, 나중에 불가리아의 독립운동이 벌어질 때 비로소 나타나고 있다. 사무엘의 사망 이후로도 불가리아는 4년을 더 저항했으나, 끝내 1018년에 항복한다. 바실리우스는 이 밖에도 남부 이탈리아와 크림반도를 공략해 비잔틴의 영토로 만들었다. 1025년에 그가 죽을 무렵, 비잔틴의 영토는 아드리아해와 에게 해, 흑해와 동지중해에 걸쳐 있었으며, 유럽에서도 아시아에서도 적수를 찾을 수 없었다.

로마, 콘스탄티노플, 모스크바

바실리우스는 외교적, 문화적으로도 중요한 역사적 결정의 주인공이 되었다. 바로 ‘제1’과 ‘제3’의 로마와의 관계에서다. 그는 서방의 신성로마제국과 동맹을 맺기를 오랫동안 바랬으며, 조카딸 중 하나인 조에와 오토 3세의 결혼으로 그것을 이루려 했다. 혼담은 성사되어 1002년에 조에를 태운 배가 이탈리아로 출발했으나, 도착 직전에 오토 3세가 열병으로 급서함으로써 결실을 보지 못한다. 이로써 만약 두 사람 사이의 자식이 신성로마와 동로마의 황제위를 모두 물려받을 경우, 불완전하나마 ‘동서 로마의 재통일’이 이루어질 뻔했던 가능성이 무산되었다.
이보다 13년 전인 989년에는 또 하나의 정략결혼이 있었고, 그 결혼은 보다 운이 좋았다. 바르다스 포카스를 물리치기 위해 키예프 대공 블라디미르 1세의 힘을 빌렸는데, 그 대가로 누이인 안나를 그에게 시집보낸 것이다. 블라디미르는 이를 계기로 동방정교회로 개종했으며, 이를 시작으로 러시아 전역에 정교회가 퍼져 나가게 된다. 그래서 15세기에 ‘제2의 로마’ 콘스탄티노플이 오스만투르크에게 멸망당하자, 모스크바가 그 정통성을 이어받는 ‘제3의 로마’라고 주장하게 되었던 것이다.
바실리우스의 조카사위가 될 뻔했던 오토 3세
바실리우스의 매부가 됨으로써 동방정교로 개종하는 블라디미르 1세

조금도 게으르지 않은 것이 최대의 게으름이 되다

이 황제의 위업 앞에서 그에게 존경을 바치는 사람은 많았다. 특히 토지를 얻고 세금은 덜 내게 된 농민과 복지혜택을 얻은 병사들의 존경은 특별했다. 하지만 존경을 넘어 따스한 사랑의 눈으로 바라보는 경우까지는 드물었던 것 같다.
“그의 어머니를 제외하고 그를 사랑한 사람은 없었다. 그는 누구를 사랑하지도 않았고, 누구의 사랑을 받지도 못했다. 사랑은커녕 그를 좋아한 사람이 있었다는 증거도 없다. 기록에 의하면 그는 절친한 친구도 없었던 듯하다. 비잔티움의 역대 황제들 중 그처럼 고독한 사람은 없었다.”
존 줄리어스 노리치가 [비잔티움 연대기]에서 못 박았듯, 바실리우스 2세에게는 사랑받을 만한 구석이 별로 없었다. 구중궁궐에서 좀처럼 나오는 법이 없는 중국이나 이슬람의 황제들과는 달리, 당시 비잔틴의 황제들은 대중 앞에 나서는 일이 많았다. 자연히 외모와 말솜씨 등이 대중적 인기의 척도가 되었는데, 바실리우스는 키가 작고 못생긴 데다가 도무지 외모에 신경을 쓰지 않는 사람이었던 것이다. 그는 머리 손질도 목욕도 제대로 안 했으며, 옷도 늘 군복 차림이기를 좋아했다. 화려한 예식도 볼거리도 관심 밖이었고, 말도 어눌했다. 그래서 꼭 필요한 경우 말고는 남들 앞에 나서지도 않았으며, 싸움터에서 말을 달리지 않으면 집무실에 틀어박혀 공무를 처리하고 군사계획을 세우며 날을 보냈다. 그는 평생 독신이었으며, 여인과의 에피소드는 전설로나마 남아 있지 않다. 그의 의붓아버지이자 공동황제였던 니케포루스는 신앙심에 따른 독신선언을 하고도 테오파노 황후에 대한 열정을 이기지 못해 그녀와 결혼했으나, 바실리우스는 특별히 신앙심이 투철하지도 않았으면서 여자에게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이런 “숙맥 군인”, 또는 “일 중독자”의 수십 년에 걸친 노력 덕분에, 비잔틴은 제2의 전성기를 누렸다. 영토의 넓이 면에서는 유스티니아누스 시대보다 못했으나, 유스티니아누스의 재정복으로 국고가 거덜 나고 백성들의 삶이 도탄에 빠졌던 데 비하여, 바실리우스는 백성을 두루 잘 살게 하면서도 곳간이 터져나갈 정도로 풍족한 국가재정을 남겼다. 그의 지배하에, 비잔틴은 서유럽과 이슬람이라는 세계사의 두 축에 끼여 찌부러지기는커녕 당당한 ‘대안 세력’으로 우뚝 섰다.
하지만, 노리치의 지적처럼, “결혼해서 자식을 남기지 않은 것이 그의 최대 실책”이었다. 후계자가 달리 없었기에 이름뿐이던 공동황제, 콘스탄티누스가 형의 뒤를 이어받았고, 그와 그의 두 딸(한 사람은 신성로마 황후가 될 뻔했던 조에였다), 그리고 사위들은 바실리우스의 위업을 계승하기보다 무너뜨렸다. 대표적으로, 바실리우스의 토지 개혁법은 그의 사후 몇 달 만에 폐지되었다. 그리고 11세기 후반부터는 동쪽의 셀주크투르크와 서쪽의 십자군이라는 두 개의 새로운 바람이 다시금 불어닥치며, 비잔틴의 입지를 계속하여 줄여나가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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업적요약.
1. 서방과 북방에 대해서 정략결혼 등 외교로 전선의 안정화
 
2. 파티마 등 이슬람계열 세력의 도발에 대한 신속하고 파괴적인 진압으로 동방과 남방의전선의 안정화
 
3. 안정된 전선을 바탕으로 불가리아를 집요하게 공략하여 완정정복
 
4. 경제를 안정시키고 문화를 육성하였으며 이를 바탕으로 국가에 엄청난 부를 축적
 
5. 내용에 안 나와있었지만 당시 상비군 30만 동원 가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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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적인 평가
 
마케도니아 황조를 전후한 비잔티움의 중흥기는 영토적으로는 로마의 분열시기의 직후의 절반 이하의 크기이지만 학자들간에는 대단하게 평가를
 
받는 부분입니다. 사산조 페르시아와의 대격전이후 비잔티움제국은 이슬람의 대공습과 이민족의 이주로 인해 그 세력이 지속적으로 축소가 되는데
 
축소된 정도가 어느정도였냐면 콘스탄티노플과 발칸반도의 해안가 지역, 그리고 아나톨리아의 서부일대 정도였죠. 영토로만 본다면 제국이 아니라
 
일대 군소국가에 가까울 정도로 세력이 위축된 상태였습니다. 그 지경까지 간 제국을 비록 중세 이전의 로마처럼 압도적으로 강력한 세력은 아니지만
 
이슬람과 유럽의 국가들 사이에서 최강의 세력으로 자리매김 한 겁니다. 한마디로 신라가 순수 자력으로 백제를 정복하고 고구려의 모든 영역을 차지
 
하면서 주변국과의 관계를 더욱 강화시키는 것 만큼 어려운 일을 해낸것이라고 볼 수 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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