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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례상 차리는 법' 언제 어떻게 유래됐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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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 반백백마법사
추천 : 6
조회수 : 7162회
댓글수 : 0개
등록시간 : 2014/09/07 00:04:05
http://m.media.daum.net/m/media/society/newsview/20140905104420246

'차례상 차리는 법' 언제 어떻게 유래됐나

1960년대 이후부터 언론에서는 앞다퉈 '차례상 차리는 법' 식의 보도를 했다. 이 과정에서 몇몇 가문에 내려오는 가례가 표준처럼 퍼져 전국화되었다.  

추석이다. 추석 하면 떠오르는 것은 차례나 성묘다. 믿는 종교에 따라 치르지 않기도 하지만, 아직도 많은 집안에서는 제사상을 차리고 절을 한다. 어동육서(魚東肉西), 좌포우혜(左脯右醯), 조율이시(棗栗梨枾), 홍동백서(紅東白西)…. 

흔히 듣는 '제사상 차리는 법'이다. 각각 상을 차릴 때 '물고기는 동쪽에, 고기는 서쪽에', '포는 왼쪽에, 식혜는 오른쪽에', '과일은 대추, 밤, 배, 감 순으로', '붉은 과일은 동쪽, 흰 과일은 서쪽' 등의 뜻이다.  상을 차리는 것을 흔히 진설(陳設)이라고 한다.

 그런데 이 진설의 논리는 어떻게 만들어진 것일까. 제례와 관련된 논문들을 찾아봐도 쉽게 찾을 수 없다. 

 명절 때마다 언론 지상에 자주 소개되는 차례상 차리기 배우기 행사. 차례상의 음식 놓는 순서는 어떤 논리로 만들어진 것일까. 

<주자가례><격몽요결>이 출처인가   시중에 나와 있는 차례 지내는 법 등이 실린 도서 등에 관련해 출처로 많이 거론되는 것이 중국의 <주자가례>나 율곡 이이 선생의 <격몽요결> 등이다. 책들에 실려 있는 진설 그림을 바탕으로 나온 이야기라는 것이다. 

과연 그럴까.  "원래 <주자가례>를 보면 그림이 있는 것이 맞아요. 그런데 그림이 주자의 것은 아닙니다. 이게 조선에 들어오면서 그림을 고증하기 시작해요. 여기저기에 제례(祭禮)에 대한 그림이 실려 있는데, 갑론을박이 벌어지기도 합니다." 경북대학교 퇴계연구원의 이승연 객원연구원의 말이다. 그는 지난 2011년 제례를 중심으로 조선에서 주자사상이 수용되고 변용되는 것을 고찰하는 논문을 냈다. 

계속되는 그의 말. "처음부터 왜 그렇게 놔야 하는지 논리는 없었고, 주자 자신도 사마광(司馬光)의 책을 참고로 해서 책을 쓴 것입니다. 조선에 들어오면서 뭐는 음이고 뭐는 양이라는 식의 설명이 등장하기는 하지만 역시 논리적 근거는 명확하지 않아요." 

 이이 선생의 <격몽요결>도 마찬가지다. <격몽요결>의 7장이 제사 지내는 법, 곧 제례다.

 이 제례의 첫 문장은 "제사는 마땅히 <주자가례>를 따라야 할 것이다"(祭祀는 當衣家禮니라)라고 시작하지만 위의 어동육서… 등의 말은 등장하지 않는다. 그런데 7장 말미에서 율곡의 언급을 보면 당시에도 제사의 예법을 두고서는 의견이 분분했던 모양이다.

 "지금의 세상 습속을 보면 예법을 알지 못하는 이들이 많아서 제사를 지내는 의식이 집집마다 같지 않으니 매우 가소로운 일이다." 

이이는 이 대목에서 "이에 제사예법을 적어 뒤에 덧붙이고, 또 거기에 그림까지 그려놓았으니 반드시 잘 살펴서 그대로 제사를 지내야 한다"고 적고 있다.  그런데 출판된 <격몽요결>에는 그림이 붙어 있지 않다. 

한국학중앙연구원의 한국역사정보통합시스템(http://yoksa.aks.ac.kr/)에서 제공하는 원문 서비스에 실려 있는 선조 10년(1577년) 판본을 보면 해당 그림을 찾을 수 있다. 

그런데 <격몽요결>의 그림도 마찬가지다. 과일의 종류는 제시되지 않은 채 맨 앞열에 '果'만 놓게 되어 있으며, 고기(肉 또는 炙)나 어류(魚)는 섞여 있다. 좌우는 구분할 수 있을지 몰라도 방위를 표시하게 되어 있지는 않다.

역시 <주자가례>를 참조로 만든 김장생의 <가례집람>의 그림도 대동소이하다.

 대체 어떻게 된 일일까.  "중요한 것은 형식이 아니라 마음가짐"   그 전에 풀어야 할 의문이 있다. 조선시대 사람들은 왜 <주자가례>를 전범으로 삼았을까. 

안승준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책임연구원은 "조선시대의 이념, 성리학의 처음이자 끝은 예의였다"며 "가정에서 지켜야 할 예절을 담아놓은 책이 <주자가례>였기 때문에 그것을 가장 따라야 하는 모범으로 삼았다"고 설명했다. 

즉 제사뿐 아니라 상례, 다시 말해 일상생활 예절에서도 가장 따라야 할 지침으로 삼은 것이 <주자가례>였다는 것.

 "당시의 관념에서 유학자라면 가장 우선적으로 실천해야 하는 것이 <주자가례>를 따르는 것이고, 확산시키는 것이었다"는 게 안 책임연구원의 설명이다.

 예송논쟁 즉, 지금에 와서는 '왕위 계승 과정에서 상복을 몇 년 입어야 하나'라는 논쟁이 사소해 보일지는 몰라도, 당시의 텍스트적 맥락에서는 가장 중요한 문제였다는 것이다.  그런데 안 책임연구원의 주장에 따르면 <주자가례>의 핵심적인 주장은 형식이 아니라 마음가짐이었다. 

"상례나 제례나 모두 중요한 것은 마음을 다한다는 것이에요. 물건, 즉 제물을 마련하는 것은 두 번째입니다. 형편이 안 되면 맹물, 맹수를 한 바가지 떠놓고 제사를 지내도 전혀 미안한 마음을 가질 필요는 없습니다."

 자신이 편한 대로 하자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진정 죽은 사람을 추모하는 마음을 다했다면 형식에 구애받을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격몽요결>의 강조점도 마찬가지다. 이이는 이렇게 썼다. "제사를 지내는 것은 주로 사랑하고 공경하면 그뿐인 것이다. 가난하면 집안형편에 어울리게 하면 되고, 병이 났다면 몸의 형편을 헤아려 제사를 지내면 되는 것이다."

 과거 TV의 한 코미디 프로그램에서는 제사상에 수입산 바나나를 올리는 세태를 꼬집었다. 농사를 지었을 부모를 욕되게 하는 것이라는 풍자다. 과거 바나나는 전부 수입산이었지만 이제는 제주도에서 재배되기도 한다. 여하튼 기존에 알려진 예법 이외의 제물을 제사상에 올리면 안 되는 걸까. 

<격몽요결>을 번역한 김학주 서울대 명예교수는 "아마 이이 선생이 책을 쓸 당시에는 사과를 제상에 쓰지 않았을 것이다. 예전부터 있었던 제철과일이라면 감이나 대추, 밤일 텐데 사과나 배는 훨씬 뒤부터 제물로 사용되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제물이 고정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율곡 이이의 <격몽요결>에 부록으로 실린 제사상 진설도. 과일의 종류 등에 대한 세세한 언급이 없는 것을 알 수 있다.현재 상차림은 최근에 발명된 전통   처음으로 돌아가자. '어동육서'…류의 이야기는 어떻게 나오게 된 것일까. 

"송시열 선생의 <송자대전>을 보면 제자가 그에게 어동육서의 이유가 뭐냐는 질문이 나온다. 그에 대한 송시열의 답이 중국을 기준으로 하면 동쪽이 바다이고 서쪽이 육지라서 어동육서라는 이야기가 나오는데, 심각하게 답변한 걸로 보이진 않는다. 그 이후 송씨 가문이나 문파에서 그런 것을 강조했을 뿐 가가례라고 해서 집집마다 내려오는 전통은 달랐다." 주영하 한국학중앙연구원 민속학대학원 교수의 말이다.  주 교수의 설명에 따르면 현재의 '차례상 올바르게 차리는 법'이 확립된 것은 1960년대 이후다.

 "50~60년대까지만 하더라도 같은 종손이 한 마을에 살았으니 가장 앞선 문중의 종손 집에 모여 차례를 지내고 순서대로 지낸 뒤 대강 정오 정도까지 차례를 모시는 식이었어요. 그런데 도시화가 급격히 진행되면서 '말손'인 사람들이 자기들이 다 독립했으니 추석에는 차례를 각자 지내야 할 것 같은데 문제는 제관을 해야 할 1930년대, 40년대생 분들이 어떻게 제사를 지내는지 모르니 갑갑할 노릇이죠. 그러니 언론에서는 앞다퉈 '차례상 차리는 법' 식의 보도를 했고…." 이 과정에서 몇몇 가문에 내려오는 가례가 표준처럼 퍼져 전국화되었다는 것이다.  그는 다음과 같이 덧붙였다.

 "사실 추석의 기본적인 성격은 천신제, 다시 말해 계절마다 새로 나는 곡식이나 곡물, 과일, 생선 같은 것을 종묘에 바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우리 땅에 나는 제철음식, 조상이 좋아했던 음식을 바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전국화되니까 조금 이상해지는 것이죠."

 간단히 말해, 일반 상식처럼 통용되는 '제사상 차리는 법'도 발명된 전통에 가깝다는 설명이다.  안승준 책임연구원은 차례나 제사에서 쓰이는 '축문'의 경우도 형식에 치우치는 것이 안타깝다고 말한다. 

"축문은 유세차와 상향, 즉 조상님께 '흠향하소서'라고 기원하는 최소한의 형식만 제외하면 나머지는 한글로 써도 상관없어요. 돌아가신 분에 대한 애틋한 마음만 담아 진솔하게 쓰는 것이 기본입니다. 그런데 그 자리에 모인 사람들이 알아듣지도 못하는 한자어를 나열하는 것이 전통을 지키는 것으로 착각하는 것 같아 안타깝습니다."

 그는 꼭 덧붙일 말이 있다고 했다. "옛 사람들은 윤회봉사라고 해서, 제사를 돌아가면서 지내는 것이 많았습니다. 이것만은 복원되었으면 해요." 큰아들, 소위 장자만 제사를 지내라는 법이 예전엔 없었다는 것이다. 

아들 딸 구별 않고 돌아가면서 제사를 지내는 것이 많았는데, 17세기 중엽 정도부터 사위가 처가 근처에서 사는 구조에서 딸이 시집을 가는 형태로 사회 형태가 바뀌면서 외손들이 제사에서 멀어지게 되었다는 것이 안 연구원의 설명이다. 

이승연 연구원도 "원래 주자가례의 제례는 4대 조상을 함께 모시는 형태로 가족의 공동재산을 만들어 가족 내에 가난한 사람이 제사용이나 묘지관리용 토지를 맡는, 일종의 빈부격차를 해소하는 방법"이라며 "그 후 장자상속제가 굳어지면서 일부 폐단이 나타나기도 했다"고 부연했다.

 원래 명절은 추석이나 설날만 있는 것이 아니다. 음력 1월 15일의 정월대보름, 4월 한식, 5월 단오나 6월 유두, 7월 백중, 11월 동지 등도 있었다. 

그나마 정월대보름에 부럼을 하는 풍습만 희미하게 남아 있을 뿐 나머지 명절의 전통은 현재 거의 끊겼다. 왜일까. 답은 쉽게 나온다. 대부분 농사를 생업으로 하는 전통사회에서 산업사회로 이행하면서다. 

그러면 질문을 거꾸로 해볼 필요가 있다. 왜 여러 명절 중 설날과 추석만 '민족명절'로 살아남게 되었을까.  질문에 대한 장장식 국립민속박물관 학예사의 답은 의외로 간단했다. 

"설날, 추석은 나라에서 3일간 쉬지 않습니까. 공무원 휴무에 관한 법령에 따라서 그날은 쉬게 되어 있는데 다른 날은 쉴 수가 없으니 무심코 지나가는 것이고." 장 학예사는 이와 관련해 제안이 있다고 했다. 국가공휴일로 추석이나 설날과 같은 명절을 쉬는 대신, 다른 명절은 지자체 단위로 휴일을 지정하자는 것이다. 

"이를테면 전남의 법성포에서는 음력 5월에 단오제가 열리는데, 법성포에 위치한 회사나 관공서, 학교는 그날을 휴일로 지정하는 것입니다. 경북 의성이나 안동을 가면 과거부터 추석 대신 음력 9월 9일 중구절에 차례를 지냈는데, 추석 때 자녀들이 내려오니 중구절 때는 노인들만 따로 차례를 지내요. 중구절이 활성화된 지역은 그때를 휴무일로 지정하고 휴가철을 그때로 맞춰 지내면 지역이 활성화되는 한 방안이 되지 않겠습니까."  그는 우리의 전통명절이 기존 기념일의 대안이 될 수도 있다고 덧붙였다.

 "최근 들어 발렌타인데이에 초콜릿 엄청 주고받지 않습니까. 말하자면 사랑을 고백하는 날인데, 기존에 칠월칠석이 있어요. 얼마나 좋은 모티브입니까. 5월에 어버이날이 있는데 이것이 미국식인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원래 동짓날엔 부모에게 손수 지은 버선을 바치는 풍습이 있었거든요. 5월 1일은 노동절인데 2월 초하루에 머슴날이라고 일종의 보너스 개념으로 머슴떡을 주는 게 있었습니다. 이런 전통적인 기념일을 활용해보는 것도 좋지 않을까요." 한 번쯤 생각해봄직한 아이디어다.  
<정용인 기자 [email protec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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