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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 16.원 간섭기를 지나 혁명을 시도한 고려 (ver 0.1)
게시물ID : history_17902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무량수
추천 : 7
조회수 : 1603회
댓글수 : 3개
등록시간 : 2014/08/29 12:19:56

몽골의 고려를 향한 공격은 1231년부터 시작됩니다. 중간 중간 몇번의 외교적 접근 및 고려의 패배를 인정한 조약이 있었지만, 1273년에가서야 고려가하는 몽골을 향한 저항이 완전히 끝나게 되지요. 고려정부는 사실상 최씨정권이 무너지면서 항복한 것과 마찬가지지만요. 어렵게 이어오던 조직적 저항은 1273년 삼별초가 제주도에서 정벌되면서 끝난 것입니다.



고려를 이렇게 오랜시간 괴롭히고 결국 굴복시킨 몽골제국은 어떤 나라였을까요? 간단하게 알아보고 가도록 하죠. 몽골 이전에 고려를 괴롭히던 여진족의 나라인 금이 12세기 후반이 되면 점차 무너지게 됩니다. 이 시기에 몽골어로 쇠로만든 인간이란 뜻의 테무진이 몽골족 내부를 1187년에 통일 하죠. 이 통일 이후 테무진은 칭기즈칸이란 명칭으로 불리게 됩니다.


칭기즈칸의 몽골이 본격적으로 중국대륙 북방에서 동아시아의 최강자임을 증명한 것은 1215년 금나라의 수도인 연경을 공격하고 물러나면서 입니다. 1219년, 칭기즈칸은 직접 군대를 이끌고 서방원정에 나서게 됩니다. 중앙아시아의 강국이었던 호레즘 왕국까지 무너뜨립니다. 이런 정복활동 중인 1227년 칭기즈칸은 서하를 공략하다가 사망하게 되고, 이후 몽골제국은 칭기즈칸의 자손들에 의해 이어집니다. 몽골제국은 중국 대륙 북쪽에 몽골제국의 황제가 직접 다스리는 영토와 다른 칭기즈칸의 후손들이 각각 맡아서 독립적으로 다스리는 형태로 전환되지요.  이때까진 하나의 제국으로 묶여있는 상황이었습니다.


1234년이 되서야 몽골제국은 중국대륙의 북쪽에서 금나라를 멸망시키게 됩니다. 이 와중에 서방원정군은 동유럽까지 진출해 있었지요. 그러면서 수도를 카라코룸(화림)으로 정하고 도성을 건설하게 됩니다. 이런 몽골의 거대 제국을 뒷받침 한 것은 이슬람 상인들이었습니다. 이들은 군수물자를 조달하고, 각 국의 정보를 알려주고, 외교사절의 역할까지 하지요. 이들이 몽골제국에게 도움을 준 이유는 안전한 무역로를 확보하기 위함이었다고 합니다. 애써 먼 거리를 교역하는데 약탈 당한 두려움에 떠는 것보다는 하나의 제국에 의해서 통일되어 안전이 확보되는 것이 나을 것이라는 판단이었겠지요.


한편, 몽골제국은 1260년 쿠빌라이가 남송과 강화조약을 맺으면서 칸의 지위에 오르게 됩니다. 그냥 오른 것이 아니라 내부적인 후계 싸움을 승리한 댓가지요. 수도를 연경으로 옮기고 1271년에는 국호를 대원이라고 칭하게 됩니다. 이런 쿠빌라이의 행동에 대해 다른 지역의 칭기즈칸의 후예들이 반발을 일으키게 되고 몽골제국이 사실상 분열됩니다. 이들의 싸움은 40년간 지속되다가 1303년이 되서야 종결됩니다. 연도를 비교해 보면 알 수 있듯이 고려는 칭기즈칸 제위시절이 아닌 이후 후손들에 의해 영토가 넓어지던 시절에 전쟁을 시작하게 된 것입니다.




몽골제국이 고려에게 준 피해를 살펴보죠. 우선 영토로는 몽골제국은 1258년 화주(영흥)에 쌍성총관부를 설치해 철령 북쪽의 땅을 빼앗았습니다. 1270년에는 서경에 동녕부를 설치하고 자비령 북쪽 땅을 몽골제국이 직접 다스리게 됩니다. 삼별초의 난을 정리된 1273년 이후에 제주도에 탐라총관부를 두어 일본 정벌을 위한 말을 기르는 목마장을 두고 관리하기도 했습니다. 이중 동녕부와 탐라총관부는 1290년에가서 고려의 반환 요청이 받아들여지게 되어 반환 되지요.


원나라가 된 몽골제국은 고려의 정부조직과 용어등 많은 부분을 바꾸도록 만듭니다. 감히 황제의 나라와 같은 용어, 같은 정부조직을 가질 수 없다는 이유에서였지요. 실제로는 2성 6부제였지만 원래 형태는 3성 6부제였던 정부 기관의 3성을 1성으로 줄이고, 6부를 4사로 줄입니다. 그리고 왕의 묘소에 붙이는 조, 와 종이란 단어 대신에 왕을 쓰게 만듭니다. 왕이란 단어가 무슨 차이가 있느냐 할 수도 있는데요. 원에서 말하는 왕은 요즘 단어로 치면, 도지사나 시장 같은 지방자치 단체장과 비슷한 의미였습니다. 정확하게 일치한다고는 볼 수 없지만요. ^^;;


이렇게 용어에 대한 통제가 들어가면서 왕이 자신을 부르던 짐이란 단어는 고란 단어로 바꾸게 하고, 신하가 왕을 지칭하던 폐하는 전하로, 왕위를 이어받을 사람을 말하는 태자는 세자로 바꿔 부르게 됩니다. 


용어만 개입한 것이 아니라 경제적인 수탈도 이어집니다. 금, 은, 포 등의 공물을 받치게 하고, 인삼, 잣, 약재, 매 등의 특산물도 요구하게 된 것이죠. 이 때문에 농민은 일반 조세 외에도 원에 대한 공물에 대한 부담이 늘어나 생활이 어려워지게 됩니다. 거기다 아니라 공녀와 환관까지도 요구합니다.


이런 고려와 몽골은 서로 영향을 끼치게 됩니다. 특히 고려의 의복과 음식 및 생활양식이 원나라에서 유행했었는데요. 이를 고려양이라고 불렀다고 합니다.


원이 설치한 정동행성은 고려에 골칫거리가 되기도 했습니다. 원래 이 정동행성은 상시 기구가 아니라 일본 정벌을 위해 임시로 만들어졌던 기구였습니다. 원래 명칭은 정동행중서성으로 정동은 일본을 정벌하겠다는 의미고, 행중서성은 지방파견관을 뜻하는 글자였지요. 1280년인 충렬왕 6년에 처음 설치되었는데요. 일본 정벌이 실패하자 1283년에 사라지게 됩니다. 그러다 1285년에 다시 설치되고나서는 고려 말기까지 존속하게 되지요.


이 정동행성이 존재했던 이유는 고려와 원나라 사이의 의례적인 일을 도맡아할 기관이 필요해서였는데요. 정동행성의 최고 직위인 승상에 고려왕이 임명되었고, 주로 고려인으로 채워졌다고 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 기구의 하부 기구인 이문소가 일으킵니다. 이문소는 사법기관으로 반원세력을 억압하는 역할을 했지만, 한편 원나라에 동조하는 세력들의 부패를 방조하는 등의 전횡을 저지르게 된 것이지요.



이런 시기에도 나라를 쥐락펴락하는 가문과 세력들이 존재하기 마련이지요. 원 간섭기에 정권을 잡은 이들을 보통 권문세족이라고 부르는데요. 이들은 주로 무신정권기에 성장한 무신세력과 과거부터 유력가문이었던 문벌귀족, 원을 등에 업고 새롭게 성장한 가문들로 이루어졌습니다.


무신정권이 끝나고 무신가문들 모두가 끝났을 것 같지요? 아닙니다. 그 전부는 아니고 권력의 정점에 있었던 가문들만이 몰락했습니다. 그들을 따르던 다른 무신가문들은 원이 간섭하는 기간에도 유력가문으로 남아있게 된 것이지요. 대표적인 가문은 김취려의 언양 김씨와 채송년의 평강 채씨가 있었습니다. 또한 무신 정권기에 숨 죽여있었지만 명맥을 유지하고 있던 문벌귀족 출신의 가문으로는 인주 이씨, 정안 임씨, 경주 김씨, 파평 윤씨등이 대표적인 권문세족 가문이었습니다. 이들은 오래된 가문으로써 왕실이나 다른 힘있는 가문들과의 혼인으로 명맥을 유지했습니다. 나름 명문가의 권위(?) 혹은 상징성으로 존재했던 것이지요. 그 때문에 실질적인 정치권력이 이들 손에 주어지지는 못했다고 하네요.


한편, 새롭게 성장한 가문도 있었습니다. 이들이 새롭게 성장하게 된 수단은 원나라의 힘이었지요. 통역일을 하던 가문인 평양 조씨, 매사냥을 도와주는 관청의 일을 하던 칠원 윤씨, 삼별초의 난을 진압하고 일본 정벌에 무공을 세운 김방경의 안동 김씨 등이 대표격 입니다.


권력 형성이 이렇게 되다 보니 권문세족들은 대체적으로 친원파일 수 밖에 없었습니다. 자신들의 정치권력 유지와 경제기반의 존속을 위해 원나라의 힘을 이용했고, 새롭게 개혁하자는 말에는 철저하게 반대할 수 밖에 없는 태생적인 한계가 있었던 것이죠. 


이들 권문세족은 높은 관직을 독점하고 정치권력을 장악했습니다. 이들은 주로 도평의사사를 통해서 국가일을 의논하고 처리했는데요. 도평의사사는 고려 초기에 있던 도병마사가 변한 조직입니다. 도병마사는 원래 지금으로 치면 장군들이 모여서 군사적 업무를 회의하던 기구였습니다. 1279년인 충렬왕 5년에 도평의사사로 이름이 변하게 되는데요. 원래 기능보다 더 많은 국가 업무를 처리하다보니 이름을 바꾸게 된 것입니다. 도평의사사에서 처리하는 일이 많아지다 보니 처음 고위 관직의 신하들이 회의기관이라 10명 안팍의 인원이 있던 곳이었지만 고려말이 되면 구성인원이 7~80명가까이 늘어나 거대 기구가 되지요.


이 권문세족들은 경제적 이득도 독점하다 싶이했습니다. 이 시기의 경제적 이득은 누가 얼마나 많은 땅을 가지고 있느냐였습니다. 공식적인 방법과 더불어 불법적인 방법으로 자신들 만의 경제력을 구축한 것입니다. 정권을 손에 쥐고 있으니 자신들에게 유리하게 끔 하는 것도 가능했구요. 고려의 대표적 토지제였던 전시과가 무신정권으로 무너지자 녹과전을 도입해 관리들에게 땅의 수조권을 나누어주었는데요. 이 권문세족들은 녹과전을 이용한 합법과 불법을 오가며 거대한 농장을 소유하게 됩니다. 얼마나 넓었는지, 이들의 농장의 경계를 산이나 강으로 구분지을 정도였다고 하네요.


앞서 고려 초기 사회를 이야기하면서 관리에게 주는 땅은 국가에 들어올 세금을 대신 받아 생계 유지비용으로 쓴다고 했었죠. 그런데 그런 땅을 권문세족들은 자신들의 땅처럼 소유하고, 이 땅에 속한 사람들은 국가적인 일에 나가게 하지 않고 자신들을 위한 일에 동원하죠. 이런 일이 벌어지니 권문세족의 재산은 늘어나는 반면 국가의 수입은 줄어들게 됩니다. 이런 횡포를 겪다보니 많은 농민들이 어쩔수 없이 권문세족에게 의지한 삶을 살 수밖에 없게 되었지요.



고려가 원과 권문세족에게 무력하게만 당하고 있었던 것만은 아닙니다. 그런 와중에도 나름 개혁을 추진했지요. 특히 충선왕은 신진사대부(신흥사대부)들과 같이 개혁정치를 시도합니다. 하지만 개혁정치 시도는 권문세족의 반발을 불러왔고, 결국 1년도 유지하지 못하고 왕 자리에서 물러나 아버지였던 충렬왕에게 왕위를 돌려주게 됩니다. 그러면서 충선왕은 원나라에 불려가게 되지요. 원나라에 있는 동안 원나라의 무종이 왕으로 등극하는데 도움을 준 공로로 아버지 충렬왕이 죽은 뒤 1308년에 다시 고려왕이 되었지만 개혁정치는 사실상 이뤄지지 못하게 됩니다.


간간히 고려의 왕들이 개혁을 추진했지만 실질적으로 개혁을 시도한 것은 공민왕 (1351~1374)때가 되서였습니다. 특히 신돈과 신진사대부를 이용해 전민변전도감을 설치해 권문세족들이 빼앗은 토지와 노비를 원래 주인에게 돌려주는 시도가 가장 강력했다고 할 수 있는데요. 이런 개혁정치를 시도할 때마다 권문세족의 강력한 반대에 부딪혀 좌절되고 말았습니다. 전민변정도감 같은 경우는 7번이나 설치되었다가 폐지되기를 거듭했을 정도였습니다.


공민왕때는 개혁을 하려던 선대 왕 때보다 신진사대부들이 꽤 성장한 상황이었고, 중국 대륙에서 원나라가 한족들에 의해 반란 때문에 나라가 기울어져가고 있었기에 개혁시도에 힘을 낼 수 있었습니다. 개혁의 우선순위는 권문세족의 뒤를 봐주는 원을 배척하는 것이었습니다. 대표적으로 원나라의 황후가 된 기황후의 도움으로 원나라의 힘을 등에 업고 횡포를 부리던 기철을 중심으로 하는 무리를 제거합니다. 그리고 앞서 말했듯이 고려 안에서 문제를  일으키던 정동행성의 이문소를 혁파하지요. 원에 의해서 변경된 정부 조직도 3성 6부 체제(실제로는 2성 6부인)로 되돌립니다. 뿐만아니라 영토회복을 위해 쌍성총관부를 공격해 철령 이북땅을 되찾아오는 일을 강행합니다. 게다가 당시 중국대륙에서 떠오르던 명나라와 사신을 보내기도 하죠.


하지만 권문세족들도 그대로 당할 수 없었습니다. 신돈을 제거하고 공민왕을 시해함으로써 개혁을 방해하고 자신들의 권력을 지켜냅니다.


한편, 고려는 왜구(일본의 도적집단)와 원나라가 기울어져 가면서 북쪽에서 나타난 황건적들의 잦은 침입에 의해서 고통받고 있었는데요. 이들을 물리치면서 성장한 이가 있었습니다. 바로 조선을 세운 이성계였는데요. 이성계의 가장 큰 업적은 1380년 황산에서 왜구의 주력부대를 크게 이긴 것이었습니다. 이 해에 고려는 최무선이 중국 대륙에서 배워온 화약 제조법을 활용해 진포(금강 입구)에 침입한 왜선 500여척을 불태우는 성과를 거두기도 했지요. 나라가 어지러운 상황에서도 나름 군사적 기술 발전이 있었던 셈이죠.



1374년 공민왕이 시해되고 중립파였던 이인임은 우왕을 추대하게 됩니다. 이후 고려는 명과 원 사이를 오가며 양면외교를 추구하는데요. 원나라가 사실상 멸망해가던 시기에 명나라는 철령위 설치를 요구합니다. 철령위란 철령 북쪽의 땅이 원래 원나라에 의해 통치 되었으니 자신들이 그 땅의 통치권을 가져가겠다는 의미였습니다. 그리고 1388년인 우왕 14년에 원이 쌍성총관부로 관할했던 지역을 명나라에 직속된 지역으로 삼겠다고 통고하게 됩니다.


이에 당시 고려의 권력을 쥐고 있던 최영이 요동정벌을 주장하고 나서게 됩니다. 8도 도통사를 최영이 맡고, 조민수를 좌군도통사로, 이성계를 우군도통사로 삼아서 나서게 되지요. 하지만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고 주장했던 이성계가 압록강 한 가운데 이쓴 위화도에서 회군해 개경으로 돌아오게 됩니다. 이 결정이후 이성계 일파는 최영을 비롯한 반대파를 제거하고 우왕을 쫒아냅니다.


회군을 결정한 공신이었지만 권문세족이었던 조민수가 우왕을 쫒아내고 창왕을 옹립하면서 잠시 권세를 누렸지만, 이성계 일파에 의해 실각당하고 맙니다. 또한 창왕도 공민왕의 자손이 아닌 신돈의 자손이란 명분으로 축출하죠. 이 때부터 정치적 실권은 권문세족이 아닌 신진사대부들의 손에 완전히 넘어가게 됩니다.



권력을 쥐자마자 조준, 정도전 등은 전제개혁을 추진합니다. 새롭게 토지를 측정하고 과거 토지에 대한 기록들을 불태워 버리지요. 그래서 1391년 새로운 토지법인 과전법을 공포합니다. 이로써 그동안 권문세족에 의해서 악용되고 줄어들 수 밖에 없었던 국가 수입이 늘고 새로운 관료들에게 과전을 지급할 수 있게 되어 새로운 관료들의 경제적 토대를 마련줍니다.


이들 신진사대부들은 고려의 존속여부를 두고 크게 부딪치고 분열하게 되는데요. 고려왕조의 나쁜 점을 조금씩 바꾸어 가려던 온건파의 이색과 정몽주 등과 왕조 자체를 바꾸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역성혁명파의 조준, 정도전, 남은 등으로 나뉘어진 것입니다.


결국 1392년 역성혁명파는 강력하게 반대하던 정몽주를 죽인 후 공양왕을 내쫒고 이성계를 추대해 새로운 왕조인 조선을 시작하게 됩니다.




이상은 원의 간섭기와 고려가 무너지게 되는 상황에 대한 요약글이었습니다.



참고로 한 책은


2010년 검정을 통과한 천재교육의 고등학교 한국사

2010년 검정을 통과한 비상교육의 고등학교 한국사

2002년 제작된 고등학교 국사

1996년 제작된 한국사통론 4판

2004년 제작된 한국인을 위한 중국사


이렇게 입니다.


원래는 며칠 전에 써놓긴 했었는데, 이런저런 이유로 이제서 올리게 되었습니다. ^^;; 그동안은 한국사 통론의 흐름을 따라가는 식이었는데, 원 간섭기와 고려말을 다루는 기간에 대한 부분은 그냥 따라가다가는 정신없는 글만 남기 쉽상이겠더라구요. 그래서 그 틀을 조금 수정하고 과감(?)하게 내용의 많은 부분을 뺐습니다. 최소한 고등학교 교과서에 나오는 내용은 빠지지 않도록 조심하면서요. ^^;;


다음 편은 많은 분들이 잘(?) 아시는 조선 이야기가 시작됩니다.


부족하거나 보충해야 되거나 혹은 잘못된 것이 있다면 댓글을 달아주시기 바랍니다. ^^

제 개인 블로그에 동시에 올리고 있습니다. 링크된 글은 위 내용과 똑같습니다.

http://myahiko.tistory.com/15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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