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몽이 북부여에 있을 때 낳은 아들이 와서 태자가 되자, 비류와 온조는 태자에게 용납되지 못할까 두려워 마침내 오간(烏干)·마려(馬黎) 등 열 명의 신하와 더불어 남쪽으로 갔는데 백성들이 따르는 자가 많았다. [그들은] 드디어 한산(漢山)에 이르러 부아악(負兒嶽)에 올라가 살 만한 곳을 바라보았다. 비류가 바닷가에 살고자 하니 열 명의 신하가 간하였다.
"이 강 남쪽의 땅은 북쪽으로는 한수(漢水)를 띠처럼 띠고 있고, 동쪽으로는 높은 산을 의지하였으며, 남쪽으로는 비옥한 벌판을 바라보고, 서쪽으로는 큰 바다에 막혔으니 이렇게 하늘이 내려 준 험준함과 지세의 이점은 얻기 어려운 형세입니다. 여기에 도읍을 세우는 것이 또한 좋지 않겠습니까?"
비류는 듣지 않고 그 백성을 나누어 미추홀(彌鄒忽)로 돌아가 살았다. 온조는 강 남쪽 위례성(慰禮城)에 도읍을 정하고 열 명의 신하를 보좌로 삼아 국호를 십제(十濟)라 하였다. 이때가 전한(前漢) 성제(成帝) 홍가(鴻嘉) 3년(서기전 18)이었다.
- 삼국사기 백제본기, 온조왕
삼국사기에는 온조가 남쪽으로 내려와 백제를 세울 때 함께 한 10명의 신하들이 있었다고 말합니다. 그들 중 이름이 전해지는 사람은 오간과 마려 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오간과 마려라는 이름은 백제 건국의 주역인 10명의 신하들 중 한 명이라는 것 외에는 별다른 행적이 전해지지 않음에도 왠지 낯이 익은 것 같기도 한 이름들입니다. 왜 그럴까요?
주몽이 이에 오이(烏伊)·마리(摩離)·협보(陜父) 등 세 사람과 친구가 되어 가다가 ... (후략)
-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동명성왕
학계에서는 오간과 마려를 고구려의 건국 공신들인 오이, 마리와 동일인물로 간주하는 견해도 있습니다. 백제 건국 신화와 고구려 건국 신화가 대체로 비슷한 양상을 띄기 때문입니다.
원래 살던 곳에서 위협을 느껴 떠남 + 함께 떠난 신하들 - 새로운 나라를 건국함 - 원래 그 땅에 살던 맹주(비류국, 마한)를 정복함
그래서 후에 백제에서 고구려의 건국 신화를 차용했을 때 그 이름들도 차용한 것이 아니냐는 겁니다. 이건 그냥 여러 학설들 중의 하나이니 그러려니 하시면 되겠습니다. 어차피 입증도 불가능한 문제이고...
여하튼 유일하게 이름이 전해지는 10명의 신하들인 오간과 마려는 그러합니다.
그럼 다른 8명의 신하는?
을음(乙音), 해루(解婁), 흘간(屹干), 곽충(郭忠), 한세기(韓世奇), 전섭(全攝), 범창(范昌), 조성(趙成)
실제로 오간, 마려 외에 나머지 여덟 명의 이름이 전해지기는 합니다. 다만 을음과 해루, 흘우 외에는 모두 성씨 시조로서 족보에만 전해지는 인물들이라 신빙성이 떨어지는 편입니다. 성씨 시조라도 교차검증만 되면 신뢰도가 상승하겠지만, 백제 초기 인물이 교차 검증이 될리가..
3월에 왕이 재종숙부 을음이 지혜와 담력이 있다 하여 우보(右輔)로 임명하고, 그에게 군사 관계의 임무를 맡겼다.
- 삼국사기 백제본기, 온조왕
41년(23) 봄 정월에 우보(右輔) 을음(乙音)이 사망하자, 북부의 해루(解婁)를 우보로 임명하였다. 해루는 본래 부여 사람이었다. 그는 도량이 넓고 식견이 깊으며, 70세가 넘었으나, 체력이 강하여 등용한 것이다.
- 삼국사기 백제본기, 온조왕
3년 겨울 10월에 동부 흘우(屹于)가 마수산(馬首山) 서쪽에서 말갈 과 싸워 승리하였다. 이 전투에서 죽이거나 생포한 자가 매우 많았다. 왕이 기뻐하여 흘우 에게 말 열 필과 벼 5백 석을 상으로 주었다.
- 삼국사기 백제본기, 다루왕
하지만 을음, 해루, 흘우도 삼국사기 그 어디에서도 열 명의 신하 중 한 명이란 구절은 없습니다. 즉, 후대의 창작이라고 봐야할 겁니다. 다만 을음은 왕의 재종숙부라고 되어 있으니 먼 친척일테고. 해(解)라는 성씨가 백제 초기의 왕성으로도 꼽히는만큼 이 두 사람은 온조와 친한 친족이라 따라 온 인물들이긴 할 겁니다. 그리고 흘우는 온조왕대의 기록엔 언급도 없습니다.
그 외에 범창(范昌), 조성(趙成), 곽충(郭忠), 한세기(韓世奇), 전섭(全攝) 중에서 조금 더 상세한 정보를 지닌 인물은 전섭 밖에 없습니다.
전섭(全攝) 천안 전씨를 비롯한 국내 여러 전씨 가문의 도시조.
백제 건국 이후 한성군(歡城君)에 봉해지면서 지금의 충남 천안시 풍세면에 살았다고 전해진다.
(도시조는 한 가문에서 시조로 삼은 인물보다 더 선대의 조상들을 모르다가 알게 되었을 때, 그 새로 알게 된 조상 중에서 가장 높은 조상을 말합니다. 가령 경주 최씨의 선조는 최치원 선생이지만, 도시조는 사로 육촌 중 하나인 돌산 고허촌장 소벌도리입니다.)
오간, 마려 외에는 모두 역사적 실체가 불분명한 인물도 있고, 실존 인물이지만 실제 10명의 신하였는 지도 불확실합니다. 단지 재미로 읽으시라고 쓴 글입니다. 혹여나 소설을 쓸 때도 차용할만한 이야기니까요.
PS. 참고로 족보 자체가 아예 역사적으로 도움되는게 없는 물건은 아닙니다. 이건 리그베다 위키에도 있는 이야기인데 대충 이러합니다.
1. 조선 후기에 향리층들이 모여 지은 《연조귀감(椽曹龜鑑)》이라는 책에 인용된 향리들의 족보 가운데 《흥양이씨보(興陽李氏譜)》의 "신라 말기에 귀족의 후예들이 다투어 호무(豪武)를 써서 주(州)와 현(縣)을 제패하였다"라는 기술이 인용되어 있었는데, 이기백은 이 기록이 신라 말기 지방의 세력가 즉 호족이 군사력을 거느리고 있었다는 증거를 제시하는 것으로 너무도 당시의 실정을 잘 드러내고 있는 기록이라고 평가했다.
2. 진주 소씨는 신라의 상대등 알천의 후손을 칭하는 집안으로, 이기백에 따르면 1979년에 진주 소씨 서울 종친회에서 사람이 찾아와 종친회보(宗親會報)에 알천에 대한 글을 써달라고 요청한 적이 있었는데 알천은 신라의 왕족이고 김씨이므로 소씨일 수가 없다는 생각에 적당히 거절하여 보냈는데, 나중에야 신라 말에 김해(金海)의 호족이었던 김율희(金律熙)가 소율희(蘇律熙)라고도 기록되기도 한다는 점을 알게 되었고, 金은 음이 '김' · '금'이지만 그 뜻은 '쇠'이기 때문에 蘇라는 글자와 서로 통용되어 쓰일 수 있을 뿐 아니라, 8세기 원성왕과 왕위를 다투다 패한 왕족 김주원이 강릉으로 낙향한 것처럼 실제로 김춘추와의 왕위 계승을 두고 대립하기도 했던 알천이 김춘추에게 패한 뒤 지방인 진주로 낙향했을 가능성을 유추해내기에 이르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