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한 13주 중 제일 남쪽에 위치한 교주(交州)라는 동네.
현재의 중국 광동성, 광서좡족자치구와 베트남 북부 언저리 입니다.
위(魏)가 촉(蜀)을 정벌한 해이기도 한 서기 263년, 오(吳)의 지배 하에 있던 교주의 교지(交趾)라는 곳에서 여흥(呂興)이란 이가 반기를 드는 일이 일어납니다. 반란의 배경은 이렇습니다. 강남의 오지에 위치해있던 관계로 만성적인 인구부족에 시달려왔던 오나라는 국내의 이민족들을 잡아다 쓰는 것으로도 모자라 현재의 대만이나 하이난섬에까지 '사람사냥' 원정대를 보낼만큼 인구확보에 열을 올리고 있었고 남쪽 변방의 교주에도 연신 압력을 넣어 현지 지방관들에게 일정수의 인구를 잡아다 올리라는 명을 하달하곤 했었습니다.
그러다 우방이었던 촉나라가 위에게 멸망당하자 위기를 느낀 오는 국력에서의 열세를 절감, 확장된 전선을 수비할 병력을 징발하고자 각지의 지방관들에게 더 많은 징발인원을 요구했고 특히 이민족들과 맞닿아 있는 교주에는 이전보다 더 많은 압력이 가해집니다. 이 때문에 징발을 담당하는 여흥을 비롯한 지방관들의 부담은 가중되었고 가뜩이나 교주 주변에 수두룩하게 널려있는 이민족들을 다스리기도 힘든마당에 더 징발해서 올리라는 중앙의 명령이 떨어지니 못해먹겠다 싶었던 차에 결국은 반란을 일으켰던 것이죠.
여흥은 자신에 동조하는 무리와 이민족들을 모아 중앙에서 사자로 온 등순과 교지의 태수 손서를 살해하고 인근의 군현까지 진출하며 기세를 올리다가 때마침 위가 촉을 멸한 것을 계기로 위나라로 투항을 요청합니다. 공짜로 영토가 생긴 셈이었던 위나라는 이를 흔쾌히 허락하고 여흥을 '사지절 도독교주제군사 남중대장군' 라는 큼지막한 벼슬을 하사하고 안정현후로 봉함으로서 교주에서의 통치권을 장악합니다. 그리고 머지않아 여흥은 부하의 배신으로 살해당하지만 교주에서의 위나라의 영향력은 여전했습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위나라는 사마씨의 진(晉)으로 교체되었고 진의 무제(武帝) 사마염이 머지않아 군을 크게 일으켜 공격을 가해올 것이란 걸 잘 알고 있던 오나라는 후방이라 할 수 있는 교주 탈환의 필요성을 절감합니다. 국력의 열세로 양국의 주요 대치전선인 장강에서의 수비도 벅찬 마당에 행여나 교주에서 진의 공격이 감행될 시 병력이 양분될 우려가 있기 때문이었죠. 이런 이유로 서기 268년, 황제 손호는 교주자사 유준과 장군 수칙으로 하여금 교주 탈환을 지시하지만 진의 방어도 만만치 않았던지라 족족 패하는 오군을 본 인근의 울림, 구진 등의 군현들이 되려 진으로 귀부하는 바람에 진나라만 돕는 꼴이 되었죠.
코에이의 삼국지9에서도 등장하는 인물들이기도 합니다. (차례로 유준, 수칙, 양직) 양직은 진의 교주자사로 오의 유준과 수칙의 공격을 선방해낸 인물입니다.
승세에 힘입은 양직은 모경, 동원 등의 휘하장수들과 더불어 역공에 나서 합포란 곳에 주둔하고 있던 오군을 대파하여 유준과 수칙을 죽이는 전공을 세우고 모경을 울림태수, 동원을 구진태수로 삼아 재차 있을 오의 침공에 대비합니다.
교주의 여러 군현들의 위치입니다. 삼국지9에서의 모경.
그러나 오나라는 이에 굴하지 않고 이듬해인 서기 269년, 재차 교주 공격에 나섭니다. 창오태수 도황, 감군 우사, 위남장군 설후 등은 육로로 남하했고 감군 이욱, 서존은 해로로 남하, 양군은 합포에서 합류하여 교지공격에 돌입하려 했지만 그리 평탄치만은 않았습니다.
(차례로 도황, 설후, 우사)
문제는 감군 이욱이 어느 길잡이 장수의 길안내가 영 시원찮자 대뜸 죽이고 회군해버렸던 것이었는데요. 당연히 이를 두고 조정에서는 이욱과 서존의 죄를 물으려 들었고 더구나 폭군으로도 익히 유명한 손호의 버프까지 더해져 그 가족들이 멸문지화를 당하는 것으로 사태가 마무리되긴 했지만 둘 중 한갈래의 군세가 싸움도 못해보고 꺾여버렸다는 점에서 시작이 좋지많은 않았던 것이죠.
손호로부터 남은 너네라도 꼭 교주를 탈환하라는 명령을 받고 모든 부담을 떠안게 된 도황, 설후, 우사가 이끄는 병력은 합포에 머무르며 착실히 교지 공략을 위한 준비를 갖춥니다. 본격적인 공격은 서기 271년에 이루어진 것으로 미루어 짐작컨데 근 1년 반에 가까운 시간동안 합포에 주둔한 것으로 보입니다. 이때 이곳저곳에서 끌어모아 동원된 병력이 무려 10만으로, 그만큼 오나라가 교주 탈환에 큰 의미를 두고 있었음을 알 수 있는 부분이라 하겠습니다.
그리하여 서기 271년, 오군은 먼저 구진군을 공략하여 앞서 진의 교주자사 양직이 임명한 구진태수 동원을 죽이고 양직의 지시로 당도한 원군도 격파하여 구진군 점령에 성공, 승세를 몰아 교지군까지 탈환하고 양직과 모경을 포로로 사로잡는 성과를 거둡니다. 이때 앞서 몇년전에 모경에게 죽은 장군 수칙의 아들인 수윤이 아버지의 원수를 갚는다며 포로로 잡힌 모경의 배를 갈라 죽였다고 하는데요, 서로 욕을 주거니 받거니 하며 욕배틀을 벌였다고 합니다.
앞서 위에서 말씀드린 오의 장수 수칙의 아들인 수윤(왼쪽)입니다. 여담으로 이후 수윤은 탈환한 합포의 태수가 되었는데 머지않아 서기 280년, 진나라의 대규모 오 정벌이 시작되기 직전에 반란을 일으킨 수하장수 곽마(오른쪽)에게 살해당합니다.
이로써 구진군과 교지군의 탈환으로 이전에 진으로 항복한 일남군도 다시 귀순하여 오나라는 온전히 교주 탈환에 성공했고 손호는 도황을 교주목으로 삼아 근방의 이민족들까지 소탕하게 하여 안정화에 주력합니다. 하지만 그로부터 불과 몇년 후에 위에서 말씀드린 것처럼 수윤의 휘하부장인 곽마가 교주에서 중앙에 반발하여 난을 일으켰고 하필이면 난이 발발한 시기가 진의 대규모 오 정벌이 시작되기 직전이었던지라 외침과 내란으로 혼란을 빚던 오나라는 결국 멸망하게 됩니다. 결국은 교주 때문에 이래저래 발목잡히다 볼일 다봤다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