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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양 총영사관 주최 한·중 국제학술제 개최
(선양=연합뉴스) 신민재 특파원 = '비운의 세자'로 불리는 소현세자(昭顯世子·1612∼1645)가 병자호란 직후 청나라에 볼모로 끌려가 8년을 생활했던 중국 랴오닝(遼寧)성 선양(瀋陽) 현지에서 그의 삶을 재조명하는 학술행사가 열렸다.
한·중 학자들은 22일 주선양 한국총영사관이 주최한 '제1회 사행단 문화축제'의 주 행사로 열린 국제학술제에서 소현세자의 선양 생활과 역할, 당시의 시대상에 대한 발표와 토론을 벌였다.
조선의 16대 왕인 인조 5년(1627) 정묘년, 조선에 들이친 청은 9년 뒤인 인조 14년(1636) 병자년에 두 번째 대군을 일으켜 조선을 침공했다.
인조는 남한산성에서 한 달가량 항전하다가 삼전도로 나와 땅에 머리를 9번 찧는 의식으로써 항복했다.
명나라와 전쟁 중이던 청은 당시 수도였던 선양으로 인조의 아들 소현세자와 봉림대군(鳳林大君·뒷날의 효종) 등을 볼모로 데려갔다.
힘없는 조국과 비극적 운명을 같이한 소현세자는 1637년 4월 선양에 도착, 청이 명에 승리한 뒤 베이징(北京)으로 천도한 1644년 겨울까지 무려 8년간 볼모 생활을 했다.
서울대 규장각 한국학연구원 김남윤 연구원은 "병자호란 직후 청이 소현세자를 비롯해 3정승 6판서의 자제까지, 많은 인질을 선양으로 끌고 간 것은 조선을 압박하기 위한 수단이었고 명과의 전쟁에 필요한 물자와 식량, 병력을 조선에서 조달하기 위한 것"이었다고 설명했다.
김 연구원은 "조선과 사대관계를 맺은 청은 약조 이행을 촉구하며 수시로 조선을 압박했고 모든 사안에 대해 소현세자에게 먼저 말하고 장계(狀啓)로 조선 조정에 알려 실행하게 했다"면서 "소현세자는 대청(對淸) 외교의 최전선에서 청의 강압에 응대하면서 어떻게든 조국의 부담을 줄이기 위해 노력했고 김상헌 등 청에 투옥된 척화신들을 보살피려고 애썼다"고 덧붙였다.
산둥대 천상성(陳尙勝) 교수는 "당시 청 황제는 소현세자를 여러 방면에서 우대해 청에 호감을 느끼게 하는 한편 군사훈련을 참관하게 하는 등 일종의 압력을 가해 명을 돕고 청에 반대하는 조선의 생각과 태도를 바꾸려 했다"면서 "이는 결과적으로 소현세자가 부친인 인조의 의심을 사는 원인이 되기도 했다"고 지적했다.
8년간 볼모 생활을 견디고 1645년 고국으로 돌아온 소현세자는 장기간 청에 머물며 '친청파'가 됐다는 소문과 청이 조선왕을 자신으로 교체하고 인조를 대신 선양에 오게 할 것이라는 모함 탓에 인조의 냉대를 받아야 했다.
아들을 의심한 인조는 귀국한 세자가 군신의 예를 보이려 하자 이를 거부했고 소현세자의 동생 봉림대군을 후계자로 삼았다.
소현세자는 결국 귀국한 지 3개월 만에 숨을 거뒀다.
일각에서는 부친인 인조 또는 정적들에 의한 '독살설'을 주장하지만 오랜 볼모 생활로 지병인 학질이 악화해 숨졌다는 게 일반적인 견해다.
서울대 이상찬 교수는 "당시 선양에 들어간 소현세자 일행은 문·무관과 역·의관 등을 합쳐 182명이었는데 청은 경비 부담 때문에 인원 감축을 요구하기도 했다"면서 "소현세자가 머물던 선양관소(館所)는 청군에 포로로 끌려온 조선인들에 대한 대민지원을 비롯해 오늘날의 영사업무 창구까지 겸하면서 경비가 늘 궁핍했다"고 설명했다.
소현세자가 생활했던 선양관소는 현재는 아무런 표지나 흔적이 없고 당시 사료들을 토대로 대략의 위치만 추정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