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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벌시대 5화 "산서의 토황제 염석산" (上)
게시물ID : history_17835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Lemonade
추천 : 8/4
조회수 : 1219회
댓글수 : 0개
등록시간 : 2014/08/22 14:36: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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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화는 "산서왕" 염석산(1883~1960)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배신과 남 뒷통수 까기를 밥먹듯 하던 군벌시대에서도 그야말로 궁극의 경지라 할 만한 인물이 바로 이 양반입니다. 앞화에서도 이미 다루었지만 그에게는 진정한 친구도, 적도 없으며 오로지 자기가 살아남는 것과 기반을 지키는 것만이 최우선이었고 어떤 치사하고 비열한 수단과 방법도 가리지 않았습니다. 허황된 망상보다 철저한 현상유지에 목표를 두고 승자의 편에 서는 것만이 살 길, 이라며 탁월한 생존본능을 보이며 별로 큰 욕심 안 부리고 적들과 타협하고 절충하여 1911년부터 1949년까지 38년간 산서성에서 장기집권합니다.

그는 주요 군벌들중에서 가장 세력이 약했습니다. 그럼에도 손잡았다 뒷통수 까기를 반복하며 어느 군벌보다도 가장 오래 살아남았지만 결국 마지막 순간에 공산군에게 패하여 모든 것을 잃은채 장개석 따라 대만으로 가서 책이나 쓰며 조용한 여생을 보내게 되죠. 어쨌든 패망하고 비명횡사하는게 태반이었던 군벌들중에서 그래도 천수를 누린 몇 안되는 사람중에 한명입니다. 바퀴벌레에 맞먹는 끈덕진 생존력이 그의 특징. 그래서 별명이 "불도옹(오뚜기)"였습니다.

염석산은 산서성 출신으로 청말 일본 육군사관학교에 유학가서 보병과를 졸업한 후 고향으로 돌아와 청군에 들어간후 고속승진을 거듭해 산서독군(성의 군사령관)이 되어 군 개혁과 신식육군 창설에 앞장섭니다. 또한, 당시 여타 엘리트들과 마찬가지로 반청운동에 동참하였고 1911년 10월 10일 호북성 무창에서 신군 봉기가 일어나자(신해혁명) 이에 동조하여 휘하 병력으로 반란을 일으켜 산서성 독립과 청에 대한 불복종을 선포합니다.

청나라가 망하고 원세개가 들어서자 다시 충성을 맹세하고 알아서 군대를 감축함으로서 원세개의 미움을 받지 않고 기반을 유지하죠. 그러나 원세개가 죽자 라이벌인 진북진수사 공경의 병력을 강제로 자기 휘하에 넣고 산서성장인 장발서를 쫓아내고 자기가 산서성장이 됩니다. 이때부터 사실상 자신만의 킹덤을 세우게 되죠. 산서성은 북경의 북양정부에 형식상 복종하면서 간섭은 받지 않는 반독립된 상태였습니다. 이런 염석산의 고립주의, 불간섭 주의를 당시 미국의 외교정책과 빗대어 소위 "산서 먼로주의"라고 부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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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산서성과 성도 태원. 출처 : 위키백과 >

그는 장작림, 오패부같은 야심이 차고 넘치던 여타 대군벌들과 달리 영토 확장에 나서지 않고 산서성 하나 지배하는데에만 만족합니다. 사실 그의 밑천인 산서성은 지금도 그렇지만 농지가 척박하고 근대화된 공장도 거의 없어 중국내에서도 가장 가난한 동네중의 하나입니다. 자체 세수도 굉장히 적고 재정자립도가 20% 미만인지라 중앙정부의 지원에 전적으로 의존해야 했습니다. 북경을 좌지우지하는 대군벌들 바로 옆에 끼여 있는지라 영토 확장은 커녕 살아남는 것조차 장담할 수 없었죠.

따라서, 한창 옆동네에서 단기서, 오패부, 장작림 등 쟁쟁한 대군벌들이 북경을 놓고 치고 박고 싸울때 그는 중앙에 대해 적당히 처세술을 부리며 산서성의 근대화와 재정개혁, 군의 근대화를 위해 내치에만 집중합니다. 광공업 진흥을 위해 태원에 대규모 공장과 무기공장을 건설하고 조세제도에 대해서도 개혁을 시도합니다. 그럼에도 그의 통치는 일반 백성들에게 굉장히 가혹했고 가렴주구와 높은 세금으로 원성이 자자합니다.

염석산은 농민들의 토지를 대량으로 빼앗아 소작을 주고 여기다 소작 보증금을 뜯고 고리대까지 합니다. 아편에 대해서도 처음에는 엄금했지만(그래도 필놈은 다 피었음) 살림이 쪼달리자 "진수재정정리처"라는 별도 부서까지 만들어 직접 판매하여 돈을 벌기도 합니다. 또한 성정부 지출의 80%이상이 군사비였습니다. 이건 뭐 강성대국을 꿈꾸는 김정일정권보다 더 하죠. 따라서 변경에는 기아에 강도와 비적들이 창궐하죠. 물론 그시절에 염석산만 그랬던 것은 아니지만 산서성이 다른 동네보다 더 산간오지에 가난한 동네인지라 백성들의 어려움은 몇배나 가중되었습니다. 나중에 남쪽 동네에서 쫓기던 모택동의 홍군이 1만km의 장정끝에 이 동네로 들어온 것도 워낙 치안이 극악이고 백성들의 삶이 어려워 불만이 높아 공산당이 뿌리 박기 좋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중원에서 패권을 놓고 벌어지는 용호상박의 전쟁에 염석산은 산서성의 문을 꽉 잠군채 쇄국정책을 펼치지만 흥선대원군시절의 조선과 마찬가지로 외부에서 군침흘리는 군웅들의 마수를 피할 수는 없었습니다.

1926년 장작림-오패부 연합군과 풍옥상간의 소위 "직풍봉전쟁"이 발발하자 풍옥상은 산서성을 비롯해 서북 전역을 장악하여 기반을 강화하려고 합니다. 장지강의 국민군 제1군이 장가구에 진을 치고 산서성을 포위하고 침공합니다. 소련군의 장비로 무장하고 풍옥상에 의해 엄격히 훈련받은 국민군에 비해 염석산의 晉軍(산서성이 춘추시대 진나라가 있던 곳이라 산서군을 진군이라 통칭)은 그야말로 오합지졸이라 도처에서 밀립니다. 이때 북경 서북쪽의 남구에서 장작림-오패부 연합군이 국민군을 포위 공격하여 송철원군을 괴멸시키고 찰합이성의 연경까지 진격합니다. 덕분에 염석산은 한숨 돌린후 추격해 수원성의 일부를 점령하죠. 염석산이 처음으로 산서성 밖으로 나온 것이었습니다. 이 과정에서 석우삼의 국민군 제6군을 비롯해 다수의 부대가 염석산에게 투항하여 세를 불립니다.

그러나 곧 장개석의 북벌군이 군벌군대를 격파하며 북상하자 염석산은 피아간의 전력을 저울질한후 당장 깃발을 바꿔달고 장개석에게 붙습니다. 그리고 국민혁명군 제3집단군 사령관이 됩니다. 같은 시기 풍옥상도 국민혁명군 제2집단군 사령관이 되었죠. 어제까지 적이었다가 오늘은 같은 편이 되고 어제의 친구가 오늘의 적이 되는 것이 군벌시대의 전형적인 모습이었습니다.

70만에 달하는 병력으로 서쪽과 남쪽에서 파죽지세로 밀고들어오는 북벌군에 의해 장작림, 오패부, 손전방 3대 군벌이 연합한 "안국군"은 제대로 싸우지도 못한채 붕괴됩니다. 염석산은 풍옥상, 하응흠과 연계해 직예성을 침공해 장가구와 보정을 점령하고 북경 남쪽으로 진격합니다. 장작림은 장학량, 양우정의 주력부대를 집결시켜 북경에서 결전을 각오하지만 중과부적을 깨닫고 만주로 돌아가다가 아시다시피 테러로 비명횡사합니다.

뒤이어 염석산의 제3집단군 제1군이 북경에 진주하죠. 6월 11일 신강성장인 양증신이 복종을 선언하고 반년뒤인 1928년 12월 29일 장학량의 "동북역치"선언으로 신해혁명 이래 분열되었던 중국은 장개석과 국민당정권을 중심으로 20년만에 통일을 이룩합니다.

북벌전쟁에 동참한 댓가로 염석산은 오패부와 장작림이 보유했던 방대한 영토를 획득하여 산서성외에 수원성과 직예성, 찰합이성등 그가 꿈에 그리던 북경, 천진 등 화북의 노른자리를 죄다 차지하죠. 산서성 촌놈이 그야말로 전국레벨의 대군벌이 된 것입니다. 그러나 앞화에서도 언급한 바가 있지만, 장개석의 북벌이 구식군벌들의 연합군대이었고 이들 모두 패업을 꿈꾸는 인간들인 이상 평화와 공존도 일시적인 것이고 새로운 대립과 전쟁은 피할 수가 없었죠.

장개석은 진정한 통일을 위해 난립된 군벌들의 힘을 약화시키고 이들을 중앙정부에 복속시킬 필요가 있었습니다. 군벌 군대 역시 "사병"이 아닌 "국군"이 되어야 했습니다. 문제는 이것이 민간 주도가 아닌, 자신을 중심으로 도는 세상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었죠. 앞화에서도 언급했었지만, 장개석은 1928년 7월 11일 탕산회의에서 군축을 제기하고 다음해 1월 1일 정식으로 남경에서 편견회의를 개최합니다.



>욱이님의 블로그의 동일한 제목의 포스팅에서 발췌한 글입니다, 가독성을 고려 상 하로 글을 나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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