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41년, 베트남 북부에 설치된 중국의 행정구역인 교주(交州)의 토호 이분(李賁 : 베트남어로는 리 본)은 과거 한(漢)대에 쯩 자매의 난 이래 최대 규모의 난을 일으켰습니다. 이분의 조상들은 본래 중국인으로 신(新)의 왕망시대에 교주로 이주하여 7대째에 이르러 베트남화되어 현지의 토호로 정착했고 이분은 두루 능한 인물로 처음에는 중국 남조의 양(梁)에 출사하여 하급무관으로 벼슬을 했으나 다시 교주로 돌아왔습니다. 이때 같은 고향 출신의 병소(幷韶)도 가문이 미천하다는 이유로 벼슬을 받을 수 없어 불만을 품고 있던 터라 두사람은 곧 의기투합했습니다.
남북조 시대 남조의 양(梁)
이분은 그 후 덕주(德州)의 무관으로 재직했는데 마침 양(梁)의 교주자사였던 소자(蕭諮)가 폭정으로 민심을 잃자 이를 기회로 병소와 공모하여 반란을 일으킵니다. 이에 각지의 토호들이 호응하여 반란에 참가했고 특히 주연(朱鳶) 지방의 호족 조숙(趙肅)이 가세하자 소자는 광주(廣州)로 도주하고 이분의 군대는 쉽게 용변성(龍邊城)을 점령했고 이듬해에 양(梁)은 원정군을 파견했으나 질병으로 병력의 육, 칠할을 잃어 퇴각합니다. 북의 중국으로부터의 위협이 사라지자 이번에는 남쪽의 참파가 덕주로 침공을 해왔지만 이분은 범수(范脩)를 시켜 격퇴하게 했습니다.
이분은 중국의 정치제도를 모방하여 국가체제를 갖추어 나갔습니다. 544년, 이분은 자신을 남월(南越)의 황제라 칭하고 연호를 천덕(天德)이라 했으며 국호는 만춘(萬春 : 베트남어로는 반 쑤언)라 했습니다. 그리고 용변성을 도읍으로 삼아 궁궐을 짓고 주연지방의 호족이자 공신인 조숙을 태부(太傅)로 임명하며 백관을 설치하고 이들과 더불어 정사를 봤습니다. 그리고 이를 계기로 이분을 이남제(李南帝)라고도 부릅니다. 참고로 남월은 과거 중국의 한(漢)에 맞서 남월을 건국한 조타의 선례를 따른 것이었습니다.
만춘의 성격은 분명치 않지만, 중국계 토착 지배층과 순수한 토착세력의 결합에 의해 이루어진 나라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분이 전자를 대표한다면 호족으로 기록된 조숙은 후자를 대표한다 할 수 있겠습니다. 오랫동안 베트남을 지배해온 중국은 새로이 출현한 베트남의 자주적 독립국가를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545년 초, 양나라는 교주자사 양표(揚瞟), 장군 진패선(陳霸先)을 보내 다시 정벌케 했고 이분은 수만의 병력을 이끌고 주연(朱鳶)에서 요격합니다만 패하여 소력강(蘇瀝江)으로 물러났고 이어진 양군의 공세에 못이겨 가녕성(嘉寧城)으로 후퇴합니다.
훗날 양(梁)에 이어 진(陳)을 세우는 그 진패선입니다.
그러나 이듬해 가녕성마저 함락되자 이분은 애뢰(哀牢)족이 사는 산간지대로 들어가 진용을 재정비한 다음 전철(典澈) 호(湖)에서 양군과 대치합니다만 갑작스런 폭우로 호수의 물이 불어나는 틈을 타 진패선이 만춘군을 공격했고 이분은 대패하여 다시 소수민족이 사는 고지로 피신하지만 547년, 그곳 주민들에 의해 죽임을 당하고 그의 머리는 양군에로 보내져 이분의 난은 수포로 돌아갑니다.
이분의 사후, 그의 형인 이천보(李天寶)는 덕주로 물러나 병력을 재수습한 후 그곳의 자사를 살해하고 애주(愛州)로 진격했지만 진패선의 반격으로 오늘날 라오스 국경의 산간지대로 달아납니다. 이리하여 베트남은 다시 중국으 지배 아래로 들어가게 되었지만 때마친 양나라에서 후경의 난이 발발하자 진패선은 이를 진압하고자 서둘러 귀국했고 이후 태부 조숙의 아들 조광복(趙光復)이 반란세력을 이끌어 진패선이 떠난 양군을 대거 격파하여 궤멸시킨 후 용변성을 탈환함으로서 스스로를 조월왕(趙越王)이라 칭합니다.
- 출처 : <새로 쓴 베트남의 역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