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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포천 매장원 동사사건
게시물ID : history_17813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애비28호
추천 : 11
조회수 : 1760회
댓글수 : 5개
등록시간 : 2014/08/20 22:18:23
□ 세종 13년(1431년 신해) 2월 12일 세종 대왕께서 강무(講武)를 떠나심.
조선시대 임금이 해매다 한두차례 도성 근교와 경기도, 강원도 지역 등을 순행하며 고을 수령들과 현지에서 면담도 하고 백성들의 목소리도 듣고
또 대규모 병력을 동원하여 사냥을 하면서 군사들의 훈련 상황을 점검 하는 등 수천명의 인원이 동원되는 임금이 주관하는 가장 큰 평시(平時) 행사가 바로 강무(講武)임.
임금 혼자 행차를 하기도 하나 조선 초기에는 세자나 왕비 등을 데리고 가는것이 일반적인 관례임.​
​□ 2월 12일 경 시작된 강무는 강원도 평강(平康) 등지에서 사냥을 하고 양주(楊州) 풍천평(楓川平)에서 하룻밤을 주무심.
이때까지는 지극히 평범한 강무였음.
□ 사건전의 불길한 조짐들
1. 강무 행차가 한양을 막 출발하였고 이어 세자(후에 문종 임금)의 행차가 ​흥인문(興仁門) 밖을 나서는데 우헌납(右獻納)   
   ​민후생(閔厚生)이 세자의 행차 앞을 말을 타고 그냥 지나가버리는 사태가 발생함. 상급자 앞을 지날때는 말에서 내려야
   하는 것이 조선의 법도임. 민후생은 당일로 대기발령 시키고 집에서 근신하게 함.
2. 임금의 사냥매​인 해청(海靑)을 잃어 버림.
3. 2월 15일 임금의 말을 관리하는 한양의 사복시(​司僕寺)에서 불이나 인접한 인가 등 23채의 건물이 소실됨.
4. 여러 신하들이 민후생의 대기발령 건 등의 이유로 세자가 강무를 동행함이 불가하다고 괜한 시비를 걸고 넘어짐.
   세종 임금께서 "그럼 니네들 나랑 같이 갈꺼냐? 아님 따로 갈꺼냐?" 정도의 이야기까지 나오게 됨.
5. ​이런 저런 불미스러운 일이 생겨 심기가 불펀하신 세종 임금.
   다행히 대야잔(大也盞) 들에서 길조(吉鳥)라고 여기는 흰꿩 두마리를 포획함.
   더군다나 2월 19일에는 도망갔던 해청을 ​춘천 부사(春川府事) 정자신(鄭自新)이 보고하기를 부하들이 잡았다고 함.
   세종 임금께서 기쁜 마음에 내시를 보내 확인하라고 하심. 그게 춘천까지 날아갔구나...
불길한 일들은 여기서 끝나는듯 보였으나...​
□ 드디어 사건이 터지는 2월 20일.
며칠전부터 진눈깨비가 내림. 음력 2월 20일이라면 양력으로 3월 중후반임.
요즘 휴전선 근방의 높은 고지에는 5월에도 눈이 오다고는 하지만...
아무튼 음력 2월 말이면 봄날씨. 당연히 강무에 참여한 군사들의 옷차림도 봄놀이에 맞춰 가벼웠음.
사냥감을 영평현(永平縣) 보장산(寶藏山)으로 몰려고 몰이꾼이 이미 전날 출발하였는데 날씨도 이상저온으로 춥고 진눈깨비까지
내리지만 대신(大臣)들이 아무도 이를 말리는 자가 없었다고 함.
그나마 총제(摠制) 홍약(洪約)이란 할배가 다년간의 강무 행사 참여 노하우를 보건데 이거 날씨가 장난이 아닌데...
하시며 사냥몰이에 투입된 군사들이 날씨 때문에 위험하다고 적극적으로 사냥몰이의 중단을 요청함.
세종 임금이 처음에는 날씨가 좀 추워서 군사들이 고생 좀 하겠는데... 정도로 들으셨지만 그래도 세종 대왕 아니신가?
홍약 할배의 간곡한 요청으로 일단 대규모 사냥몰이는 정지 시킴.
사냥몰이를 중단한 임금의 행차는 일정에 맞춰 포천(抱川) 매장원(每場院)에 도착.
매장원 도착 후 더욱 진눈깨비도 많이 내리고 날씨도 몹시 한랭하고 길이 진흙구덩이가 되어 군사들과 말(馬)들이 저체온증으로 얼고 굶주리어 현기증(眩氣症)을 일으키며, 얼어 죽어 넘어진 자가 발생하기 시작함.
도진무(都鎭撫) 성달생(成達生, 성삼문의 할아버지)이 이 사실을 임금에게 즉각 보고함.
세종 임금이 크게 놀라 즉시 경기도 감사(監司) 민의생(閔義生, 아까 대기발령 당한 우헌납 민후생과 형제임)에게 명하여,
기마병을 보내어 술과 밥을 가지고 가서 동사자 및 환자들을 구료하게 함.
세종 임금께서 판단하기는 한두사람 쓰러진 정도로 보고가 되어서 그런지 사태의 심각성을 느끼지 못하심.
원래 강무 할 때 사냥몰이 하다가 한두사람 죽거나 하던 일은 늘 있던 일이었으니...
해가 질 무렵에 임금의 행차 뒤를 따르던 도진무 신상(申商)이 보니 길가에서 이미 기절(氣絶)한 자 3명 외에 거의 사경(死境)에
이른 자가 무수(無數)하고, 또 말이 넘어져 있는 것이 상당수임을 파악하여 보고 계통을 통해 승전색 (承傳色, 왕명을 전달하는
비서실장 역활의 내시) 최습(崔濕)보고함.
승전색(承傳色) 최습(崔濕)은 총제 성달생이 이미 임금의 명을 받고 구호하러 출발 하였으니 그냥 기다려 보자고 함. 
밤에 이르러 세종 임금이 낮에 확인된 동사자들의 구호 조치 상황이 보고가 되지 않아 최습에게 확인을 해보심.
최습이 신상의 말한 바를 임금에게 이야기하니 내시 전길홍(田吉洪)에게 명하여 급히 신상의 막사(幕舍)로 가서 그 연유를 물어봄.
신상은 당연히“신이 이 상황을 이미 최습에게 고한 바 있습니다.”라는 답변...
임금이 비로소 이거 장난 아니구나, 하고 상황 파악을 하심.
행사고 나발이고 뭐고 대언(代言) 김종서(金宗瑞)·남지(南智)·송인산(宋仁山)·안숭선(安崇善)주서(注書) 배강(裵杠)·병조
정랑 김영(金寧)·이만간(李萬幹)·경력(經歷) 안완경(安完慶)·찰방(察訪) 황보신(黃保身)·전과(全過)·여재(呂賫) 등에게
긴급 구조팀을 구성 하라고 명하시고 술과 밥을 가지고 길을 따라 그들을 대규모로 구조작전 실시.
그런데 파견된 1차 구호팀 조차도 겨울옷이 없는 것은 마찬가지였음.
모두 춥고 피곤하여 다른 이를 구조할 겨를도 없이 구호팀도 넘어지고 자빠지고 얼어 죽는 상황이 생겨 버림.
구호팀에서 즉시 안완경을 시켜 임금에게 "구호팀 전멸!!!"이라는 황당하기 그지 없는 보고를 올림.
임금이 다시 사복시(司僕寺) 소속의 정예기병 20명을 투입하여 술과 밥을 가지고 가서 구조하게 하니 이미 새벽에 이르름.
세종 임금의 이런 구조작전을 통해 그나마 살아난 자도 매우 많았으나 미처 구료하지 못하여 결국 사망한 자가
무려 26명에 이르고 말 69필과 소 1두가 얼어 죽어 버리는 사상 초유의 대참사가 발생함.
​그때나 지금이나 공무원들 일하는거 보면 속터지는게 한두가지가 아님.
 
□ 2월 21일
승전색 최습(崔濕)은 곤장[杖] 80대 작렬함. 보고 조치 소홀의 죄임.
일정에 따라 낮에 대야원평(大也院平)에서 머물러 중궁(中宮, 왕비)과 성비전(誠妃殿, 태조의 계비), 그리고 의정부·육조에서
늘 하던데로 풍악을 울려 잔치를 벌임.
세종 임금께서 잔치하고 밴드 불러서 놀고 그럴 기분 아니잖음? 하시고는 잠깐 후에 철거 하라고 명령함.
 
발빠르게 구조 조치를 한 경기 감사 민의생(閔義生)경력 안완경(安完慶)에게 의복 하사.
총제(摠制) 홍약(洪約)에게는 특히 남단(藍段, 고급 비단) 옷을 하사하심. 홍약 아니었으면 아마도 더 많은 인명 피해가 났을 것임.
세종 임금께서 죽은 군사들이 너무 불쌍하게 여기시어,
“우설(雨雪)로 말미암아 동사(凍死)한 자들은 선군(船軍, 수군이나 조운선의 선원)의 예(例)에 따라 부의(賻儀, 보통 쌀 ,콩 각 4섬씩)를 전달하고 복호(復戶, 사망자가 발생한 집의 해당 부역이나 세금을 몇년간 면제)해 주라.”하심.
 
 
□ 2월 22일
궁궐로 돌아 오신 세종 임금.
일단 보고 체계의 허술함을 이유로 내시 최득룡(崔得龍)·한용봉(韓龍鳳)과, 반감(飯監) 정귀중(鄭貴中)·김찬(金贊)을 의금부에
구속 시킴.
 
좌사간(左司諫) 김중곤(金中坤) 등이 상소하여 처음에 세자의 행차 앞길을 말을 달려 지나간 우헌납(右獻納) 민후생(閔厚生)의
파직을 청함.
세종 임금께서 그렇잖아도 동사자도 많이 발생하여 기분도 그러실터, 쿨하게 민후생을 파직 시키심.​
 
지신사(나중에 도승지)  황보인(皇甫仁)은 이번 매장원 동사 사건에서 보고 체계 허술 등의 이유로 스스로 대기발령을 요청함.
알아서 버로우라고 해야 하나... 아무튼 임금께서 사안의 중대성 때문인지 황보인은 집에서 대기발령.​
덩달아 해당 보고 라인에 있던 김종서(金宗瑞)·남지(南智)·송인산(宋仁山) 등도 대기발령을 요청함.
임금이 말하기를, “지신사가 이미 자기 집으로 돌아갔으니 경(卿)들은 피혐(避嫌)하지 말고 자리에 나오라.”하심.
다들 집에 가면 일은 누가 하냐?​ 사건 수습 해야지?
 
그러나 당시 임금을 직접 수행한 행재 지응사(行在支應使) 병조 참판 이중지(李中至)는 요청도 하지 않았으나 임금께서 직접 대기 발령 시켜 버림.
 
일단 사건 수습에 대해 임금께서 명령 하심.
경기 감사에게 "매장원(每場院) 근처에서 잡물을 탐색하는 자에게는 모두 인마(人馬)를 공급하게 하고, 그 주인 없는 말들은 역시 관에서 거두어 기르다가, 주인이 나타나거든 교부해 주도록 하라.”아마도 매장원 근방은 동사자+얼어죽은 말 등으로 인해 초토화 된 상황인듯.
 
□ 2월 23일
인명과 말을 구료하지 못한 가전 찰방(駕前察訪) 조수산(趙壽山)가후 찰방(駕後察訪) 민서각(閔犀角)의 탄핵을 형조에 명하심.
 
□ 2월 24일
예조 판서 신상(申商)·병조 참판 이중지(李中至)·지신사 황보인(皇甫仁)·경기 감사 민의생(閔義生)·경력(經歷) 안완경(安完慶)·찰방(察訪) 민서각(閔犀角)·조수산(趙壽山)·내시 부사(內侍府事) 최습(崔濕) 등을 의금부에 구속.
 
 2월 25일
사건의 책임 소제가 어느정도 드러남. 
예조 판서 신상(申商) : 동사자 발견 시 보고조치 불이행 및 늑장 대응.
병조 참판 이중지(李中至) : 늑장 대응.
경기 감사 ​민의생(閔義生)·경기도 경력 안완경(安完慶) : 늑장 대응.
승전색 ​최습(崔濕) : 보고조치 불이행.
찰방 ​민서각(閔犀角)·조수산(趙壽山) : 근무태만.
 
임금의 특명으로 전 총제(摠制) 김익정(金益精)을 임시 경기 감사로 삼아 사건 수습에 총력을 기울이라 하심.
 
□ 강원도 감사에게 전지하기를,
“전일 영평현(永平縣) 굴동(堀洞) 숙소(宿所)에서 방환(放還)된 시위군(侍衛軍)들로서 비에 젖은 인마(人馬)의 동사(凍死) 여부를 상세히 탐문하여 아뢰라.”혹시나 모를 추가 사상자가 있는지 다시 확인 하라는 세종 임금의 치밀한 사건 수습.
 
□ 2월 26일
사알(司謁) 김추(金湫)·별감(別監) 김인(金仁) 등 15명이 대언(代言)을 따라 동상에 걸린 사람들을 가서 구하게 하였던바, 김인(金仁) 등은 명령을 듣고도 가지 않았으며, 별감 영우(英雨)는 그들을 응급 구료할 술과 밥을 가지고 가다가 중도에서 임의로 돌아온 것이 밝혀져, 명하여 영우는 장형 1백에 처한 뒤에 다시 본역(本役)에 환원하게 하고, 김인 등은 곤장 70에 처함.
 
사건 조사 중 동부대언(同副代言) 안숭선(安崇善)이 의금부로부터 돌아와 세종 임금에게 아룀.
신상(申商)이 말하기를, ‘성상께서 신을 도진무(都鎭撫)로 삼으신 것이 어찌 용맹이 있다 해서 하셨겠습니까. 〈이는〉 소신(小臣)이 성상의 뜻을 저버리지 않는 까닭일 것입니다. 전일엔 신의 종자(從者)까지도 또한 추위에 얼고 굶주려서 뒤에 처져 있었기 때문에, 신이 비록 그 동상한 사람들을 목격하였사오나 구료할 도리가 없으므로, 즉시 〈그 상황을〉 최습(崔濕)에게 고했던 것입니다. 신이 감히 제 죄를 면하기 위하여 망령된 말로 성상을 기만하겠습니까.’ 하고는, 이내 눈물을 흘렸습니다.”
하니, 임금이 기분이 좀 풀리셨나 봄. 웃으며 말하기를,
“종자가 없었다면 구료하기란 과연 어려웠을 것이다.”라고 신상에 대해서는 무거운 처벌을 내리지 않으실듯 함.
 
□ 2월 27일
관련자들의 처벌
이중지 - 서흥(瑞興)으로 귀양
민의생(閔義生) - 온수(溫水)로 귀양
민서각(閔犀角) - 파면
최습(崔濕) - 직첩(職牒)만 거두고 본관(本官)의 군역(軍役)으로 충당
황보인(皇甫仁) - 파면
신상(申商)·조수산(趙壽山)·안완경(安完慶) - 석방 
 
한편 지난번 도망갔다던 해청(海靑)을 잡아 들인 춘천 부사(春川府使) 정자신(鄭自新)에게 옷 1벌.
관노(官奴) 고을도(古乙道)에게 면포(緜布) 15필과 계집 어리(於里)에게 10필을 하사 하심.
이런거 원래 아낌 없이 하사 하시던 세종 임금께서 “이것은 새로 잡은 매가 아닌데 상품이 과하지 않은가.”라고 하심.
허허^^ 원래 처음 해청이 도망 갔을때 임금께서 도망간 해청을 잡을 경우 새로 잡은 예에 의해 포상을 듬뿍 하신다고 함.
​근데 이제와서 말이 바뀌심.
세종 임금께서 가만 생각해 보니 자신의 말이 바뀐것을 깨달으시고 “원래데로 하라.” 명하심.
그만큼 이번 매장원 동사사건 때문에 세종 임금께서도 정신 없으심. 기억력까지 오락가락 하게 만들 정도.
 
 
□ 2월 29일
매장원 동사사건 이후 세종 임금께서 시범 케이스로 대대적인 인사 이동을 실시하심.​
병조 판서 이명덕(李明德)
공조 판서 정초(鄭招)
판한성부사(判漢城府事) 노한(盧閈)
도총제(都摠制) 서선(徐選)
최사강(崔士康) 병조 참판 
이조 참판 김맹성(金孟誠)
예조 참판 강주(姜籌)
인순부 윤(仁順府尹) 김익정(金益精)
병조 참의 김상직(金尙直)
지신사(知申事) 안숭선(安崇善)
동부대언(同副代言) 이긍(李兢)
우헌납(右獻納) 나득강(羅得康)
좌정언(左正言) 채윤(蔡倫)
관련 경호, 의전, 보고 라인의 관리들을 싹 교체함.​
 
□ 3월 2일
어느 정도 사건 관련자들의 처벌과 문책성 인사이동까지 정리 하고 세종 임금께서,
매장원(每場院) 동상자(凍傷者) 14명 이상을 구원해 살린 자에게는 쌀 30두(斗)를 주고, 5명 이상은 20두를, 4명 이하는 15두를 내려 주라.”라고 하심. 선처벌 후포상.
 
□ 5월 16일
아쉽지만 사건 관련자 거의 대부분이 풀려남.
 
□ 매장원 동사 사건이 있은지 1년 뒤인 세종 14년(1432년 임자) 3월
다시 강무를 떠나신 세종 임금.
이때 작년 동사 사건도 있고해서 예조판서 신상이 날이 좀 따뜻해지면 가자고 요청함.
세종께서 군사들 옷 두껍게 하고 가면 되지 않냐? 하시고는 예정데로 출발.
여전히 순행 코스 중의 하나인 매장원(每場院)에 머무심.
작년의 동사 사건 때문에 군사들의 옷차림을 단단히 하게 하고 강무를 다니심.
그런데 이번에는 독(毒)이 있는 나물을 먹고 죽은 사람이 두사람 발생함.
병조에 명령하여 죽은 두사람을 다시 수군(水軍)의 예에 의하여 치부(致賻, 부의)하고 복호하게 함.
또 두루 군중에 타일러서 이름을 모르는 야채(野菜)를 먹지 못하게 하셨다는 웃지못할 상황이 벌어짐.
세종 임금 이후 실록에는 매장원에 대한 기록이 나오지 않았다고 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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