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장 상화하택 下
“저리 꺼져라. 요동 오랑캐 놈들아.”
“흥. 절강성 촌뜨기가 겁이 없구나.”
태화강 상류 강변 가에는 유격장 파새의 보병 2천과 참장 양등산의 기병 1천 기가 서로 창검을 꼬나물고 대치하고 있었다. 사건의 발단은 이러했다. 명군 보병의 유인과 기병의 매복이 성공하고 왜군 잔당을 태화강의 모래톱까지 몰아넣은 데까지는 좋았다. 그러나 승리가 확실시되자 양군은 더 많은 공을 차지하려 투닥거리기 시작했다. 전공에 대한 탐욕과 평소 상대방에 대해 가지고 있던 편견이 쌓이고 쌓여 어느새 적군으로 마주한 꼴이 돼버렸다.
“파 유격. 이번 전투의 주력은 우리 북병이니 병사들을 다독여 물러나도록 하오.”
“양 참장님. 거 무슨 말씀이오? 남군의 목숨을 걸고 유인을 해오지 않았더라면 쓸 수 없는 전술이었소. 북군이 양보하시지요.”
양측의 선봉장이 물러서지 않는 설전을 벌였다. 해결의 실마리는 풀리지 않고 일은 점점 꼬여갔다. 이런 상황은 전원 옥새를 각오하고 모래톱에서 대기 중인 시시도 모토츠구 이하 왜군 장졸들에게는 황당함의 극치였다.
파새와 양등산이 말한 남군과 북군 혹은 북병과 남병은 조선에 파병된 명군의 출신을 부르는 별칭이다. 먼저 북군(북병)은 요동성과 광년성 등지에서 동원된 군사들로서 여진족들을 비롯한 동북변방의 이민족들을 제압하기 위한 마군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이들은 임진왜란 발발 후 가장 먼저 투입된 군사들이었는데, 달자 같은 호인들이 섞여 있다 보니 군기가 거칠고 포악하여 조선 백성들을 약탈하고 죽이는 등 그 횡포가 극에 달했다고 한다. 심지어 조선인의 목을 벤 뒤 머리털을 깎고선 왜군의 수급을 가장하여 군공을 세우는 등의 극악무도한 짓도 서슴지 않았다고 한다.
이에 비해 남군(남병)은 절강․복건성의 보병들로 주로 이루어져 있었는데 이들 성은 중원의 동쪽 해안 지역으로 왜구가 침노하여 약탈활동을 벌일 때가 많았다. 이에 이들은 왜구를 방어하는데 특화된 전술을 익히게 된다. 남병은 북병에 비해 군기가 엄정한 것으로 소문이 났는데 이들 또한 1593년 1월에 있었던 제4차 평양성 전투에서 승리한 뒤 제독 이여송이 약속한 은 5천 냥을 주지 않자 반란을 일으키고 만다. (이여송은 반란을 일으킨 남군을 의주로 유인하여 살해하라는 명령을 내리기도 했다.)
그렇다면 조선 조정은 어느 군을 선호했을까? 정답은 남병이다. 남군 또한 앞에서 기술했듯이 문제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니었으나, 전술적으로 남병은 조선군과 같은 보병 진법을 구사하고 거기다 화기를 다루는 포병이 있어 왜적을 효과적으로 물리치기 좋았고(탄금대 패전 이후 조정은 육성에 시간과 재력이 많이 드는 기병보다 적은 시간과 비용으로 키울 수 있는 보병을 양성하는데 전력을 다했다.) 경제적으로도 군량만 지급하면 되는 남군이 기마를 위해 마초와 콩 등을 부가적으로 공급해야 하는 북군보다 합리적이었기 때문이다.
문제는 남·북군 상호 간 다른 상대의 존재를 눈엣가시처럼 여겼다는 것이다. (이들은 급료에서도 차이가 났는데 남병은 안가은 5냥과 월량은 1냥 8전을 주었고 북병은 안가은 5냥과 월량은 1냥을 주었다.) 앞서 말한 평양성 전투에서도 양군은 왜군의 수급을 얻기 위해 혈투를 벌였다. 그 때문에 애꿎은 조선인이 대신 희생되기도 하였다.
이처럼 남병과 북병이 화합하지 못하고 앙숙이 되어 군공을 다투는 데 연연하는 것은 선조실록에도 단골로 기록되어 있다. 그만큼 이들의 불화는 공공연한 것이었다.
“파새 네 이놈! 양 경리께서 널 어여삐 여기니 기고만장해져서 이제는 상장에게 대드는 것이냐? 네 정녕 북방 기병에게 쓴맛을 봐야 정신을 차리겠느냐?”
파 유격이 은근슬쩍 자신에게 반항하자 양등산은 노기를 띠고는 소리쳤다.
“햐. 이보시오. 양 참장. 내가 당신의 직속부하도 아니고 우리는 경리 각하께서 임명한 동등한 선봉장이란 말이요. 선. 봉. 장. 아시겠소.”
파새는 화난 참장을 바라보며 이죽거렸다. 양등산은 그런 그에게 말없이 기병창을 겨누었다.
‘어쭈. 세게 나오시는데…. 흥. 절강병법은 왜구들만 상대하는 진법이 아니거든. 저런 개뼈다귀 같은 잡종 호족 놈들에게 뜨거운 맛을 보여주지.’
유격은 그의 위협이 겁나지 않았다. 자신과 자신의 군사들 그리고 그토록 연습해온 진법을 신뢰했기 때문이다.
파새가 그토록 철석같이 믿고 있던 절강병법은 명나라 절강도사첨사였던 척계광이 고안한 전술로 해안가로 쳐들어오는 왜구들을 효과적으로 막는데 그 초점이 맞춰져 있었다. 특히 원앙진이 유명한데, 이는 여러 명의 병사(평범한 농민 징집병)가 검술에 전문화된 왜적 무사를 상대하는 데 큰 힘을 발휘하였다. (척계광은 이 진법으로 1561년에 왜구가 대주에 상륙하자 원앙진으로 대항해 1개월 이상 버텨서 적병 5천여 명을 죽였다.)
조선 또한 그의 전술을 채택하여 임진왜란 이후 왜적을 상대하는 집단보병전술로 발전시켰다. 그러나 이러한 특화전략은 병자호란이 발발하자 조선군이 속수무책으로 당하는 요인이 되었다.
그렇지만 척계광이 절강병법을 정리하여 남긴 기효신서에는 기마대를 상대하는 병법 또한 상세히 기술되어있다. 그 또한 서도지휘첨사가 되어 북방의 타타르족을 상대한 경험이 있었기 때문이다.
“와 아아”
“장군. 적의 진지 부근에서 함성이 들리고 있습니다.”
“응?”
양등산을 대적할 생각에 들떠 있던 파새가 부관의 다급한 목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제길….”
일촉즉발의 위기상황은 의외의 곳에서 풀리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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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군. 돌격!”
오타는 큰 칼을 뽑아 하늘을 찌르며 명령했다. 용기백배한 군사들이 너도나도 달려가고 있었다.
‘정말 위험했었어….’
오타는 조금 전 상황을 생각하면 등골이 오싹해졌다. 호인들이 화살을 자신에게 겨누던 그 순간 도산성 방향에서 대포 소리가 났고 오랑캐들은 씩 웃으며 전장을 이탈해버렸다. 정말 천우신조로 시시도의 진지에 도착할 수 있었다.
“오타공. 저기. 강변 가에 시시도의 하타지루시가 보이오.”
아사노 요시나가가 들뜬 목소리로 심복의 무사함을 알렸다.
하타지루시. 이는 지휘관의 식별표시로 길이가 2m~10m에 이르는 커다란 깃발이었다. 하타지루시는 부대의 생사를 알 수 있는 지표로서 먼 곳에서 보아도 알 수 있게 화려한 것이 특징이다. 이와 비슷한 것으로는 우마지루시가 있는데, 깃발이 아닌 부채나 우산 같은 것으로 식별수단을 만든 것을 칭했다.
“어라?”
오타의 구원군과 진지 안의 남은 병력이 적에게 진격하니 명군은 기병과 보병이 서로 갈라져 대치 중인 상황이었다. 오타는 혹시 적의 또 다른 계책인지 의심하였으나, 지금은 시시도군을 구하는 것이 우선 이였기에 주마가편하기를 멈추지 않았다.
“슝. 슝. 슝”
“탕. 탕. 탕.”
갈대밭 둔덕 위에 대기하고 있던 아군진지의 궁수와 총병이 사격을 개시했다. 적의 기병과 보병 몇몇이 쓰러졌다. 적군은 당황하기 시작했다.
“와와아….”
이때. 모래톱에서 창병으로 진형을 갖추고 있던 시시도의 병력이 오타의 구원군에 맞추어 진격해왔다. 아군의 병력이 다수이거나 호각이었다면 명군을 협공으로 소탕할 기회였다. 그러나 군사의 양에서 그들은 구원군을 능가하고 있었다.
잠시 후.
“으악….”
“시네….”
“방우오….”
높고 날카로운 한어와 왜어가 뒤 석기기 시작하며 비명과 고함이 몰아쳤다. 기병과 보병, 창병과 검병, 병사와 무사가 서로 뒤엉킨 진흙탕 싸움이 이어졌다.
“군감님. 면목없습니다.”
혼전 속에서 한목소리가 오타의 귓가에 도달했다. 그는 소리가 난 곳을 바라보았다. 그토록 찾던 시시도 모토츠구가 아사노의 말 뒤에 타고 있었다. 아사노의 군마는 두 사람을 태운 것이 힘겨운 듯 연신 콧바람을 내뿜고 있었다.
“자세한 것은 본성에 가서 얘기하세.”
군감은 그 말을 남기곤 손을 들어 신호했다.
“전군. 퇴각하라.”
이를 바라본 부관이 목청껏 외쳤다. 소모전이면 수적 열세인 아군이 불리한 것은 자명한 일이었다. 게다가 이미 시시도 모토츠구를 구원했으니 목표는 달성한 왜군이었다. 그때였다.
“휙.”
“으악….”
후퇴의 명을 전하던 오타의 부관이 적 기병이 던진 단검에 맞았다. 순간 중심을 잃고 고꾸라진 그는 말 위에서 떨어져 움직이지 않았다. 전공이란 먹잇감을 찾아 헤매는 전장의 이리들이 그의 주위에 몰려들기 시작했다.
“안돼. 무라카와.”
오타는 부하의 이름을 불렀지만, 소용없었다. 이때 명의 기·보병은 바깥의 적으로 인해 안의 불화가 사라졌는지 사이좋게 아군을 추격하기 시작했다.
‘용서해라. 무라카와.’
오타는 마음속으로 수하의 이름을 되뇌며 울산성으로 길을 잡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