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83년 8월, 아르망 조약의 체결로 베트남은 프랑스의 보호국으로 전락합니다. 완조(阮朝)는 중부지역에서만 통치가 허용되었지만 프랑스가 징세권이나 토목권을 관할했던지라 있으나 마나했고 북부의 통킹은 프랑스에게로 넘어갑니다. 아르망 조약으로 완조에 일부 성(省)들이 다시 반환되긴 했지만 이미 보호국이 된 마당에 이건 뭐 놀리는 것도 아니고 그런건 아무짝에 소용없었겠죠.
아르망 조약(1차 후에조약)을 기념하는 그림
사실상 식민지가 된 마당에 그동안 베트남의 종주국을 자처해오던 청나라는 이를 용납할 리 없었겠죠. 이듬해인 1884년, 청에서는 이홍장을 보내 프랑스와 협상을 시도했지만 별다른 소득없이 결렬되었고 과거 사덕제의 요청으로 당시 통킹에 주둔하던 청군의 철수문제를 두고 되려 사태만 악화됩니다. 협상으로는 답이 없다 여긴 프랑스는 무력으로 통킹에서의 청군을 몰아내고자 공격을 개시했고 청군은 통킹에 주둔 중인던 흑기군과 연합하여 프랑스군에 맞섰고 통킹의 각지에서 교전을 벌였습니다.
1884년 3월, 북녕(北寧 : 베트남어로는 박닌)의 청군을 공격하는 프랑스군
프랑스의 거센 공격에 당황한 청은 다시 강화협상에 나섰고 결국은 1차 후에조약을 인정하는 내용의 1차 천진조약을 맺습니다만 이도잠시 그해 6월에 통킹에서 청군과 프랑스군의 재충돌로 인하여 전쟁은 재개되어 8월, 청이 정식으로 프랑스에 선전포고를 함으로서 청불전쟁이 발발합니다.
1884년 6월, 통킹지방의 북려(北藜)란 곳에서의 교전은 청불전쟁의 도화선이 되었습니다. 문제는 강화협정인 1차 천진조약이 체결된 후인데도 청군이 프랑스군을 기습했다라는 것이었는데요, 당연히 프랑스는 이를 문제삼았고 청에 배상요구를 합니다만 청이 이를 무시했기에 결국은 전쟁이 터졌던 것입니다.
해전은 대만과 복건성을 오가며 다양하게 전개되었지만 육전의 주무대는 베트남의 통킹지방이었습니다. 해전에서는 고전을 면치못하던 청군이었지만 육전에서는 양산(諒山) 전투에서 프랑스군을 대거 격파하는 등 선전하고 있었습니다.
결과적으로 청불전쟁은 전후 체결한 2차 천진조약의 내용에서 알 수 있듯이 청이 패한 식으로 끝나긴 했습니다만 위에서도 말씀드렸다시피 전황은 어느쪽에도 치우치지 않고 비등한 양상으로 흘러가고 있었습니다. 프랑스도 양산전투에서 큰 타격을 입긴 했지만 청도 복건함대가 격파되고 대만에서의 영향력도 상실하는 등 고착상태에 빠지자 결국은 타협하여 1885년, 프랑스의 베트남에서의 종주권을 인정한다는 내용의 2차 천진조약을 체결했던 것이죠.
이 조약을 통해 베트남은 보호국을 넘어선 완전히 식민지가 되었고 이른바 프랑스령 코친 차이나 식민지가 건설됩니다. 물론 보호국화가 진행된 이전의 아르망 조약의 체결 때와 비교했을때 특별히 달라진 점이 있던건 아니지만 더이상 베트남의 식민지화에 딴지를 걸 곳이 없어졌다라는 것과 다른나라들의 암묵적인 동의를 얻었다는 부분에서 사실상 완전한 식민지가 되었다고 볼수 있겠습니다.
코친 차이나 식민지 깃발
청불전쟁 이후, 베트남 민중들은 물론 허수아비로 전락한 완조 내부에서도 반(反) 프랑스 움직임이 일기 시작합니다. 프랑스의 내정간섭이 점점 심해지자 전편에서 한번 언급하기도 한 당시 조정의 우두머리 노릇을 하고 있던 존실설(尊室説)을 비롯한 몇몇 대신들이 반발하고 나섰던 것이죠. 존실설과 대신들은 왕조의 수도 후에의 프랑스인들을 몰아낼 계획을 세우고 행동에 옮기지만 1885년 4월, 프랑스군의 반격으로 오히려 궁성을 장악당하자 황제 함의제(咸宜帝)를 위시한 근왕군을 거느리고 후에를 탈출합니다.
존실설(尊室説)
저번 글에서 완문상과 진천성과 더불어 삼두정치 비스무리한 형태로 조정을 장악했다고 말씀드린 바 있지요. 청불전쟁 이후 나날이 심해지는 프랑스의 내정간섭에 반발하여 프랑스 세력을 뒤엎을 계획을 세우지만 되려 달아나는 꼴이 되고 맙니다.
완조(阮朝)의 제8대 황제 함의제(咸宜帝) 완복명(阮福明)
선제 건복제의 동생으로 건복제가 권신 완문상과 손잡은 태후와의 대립 중에 독살당하자 불과 13세의 나이로 뒤이어 즉위합니다. 즉위할 무렵에는 한창 청불전쟁 중이었고 황제로서 난국을 타개하기엔 나이도 어렸고 손쓰기엔 이미 늦은 상황이었겠죠. 그리고 뭣도 모르는 14살 때 존실설에게 이끌려 후에를 탈출했던겁니다.
후에를 탈출하여 거점을 마련한 존실설은 전국에 격문을 돌려 이른바 '근왕운동' 을 전개합니다. 동남아사에 별 비중을 두지 않는 고등학교 세계사에서도 한번쯤은 언급하고 가는 부분이기도 하지요. 함의제의 이름으로 베트남 전국에 뿌려진 격문에 전국의 유생들과 지주들은 호응하여 의군을 일으켰고 모인 의군은 수천에 달하여 전국 각지에서 프랑스군과 격전을 벌이며 항전을 전개해나갑니다.
이에 프랑스는 함의제의 정통성을 부정할 겸 도망간 함의제를 대신하여 동경제(同慶帝)를 옹립했는데요, 동경제의 명을 내세워 반란을 진압할 생각이었던 것이죠. 허수아비에 불과했던 동경제는 프랑스가 시키는대로 함의제와 그 무리를 역적으로 규정하고 근왕운동을 벌이며 함의제에 동조하는 이들 역시 반역자로 몰며 따르는 이는 처벌하겠다는 명을 내립니다.
하지만 굳이 반역자로 몰아가 해산을 꾀할 것 없이 모인 의군은 무기의 열악과 조직력에 있어서 프랑스군의 상대가 되지 못했던지라 근왕령으로 모인 의군들은 족족 격파당했고 프랑스는 그 기세를 몰아 어딘가에 숨어서 게릴라전을 벌이고 있는 함의제와 존실설의 체포에 열을 올렸습니다. 그러다 결국 밀고자의 배신으로 1888년, 은거지가 발각되면서 함의제와 존실설은 체포됨으로서 근왕운동도 종결되고요. 그렇다고 반 프랑스 운동이 아주 끝난건 아니었습니다. 근왕운동을 주도하던 반정봉(潘廷逢)이나 황화탐(黃花探)과 같은 민족 지도자들은 계속해서 독립운동을 지속적으로 이어나갔으니 말이죠.
은거지를 급습한 프랑스군에게 체포당하는 함의제
함의제는 그 길로 알제리로 유배당했고 거기서 프랑스인 여성과 결혼하여 자녀까지 둔 후 1943년, 프랑스에서 사망합니다. 참고로 존실설도 1913년까지 생존했습니다. 아마 어딘가로 추방당했겠지만 말이죠.
식민시대의 베트남사에서 다룰 부분들이야 호치민 얘기나 그밖의 것들도 많겠지만 여기서부터는 완조 황실 이야기 위주로 서술하여 마무리 지어볼까 합니다. 글 제목처럼 식민지화 과정을 다루는 글이었는데 이젠 식민지가 된 마당에 더는 쓸것도 없지만 그래도 마지막으로나마 써보려합니다. 어쨌거나 완조는 프랑스의 식민통치가 막을 내리는 1945년까지 명목상으로나마 존속했으니 말이죠. 프랑스에 의해 강제로 폐위된 함의제에 이어 즉위한 동경제도 1889년, 젊은 나이로 요절하고 뒤이어 고작 3일만에 폐위당한 육덕제의 아들 완복소(阮福昭)가 성태제(成泰帝)로 즉위합니다.
성태제(成泰帝)
앞서 프랑스에게 저항하던 함의제의 최후를 봐서인지 비교적 프랑스에게 우호적이었던 동경제와는 달리 성태제는 그냥 서구문명 자체에 보수적인 입장을 보였다고 합니다. 하지만 나중에는 프랑스가 궁성 곳곳에 심어둔 스파이의 존재를 의식하기라도 한듯 머리도 서구식으로 짧게 자르고 자동차 운전이나 프랑스식 교육도 배우는 등 제 딴에는 나름 자구책을 강구하지만 점점 심해지는 프랑스의 감시를 벗어나고자 미친척하기도 하지만 결국에는 당시 중국에서 독립운동을 벌이고 있던 독립운동가들을 지원하고 있다는 사실이 발각되어 1907년, 폐위되어 베트남 남부로 추방됩니다.
유신제(維新帝)
성태제에 이어 성태제의 아들 완복황(阮福晃)이 7세의 나이로 유신제로 즉위합니다만 우리에게도 익히 알려진 인물인 반패주(潘佩珠 : 베트남어로는 판보이쩌우)의 독립운동을 지원했다는 혐의로 역시 프랑스에 의해 폐위당합니다.
반패주(潘佩珠)
일본을 배우자는 동유운동으로도 유명한 인물이지요.
근왕운동과 더불어 고등학교 세계사에 나오는 베트남 역사 중 하나입죠.
사실 유신제까지가 그나마 프랑스에 항거하던 황제였고 이 계정제부터는 (~부터라고 해봤자 바로 다음대인 보대제가 마지막이긴 하지만) 그냥 완전한 프랑스의 꼭두각시였습니다. 그도 그럴게 앞서 자신들에게 덤벼드는 황제들인 성태제, 유신제를 통해 깨달은 바 있는 프랑스가 차기 황제 선택에 있어서 꼼수를 부렸기 때문인데요, 완조의 여러 황족들 중에서 차기 황제를 고르는 심사과정에서 계정제가 순종적이고 소심한 인물이라는 점이 자신들의 꼭두각시 역할 수행하기엔 적격이라 여겼던 것이죠. 그리고 계정제는 프랑스의 그러한 바람을 저버리지 않았습니다.
1916년에 즉위한 계정제는 재위 9년간 프랑스의 충실한 꼭두각시로 살았고 이 때문에 베트남 민중들은 계정제를 싫어했다고 합니다. 오죽했으면 한 언론인은 계정제 더러 '대나무 용' 이라고 조롱하기까지.. 특히 1923년, 자신의 무덤을 호화롭게 조성한 일과 자신을 무능하다고 비판한 판보이쩌우를 비롯한 국내외의 독립운동가들을 잡아들이라 명령한 일로 계정제에 대한 비판은 말그대로 정점을 찍었고 배부르게 욕 먹으면서 1925년, 안락하게 살다 사망합니다. 지금이야 그 호화로운 무덤덕분에 관광수입 벌어들이고 있으니 후손들에겐 고마운 일일지도?
20세기 중반에 들어서서도 완조는 계속 유지되었습니다. 식민기 초반에야 그래도 황실 타이틀 갖고 있고 프랑스보단 중부에서의 통치시스템이 확실히 완비된 완조였기에 살려두었다고는 하지만 뒤로 갈수록 기어오르는 완조의 역대 황제들이 아니꼬워서라도 폐지할만도 하건만 말이죠.
1931년의 완조황실 사진. 육덕제의 장녀, 즉 공주 되시겠습니다.
아버지 계정제와는 달리 보대제는 나름 정사에 의욕을 보여 이것저것 일들을 벌이긴 합니다만 프랑스 치하에서 할수 있는건 없었습니다. 의욕은 있지만 현시창에 좌절한 케이스랄까요. 그 좌절감 때문인지 나중에는 그냥 유야무야 살다가 1945년, 호치민의 월맹에게 국권을 넘겨주고 퇴위합니다. 하지만 그 후에도 일본이나 프랑스에게 끌려다니며 괴뢰국 황제 노릇한게 함정이긴 하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