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시대는 보통 크게 세 덩어리로 구분이 됩니다. 처음 한덩이는 후삼국을 정리하고 왕건이 고려를 세운 시기부터 왕권이 강해지고 그 왕권에 기대어 성장한 문벌귀족들의 시대지요. 이번에 다룰 부분이 바로 이 덩어리의 시대구요. 다음은 이런 문벌귀족들 때문에 홀대받던 무신들이 난을 일으켜 고려란 나라를 뒤집어버리고 왕을 허수아비로 만든 무신정권의 시대입니다. 종종 인터넷에서 찬양되는 칼잡이들의 무용담이 많은 시대기도 합니다. 그리고 마지막 세번째 덩어리 시대는 세계에 엄청난 제국을 건설한 징기스칸의 후손이 중국 대륙에 세운 원나라의 침공과 간섭기 입니다.
앞선 시대와 달리 고려시대부터는 실재하는 자료들이 좀 있기 때문에 이야기의 양이 많이 늘어날 수 있습니다. ㅜㅜ 뭘 넣고 빼야할지 정신없어지는 시기기도 하지요. 여하튼 정신차리고 이야기를 시작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앞선 글에서 통일신라가 망해가던 시기에 호족이 등장한 이유를 이야기했습니다. 그러면서 중앙정권의 통제가 약해지면 어떻게 되는지도 이야기를 했지요. 호족이 등장한 가장 단순한 이유는 중앙 정부의 통치력이 약해졌다 입니다.
왕건은 이런 약해진 틈바구니에서 생성된 호족 중 한명이었습니다. 송악(개성)의 호족이었지요. 왕건이 해상 세력과 꽤 밀접한 관계가 있었을 것이라고 추측을 하는데요. 왕건이 궁예 밑에서 올렸던 커다란 전공 중 하나가 바로 후백제의 후방이라 할 수 있는 곳을 수군을 이용해 공격해 점령한 것 때문입니다. 그게 진도와 금성(나주)였지요. 이런 전공들 덕에 왕건은 궁예 밑에서 총리 격인 광평성시중이란 자리까지 오르기도 하죠.
궁예도 초반에는 꽤 좋은 왕이었습니다. 다만 불교에 너무 빠져서 이상한 길을 걷기 전까지 말이지요. 안 그래도 지역적 기반이 약한 궁예였는데, 민심이 돌아서 버리면 왕으로써의 가치는 사라지게 되지요. 이에 918년에 왕건이 궁예를 몰아냅니다. 그리고 국호를 고려라고 정하지요. 고구려를 잇겠다는 의지가 나타난 나라 이름입니다. 철원에 있던 수도를 왕건은 자신의 근거지인 송악(개성)으로 옮겨버립니다. 이후 이름을 개경이라고 바꾸게 되지요.
934년 후백제는 운주(홍성)에서 왕건의 고려와 전투를 벌입니다. 그런데 후백제가 대패를 겪고 웅진(공주) 북쪽의 30개 성을 빼앗겨버리죠. 이렇게 대패해버리자 후백제는 나라의 근간이 흔들려버리게 됩니다. 더불어 왕이었던 견훤은 아들인 신검과 불화가 심해지지요. 그덕에 935년 견훤은 아들에 의해서 김제에 있는 금산사에 같히게 됩니다. 아들과 왕이었던 아버지와 싸움은 나라가 그리 건강하지 못하다는 증거지요. 이 때 고려의 왕건은 다시 한번 대군을 이끌고 후백제로 향합니다. 결국 왕건은 신검을 무너뜨리고 항복을 받아내면서 삼국을 모두 정리하게 됩니다.
신라는 언제 고려한테 망했냐구요? 이제 이야기 합니다. ^^;; 이리저리 거덜난 신라는 미래가 어두워져 있었습니다. 그래서 견훤이 아들에게 쫒겨나던 해인 935년에 과거에 신라를 위해 견훤과 싸워줬던 고려에게 왕과 신하가 합의해 나라를 바치게 됩니다. 후삼국은 이렇게 왕건에 의해서 정리가 된 것이죠.
이제 왕건 앞에는 그동안 고려를 도와줬던 각지역의 호족들이 남아있습니다. 앞선 글에서 설명했지만 이 호족들은 각자 자신들의 땅에서 왕과 비슷한 실력을 행사하던 사람들이죠. 이 호족들을 가만히 놓아두면 왕의 자리가 언제 누구에게 빼앗길지도 모릅니다. 그러면 고려라는 나라가 흔들리게 되지요. 그래서 왕건이 선택한 것은 각 지역의 호족들과 결혼을 통해 한 가족으로 만들어버리는 것이었습니다. 아무래도 사돈사이면 함부로 반란을 일으키지는 못할 테니까요. 그 덕에 왕건의 왕비는 29명이나 되었다고 합니다.
그렇다고 권력이란 것이 가족이란 단어안에 묶인다고 마냥 호의적일 수 없습니다. 그래서 왕건은 각 지방의 호족세력들을 중앙 관리로 끌어들입니다. 왕건의 영향력 밖에서 딴짓을 못하도록 막는 것이지요. 또한 억압만 할 수는 없는 노릇이기에 역분전을 나눠줍니다. 역분전이 무엇이냐면, 고려를 건국한 것에 대한 업적에 따라 나누어 준 땅을 말합니다. 나중에 이 역분전에 근거해 고려의 대표적인 토지제도인 전시과가 나옵니다. 전시과는 나중에 설명하도록 하죠.
한편 왕권을 강화하고 국가의 통치체제를 강화하기 위해서는 각 지방에 관리를 파견해야 합니다. 앞서 삼국시대에도 국가의 기반을 다지는데에 사용된 것이 바로 각 지방에 관리를 보내는 것이었지요. 그런데 왕건 때에는 그것을 함부로 시행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만큼 왕권이 강하지 않았다는 뜻이 되지요. 이 대신에 왕건은 지방호족들의 자제들을 수도로 불러올립니다. 이것을 기인제도라고 하는데요. 또한 이들을 사심관이라해서 출신지역의 관리로 돌려보내는데요. 호족세력의 자체적인 힘을 이용해 지방의 치안을 담당하게 하는 것입니다.
이런 왕건의 노력에도 왕건이 죽자 왕권계승 문제 때문에 호족에 의한 반란이 일어납니다. 이런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고려의 4대왕이며 왕건의 아들 중 하나이 광종입니다. 광종의 즉위 초는 호족과 관계가 꽤 좋았습니다. 하지만 광종이 자신만의 세력을 키우자 본격적으로 왕권강화와 중앙집권화 작업에 착수하게 되지요. 광종이 즉위한지 7년이 되던 해에 노비안검법을 실시합니다.
노비안검법이 꽤 중요한데요. 무엇이냐면 신분을 조사해서 과거에 양인이었던 사람들이 전쟁이나 이런 저런 이유로 노비가 되었다면 양인으로 만들어준다는 법입니다. 노비란 오랜 과거부터 귀족이나 높은 신분의 사람들의 경제적, 군사적 기반이 되어왔었거든요. 그런데 노비를 양인으로 만들어준다는 것은 고려를 구성하고 있던 호족들의 경제적, 군사적 기반을 흔들어버리겠다는 뜻이지요. 더불어 노비였던 사람들이 양인이 되면 국가에 세금을 내야 하고 부역을 하고 군사로 징집될 수 있으니 국가차원에서는 많은 것을 얻을 수 있었던 제도인 것입니다. 때문에 왕권 강화와 중앙집권화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면 빠질 수 없는 제도입니다. 그러고 보니 고려하면 떠오르는 제도였던 것 같기도 하구요. ㅡㅡ;;
그리고 광종은 958년에 중국대륙의 후주에서 귀화한 쌍기의 건의를 받아들여 과거제도를 시행합니다. 과거제도란 것은 나라에 필요한 인재를 뽑는 제도인데요. 광종은 기존의 건국공신들의 정부 안에서의 힘을 약화시키게 하려고 실시한 것입니다. 새로운 인물들을 끌어올려서 정부 안에서 왕을 위해 목소리를 낼 사람들을 만드는 것이지요. 더불어 정부 안에서 힘이 셀 수밖에 없는 건국공신들을 견제할 수도 있구요. 여기에다가 광종은 960년인 11년차에 관복의 색을 등급에 따라 나누어 지정합니다. 앞선 글들을 통해서 이야기 했지만 옷색을 지정한 다는 것은 서열을 매겨 그 기강을 잡는다는 뜻이 됩니다. 서열은 언제나 윗 사람이 될수록 말의 힘이 세지도록 하니까요.
이런 광종의 개혁(?)에 호족과 개국공신들이 가만히 있지만은 않겠지요. 그러자 광종은 960년에 칼을 뽑아 듭니다. 피비린내나는 숙청을 시작하는데요. 그 계기는 대상 준홍, 재승 왕동이 반역을 꾀했다는 죄를 묻는 것이었습니다. 이런 칼부림을 위해서 광종은 군부대를 개편하고 왕을 위한 부대로 강화시켜놓기까지 했었습니다.
이런 일을 왕과 몇몇 신하들만의 힘이었을까요? 아닙니다. 불교를 통해 민심을 얻어놓은 것도 큰 도움이 되었을 것입니다. 귀법사를 창건하고 이를 통해 교종과 선종을 하나로 합치려는 노력등을 했습니다. 이런 대중을 위한 행위는 왕이 하는 일에 대중의 지지를 얻기 쉽도록 해주었지요.
광종의 위세가 얼마나 강했냐면요. 재위 중에 광덕과 준풍이라는 독자적인 연호를 만들어쓰고, 수도였던 개경을 황도, 서경을 서도라고 부르며 스스로를 황제라고 했다고합니다. 물론 중국 대륙이 송이란 나라로 통일되기 바로 전과 얼마 되지 않았다는 것의 영향도 있습니다. ^^;; 참고로 중국 대륙을 정리한 송나라는 960년에 만들어집니다.
광종의 피비린내나는 개혁정치가 마무리되고 광종이 죽게 되자 광종의 개혁정치에 참여했던 주역들도 같이 제거가 되어 과거 공신들이 다시 득세를 하게 됩니다. 976년에 경종이 왕이 되었는데요. 이런 분위기에서 광종에 비하면 큰 힘을 못썼습니다. 하지만 이 해에 경종은 전시과라는 고려의 근본이 되는 토지제도를 시행하게 되는데요. 간단하게 말하면, 전시과는 모든 정부의 관리에게 그 일과 등급에 따라 차등해서 땅에서 나오는 세금을 받아갈 수 있는 제도 입니다. 땅 소유는 국가지만 국가에게 낼 세금을 전시과를 나눠 받은 관리들이 대신 받아서 그 세금으로 먹고 살 수 있도록 해주는 것입니다. 절대로 소유가 아닙니다.
여하튼 광종때 제정된 관복의 색과 일의 형태에 따라 구분했고, 이때까지만 하더라도 전시과 등급엔 사람의 인품도 변화시키는 요소였다고 합니다. 실질적으로는 왕에 대한 충성도겠지요. 관리들에게 안정적인 수입을 보장해 줌으로써 많은 이들이 관리로써의 정체성을 확립하게 되는 것이지요. 요즘으로 치면 월급에 목메여 생활할 수 밖에 없는 월급쟁이의 신세와 같다고 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네요.
성종(981~997) 때가 되면 중앙집권화가 빛을 발하게 됩니다. 뭐랄까 완전히 고려의 관리들이 관리로써의 정체성을 가지게 되고 나라로써 완전한 모습을 만들게 되었다고 생각하면 좋을 것 같습니다. 성종의 옆에 있던 최승로의 힘이 컸었는데요. 최승로는 성종이 즉위한 원년인 982년에 시무 28조를 바치게 됩니다. 이 시무 28조를 채택해 실행하게 되는데요. 성종이 했던 정책의 기반을 이루게 됩니다.
또한 이해에 당나라의 중앙관제였던 3성 6부제를 받아들이고 집권정치제도를 정비하게 됩니다. 여기에 중추원과 삼사등의 중요기구가 설치되지요. 이 기관중 핵심은 중서문하성인데요. 원래 기능은 당나라의 3성중에 하나지만 사실상 모든 일을 총괄해 시행하는 실무기관이었고, 중서문하성의 장(長)인 문하시중이 총리와 같은 일을 했다고 합니다. 6부는 상서성 아래에 예속 되어서 여러 업무를 나눠 처리했다고 합니다. 실질적으로 2성 6부제로 운영됩니다.
다음해인 983년에는 전국에 12목을 설치하고 처음으로 중앙 관리를 지방에 파견하게 됩니다. 이건 그만큼 왕권이 강해졌다는 증거지요. 지방호족의 반발이 심해질 수 있는 문제니까요. 성종은 또한 호족의 자제들을 뽑아와서 개경의 학교에서 교육시키고 과거를 통해 관리로 채용합니다. 이로써 지방호족들을 중앙관료로 흡수시키는 것이었지요. 이에 흡수되지 못한 호족은 지방관들의 밑에서 향리로 일하게 만들어 그들이 직접적으로 지방을 통제할 수 있는 세력을 약화시켰지요. 지방세력가들을 지방의 유지가 아닐 중앙의 관료로 흡수시키고 고려 구성원의 하나로 받아들이게 한 것이지요. 이로써 지방세력가들에 대한 우려를 많이 줄일 수 있게 된 것이죠.
이상이 고려의 성립과 중앙집권화를 해가는 이야기 입니다. 중앙집권화란 다른 말로 하자면 국가의 틀을 잡고 국가다운 국가가 된다는 이야기도 되지요.
참고로 한 책은
2010년 검정을 통과한 천재교육의 고등학교 한국사
2010년 검정을 통과한 비상교육의 고등학교 한국사
2002년 제작된 고등학교 국사
1996년 제작된 한국사통론 4판
2004년 제작된 한국인을 위한 중국사
이렇게 입니다.
원래 계획은 이 이야기를 하고 고려의 사회제도까지 같이 하려고 했는데, 양이 많은 관계로 다음 편에 고려의 사회제도 이야기를 이어나가도록 하겠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