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글펐다. 이 이야기는 이미 이전에 들어본 기억이 있다. 그때 내가 느꼈던 감정이 억울함과 분노였다면,
다시금 이 이야기를 들었을 때에 느낀 감정은 서글픔이었다.
토익에 대외활동에 대학 학점에 알바 등등, 지금의 세대를 살고있는 청년들은 그 어떤세대보다도 열심히 노력하고 힘들게 살고있건만
우리에게 돌아오는 명칭은 '최초의 부모보다 더 못사는 최초의 세대'이다.
불명예스러운 최초가 아닐 수 없다. 무엇보다 절망스러운 것은 '우리탓'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 어떤 세대보다도 젊은 날을 소비하며 미래를 위해 뛰고 있건만 미래가 나아지리라는 기대보다는 앞으로 무엇을 해서
먹고살아야 하는가를 걱정해야만 하는 처지가 그 무엇보다도 서글프고 억울하다.
물가는 치솟고 임금은 오를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가진 자들은 부를 나누기보다 쥐고있기를 원하며
기업을 살리자고 주장하는 정권은 그네들의 주머니를 채워줄 기업을 원하며, 소상공인들은 외면한다.
학창시절은 오직 수능과 대학생활을 바라보며 안정적이며 고지식한 길만을 주입시킨 우리에게 도전적이며 창의적일 것을 요구한다.
이 모순된 상황과 사회의 요구는 젊은세대를 더욱 분노케하며 절망시킨다. 절망은 쌓이고 쌓여 젊은이들을 체념하게 하고
갈곳을 잃은 분노는 허공을 헤멘다.
29살, 4000만원 주고 산 4년짜리 대학졸업장 졸업장은 빛바래고, 이후 3년간 취업하지 못해 백수로 헤메던 방황 끝에 드디어 얻은 2년짜리 계약직...
눈을 낮추라는 말에 얻은 자리가 겨우 2년간의 시한부 자리이다.
드디어 사람구실을 할 수 있게되었다는 안도감도 잠시, 2년은 바람처럼 지나가고 또 다시 정규직에 대한 압박과
이직의 고민을 안게되리라는 것을 나는 안다.
누구탓인가, 누가 우리를 이렇게 힘들게 만들었는가에 대한 의구심은 이미 생활고로 마음속 깊숙히 묻은지 오래다.
다음주, 첫 출근을 앞에두고 첫 경험에 대한 설레임은 온데간데 없고 긴장과 불확실성에 대한 불안만이 마음속에 자리잡아있다.
'나는 괜찮다, 잘 할 수 있을 것이다.'라고 마음속으로 되뇌어 보지만 불안감은 쉬이 가시질 않는다.
그저 잠자리에 누워 내일을 위해 빨리 잠들 수 있길 바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