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독]이승만 1910~1920년대 행적 증명할 사료 찾았다.. 친일 발언 미국인 여교사 감싸고 한인학생 내쳐
민족문제연구소는 1910년대 후반과 1920년대 초 하와이 한인기독학원 책임자이자 상해임시정부 대통령이었던 이승만 전 대통령의 이면을 보여주는 기록을 발굴해 11일 공개했다.
민족문제연구소 발굴 사료에는 이승만이 자신이 책임자로 있던 학교에서 친일 미국인 여교사를 편든 사실이 기록돼 있다.
또 이승만은 하와이에 한인 학교용 부지로 쓰기 위해 공금으로 토지를 매입했다고 했지만 실제 이승만이나 그가 운영한 기관이 해당 부지를 소유한 등기상 기록은 존재하지 않는 것으로 파악됐다.
1920년 2월23일 이승만 전 대통령이 민찬호 한인기독학원 교감에게 보낸 편지. 이 전 대통령은 미국인 교사 손버그의 친일발언을 비판한 한인학생 7명을 거명하며 "그들을 매우 가혹하게 처벌해야 한다"고 썼다.
(1) 친일 발언 미국인 여교사 감싸고
한인학생 내쳐 민족문제연구소는 "이승만이 친일발언을 한 미국인 교사를 옹호하고 이에 항의한 한인 학생들을 처벌하라고 지시했다"고 밝혔다.
연구소는 1920년 2~3월 이승만이 한인학교 관계자와 주고받은 서신, 하와이 한인기독학원 학생들이 작성한 청원문 등을 수집했다.
1919년 9월 한인기독학원 이사장 이승만은 미국인 여교사 알렌 손버그(Allene Thornburgh)를 기독학원 교사로 초빙했다.
손버그는 친일 성향이 강한 사람으로 "한인들은 돼지와 다를 바 없다" "일본의 지배를 받아 마땅하다"는 발언을 되풀이했다.
1920년 2월4일 손버그의 발언을 참지 못한 학생 7명은 "한국인을 싫어하고 조선을 헐뜯는 이가 있다"는 항의 서한을 다른 교사들에게 전했다.
학생들은 "친일·혐한 발언이나 조선 학교를 모욕하는 사람을 경고하기로 했다. 학교와 조국을 모욕한 교사를 제지해달라"고 했다.
민찬호 교감은 워싱턴에 있는 이승만에게 전보를 보내 "친일 성향의 손버그가 학생들을 짐승이라고 불렀다. 교사를 내보내려 한다"고 했다.
이승만은 곧장 손버그에게 "민 교감에게 학생들을 복종하라고 해뒀으니 떠나지 말라"는 전보를 보냈다. 이승만은 민 교감에게도 서신을 보냈다.
그는 "그런 일은 허용될 수 없다. 그들(학생들)을 가혹하게 처벌해야 한다"고 적었다.
(2) 사지도 않은 땅 샀다 하고 학교 건축기금 모아
하와이 '더 퍼시픽 커머셜 애드버타이저'지는 1918년 5월 "이승만이 운영하는 한인여학교에서 레아히 팜 부지에 속한 1만1385평 땅을 확보했다"고 보도했다.
그러나 이 땅 소유권은 이승만이나 한인기독학원 법인에 속한 적이 없었다.
민족문제연구소가 하와이주정부 등기소의 1918~1923년 부동산거래 기록을 검토한 결과 이 부지 주인은 P.E.R 스트라우치라는 부동산업자였다.
대한인국민회(한인독립운동단체)는 한인여학교가 매입한 것으로 알려진 레아히 부지에 남학생기숙사를 지어주기로 했다.
이승만은 대의원들에게 "좋은 기회로 부지를 정했다. 예산을 늘려 기숙사를 짓게 해달라"고 요청했다. 두 차례 모금을 진행했다.
대의원들에게 의무 납부금을 독촉했다. 이승만은 돈을 모으고도 학교를 짓지 않았다. 대신 1918년 카이무키 지역 폐교를 임차해 한인기독학원 건물로 사용했다.
이승만은 1922년 민 교감에게 보낸 편지에서 "(7000달러의) 학교부채를 청산할 방법이 없다면, 폐교하는 것이 좋다"고 했다.
한인기독학원은 1923년 칼리히의 부지를 매입한 뒤 건물을 신축해 옮겼다. 이승만은 "레아히 부지를 팔아 1만3600달러를 받았다"고 했다.
이승만은 이 돈으로 부지를 매입했다고 했다. 그러나 이승만이 레아히 부지를 사고판 등기 기록은 존재하지 않는다.
(3) 독립자금을 자기 돈이라 주장하며 동포와 싸워
민족문제연구소는 이승만이 임시정부 대통령 취임 직전인 1918년 독립운동 자금의 소유권을 주장하며 국민회와 맞섰던 재판기록을 공개했다.
1918년 하와이 국민회 대의원과 재무 담당 이승만 사이에서 충돌이 발생했다. 외형상 폭행사건이었지만 본질은 독립자금 1100달러 귀속을 둘러싼 다툼이었다.
1917년 국민회는 미국에서 열린 '소약국 동맹회(국권 회복을 위한 약소국 연합)'에 대표를 파견하려 성금을 모았다. 이때 두 개의 요청서가 배포됐다.
국민회 인장이 찍힌 '총회장 공함(공함)'과 이승만·안현경의 '개인 명의로 된 서한'이었다. 유동면 등 국민회 대의원들은 파견에 쓰고 남은 성금 1100달러에 대한 회계감사를 이승만에게 요구했다.
이승만은 개인 명의로 된 서한과 국민보(국민회 기관지) 성명을 증거로 제출하며 "공개 의무가 없다" 맞섰다.
이승만은 재판 전부터 성금을 내놓지 않겠다고 공언했다. 이승만은 "그들이 무슨 권리로 이 돈을 반납해야 한다고 하나? 기부 요청서는 안현경과 내 이름으로 서명했다"는 글을 적었다.
유동면 측 변호사가 "요청서에 국민회 인장을 썼냐"고 묻자 이승만은 "아니다. 총회장이 소개편지는 썼다"고 했다. 그러나 유동면이 공함을 증거로 제출하면서 거짓말이 드러났다.
(4) 무일푼 1년 만에 4000달러 주고 땅 3500평 매입
민족문제연구소는 이승만의 독립운동 자금운용을 추적하던 과정에서 드러나지 않았던 개인 재산 일부를 포착했다.
1913년 2월 하와이로 온 이승만은 줄곧 한인사회의 도움으로 생활했지만 10년 뒤 약 8000달러의 돈을 개인명의로 썼다.
1923년 3월 이승만은 워싱턴에서 함께 활동했던 변호사 프레드 돌프에게 "요즘엔 한 달에 100달러로 생활하고 있다"고 했다.
생활비는 한인들이 모아준 것이었다. 당시 하와이 한인들은 사탕수수 농장 등에서 일하며 4인 가족 기준 한 달에 25~30달러를 벌었다.
이듬해 12월 이승만은 4000달러로 개인 토지를 비밀리에 매입했다. 하와이주정부 등기소에서 발견된 토지매입 계약서는 1924년 12월5일 이승만이 4000달러를 주고 팔롤로 힐 일대 부지 3500여평을 샀다는 내용이다. 1년 뒤 이승만은 3986달러를 '동지식산주식회사'에 투자했다.
< 조형국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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