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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당시 전시 비리로 인한 수만의 죽음
게시물ID : history_17608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AllForU
추천 : 12
조회수 : 2129회
댓글수 : 11개
등록시간 : 2014/08/08 04:26:21
국민방~1.JPG
(당시 소집된 그 군대의 모습)
6.25당시 남한이든 북한이든 후진국이였고 비리는 불가분의 관계였죠.
그 당시에도 당연히 비리가 판을 쳤고 패전을 거듭하여 기반이 흔들리는 전시에도 나아지기는 커녕 더욱 악화만 되어갔습니다.
 
제가 말하고자 하는 바는 바로 그 때의 비리 사건입니다.
보도연맹 학살과 비등한 병크이지만 잘 알려지지 않은 사건이라 생각합니다. 져도 작년까지는 몰랐으니 말이죠.
뭐 저도 보도연맹도 태극기 휘날리며로 알았으니.
 
희대의 사건인 이 사건으로 수만명이 아사(餓死 굶을 아, 죽을 사)합니다.(조국인 대한민국의 부정부패와 인명경시로 인해 100여일 사이에 전투에 참가는 커녕 도 못 만져본 장병 수 만명이 후방에서 굶어죽고 얼어죽고 맞아죽어 목숨을 잃고 전체의 80%가량이 폐인이 되다시피한 엄청난 사건입니다.(정부의 공식기록에는 천수백명 사망으로 돼 있지만 당시 소문으로는 5만명 내지 10만명이 죽었다고 하며. 중앙일보가 간행한 <민족의 증언>에는 50만명의 대원 중 2할가량이 병사나 아사했다고 돼 있고, 부산일보가 간행한 <임시수도 천일>에는 사망자가 5만여명으로 돼 있다. 아직까지도 구체적인 사망자 수는 계측 자체가 불가능.)
그때문에 이승만은 어쩔수 없이 장성 5명의 처형합니다.(이렇게 쓴 이유는 다른 비리인 중석불사건을 유야무야 넘겼기에 이렇게 썻습니다.처벌자 없음)
 
이 아사부대의 이름은 국민 방위군입니다.(사건이름은 국민방위군 사건)
이승만은 북한도 경제 개발을 할 거라는 오판과 군대 장성들의 북한 경시 보고로 별다른 조치를 취하지 않고 있던 도중 6.25가 터지면서 철교를 터트리고 대전으로 도망가서 왔다 갔다하다 부산으로 튄 뒤 멕아더의 전략으로 서울을 수복하고 압록강을 눈 앞에 두고 중공군의 개입으로 다시 패퇴를 거듭할 때, 인적물자인 남성 장정을 빼앗기지 않아야 된다는 생각으로 남자란 남자는 모두 소집하기 위하여 12월 15일에 군경과 공무원이 아닌 만 17살 이상 40살 이하의 장정을 제2국민병에 편입한 뒤 제2국민병 중 학생이 아닌 자는 지원에 의해 국민방위군에 편입한다는 것을 골자로 한 '국민방위군 설치법안'을 통과시킵니다.
하지만 수십만의 장정을 동원하는 법안(국민방위군 설치법안)을 국회에 제출하면서 예산계획을 설명하지도 않았는데 그냥 통과시켰을 정도로 준비가 매우 허술하였고 그런 상황에서 12월에 첫 부대 1만여 명이 소집되었습니다. 사실 중국군의 진격이 너무 빨랏다는 것을 생각하면 서두른 게 이해는 가지만, 아직 행정체계고 뭐고 제대로 갖춰지기도 전에 국토를 상실했다 수복했다 다시 상실하는 상황에서 이런 대규모 인원이송을 기획한다는 것이 문제를 일으킬 확률은 아주 커 보였습니다.
 
그리고 사건은 터집니다. 1만명 가까운 병력을 후송하는데 쌀, 군복 하나 안 주고 언제까지 집결하라는 것도 없이 '착지(着地) 부산 구포'라는 작전명령을 육군본부로부터 하달받았고, 행군 중 대열 책임자가 경유지의 시장이나 군수에게 하달받은 양곡권을 보이고 급식을 해결하라는 명령이 내려졌다고 합니다. 그런데 당시 국방부와 내무부가 서로 양곡지급권을 갖겠다고 다투느라 양곡권 지급이 제대로 안 되었고 내무부는 각 시장 군수에게 양곡 지급을 중단하라고 지시하기도 했습니다(아....안습. 아...망했어요.)
 
당시의 증언에 따르면(서태원) 방위군은 북한 인민군 의용군보다 못했다고 합니다.(의용군도 주먹밥 세끼는 먹었다.... (중략) 방위군은 아사해도 돌봐주는 사람이 없는 상거지집단이였다.)
 
그리고 그 때는 12월 혹한이었는데, 소집된 장정들은 정부의 책임하에 소집되었으니 정부가 먹여주고 입혀주지 않겠느냐 생각하고 홑바지와 저고리 차림에 길을 나섰는데, 정작 정부는 이들을 위한 옷값도 배정하지 않습니다. 그 이유가 현금을 주더라도 방한복 50만벌을 구할 길이 없는데 예산은 배정해서 무엇하냐는 것이였습니다. 당연히 차량같은건 있을리가 없죠. 이뭐병. 그래서 장정들은 서로의 체온과 2명당 1장씩 지급된 가마니로 동사를 면해야했으며, 교실 하나에 수백명이 모여 서로 몸을 맞대고 자야 했고, 그런 상황에서 질병이 창궐하여 몸이 약해진 사람들이 열병으로 수도 없이 죽었습니다. 말 그대로 죽음의 행군이었는데(북조선 고난의 행군급이네..), 문제는 이 행군이 끝난 것으로 국민방위군의 재난이 다 끝난 게 아니었다는 것이습니다.
 
법안에 따르면 정부는 국민방위대가 약 50만 병력임을 가정, 후방에 50여개의 교육대를 설치해 1개 교육대 당 1만여명을 수용할 것을 명시했다곤 하지만 교육대의 기간요원들은 병력이 오더라도 이들을 받아들일 능력도 의사도 없었다. 게다가 병력 운용을 실질적으로 담당하였던 간부, 장병들의 월급마저 계산해두지 않고 알아서 해쳐먹으라는 식으로 건을 던져주었다. 거기에 교육대 간부 및 장병들은 대부분이 이승만 정부 산하의 극우 테러 단체였던 서북청년회 소속이 합류한 대한청년단 간부들로 구성되어 있었는데 이들은 군인으로서의 훈련이나 경험이 전무한 상황이었다.특히 사령관인 김윤근은 준장 계급을 달고 있었지만 사실은 3대 단장이자 씨름꾼 출신으로 대한청년단 초대 단장인 신성모의 사위였다.(인맥,의리군대...) 말하자면 군행정에 대한 지식이나 책임감, 직업의식이 부족한 친정부 민간단체 인력을 간부로 충원한 것.

따라서 이러한 간섭은 군부 쪽의 반감을 사게 되며,(비 전시때라도 군인 양성에는 퇴역한 예비역장교들이나 피치못할 사정으로 인해 전선에 나갈수 없는 상이현역장교들이 간부가 되는것이 보통) 교육대 간부와 장병들은 병력이 죽음의 행군에 필적하는 고생 끝에 도착하면, 자기들에겐 수용능력이 없으니 다른 교육대를 알아보라는 식으로 계속 뺑뺑이를 돌리면서 이들을 수용한 것처럼 서류를 날조해 예산을 빼돌렸다. 이런 식으로 빼돌린 예산이 수사당국의 발표로는 24억원, 국회조사단의 주장으로는 50억원 내지 60억원에 달했다. 국민방위군 재정을 실질적으로 총괄한 부사령관 윤익헌은 돈을 산더미처럼 쌓아놓고 기생들에게 돈을 뿌리고 다녔다고 한다.(아오...이 ㅄ) 윤익헌이 100여일 동안에 기밀비 명목으로 쓴 돈은 무려 3억원. 그 당시 국가기관이었던 감찰위원회(지금의 감사원)의 1년 예산이 3천만원가량 될 때였다. 그를 수사한 인사가 훗날 "윤익헌이 돈을 쓰듯이 물을 써봤으면 했다"라는 말을 했다고 한다. "물쓰듯이 돈을 쓰는"게 아니라...(당시엔 피난민이 몰려 물이 무척 귀했다.).

뒤늦게 국민방위군에 할당된 예산에 따라 식량이 지급된다 하더라도 국민방위군 장정들은 하루에 4홉을 배급받게 돼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이는 하루 5홉 5작을 받는 전쟁포로들보다 못한 것이었고, 빠듯한 예산에서 윗사람부터 사병까지 떼먹고 나면 남는 것이 없었다. 그런데 국민방위군 사령부는 예산 횡령을 위한 한 방편으로 장부상으로 젤리공장 또는 엿공장을 짓는다고 써놓았다. 이렇게 무능한 정부에 의해 굶주린 장정들은 훈련을 빌미로 마을로 가서 먹을 것을 탈취하고 잔치집과 굿판을 습격하는 등 말이 아니었다고 한다. 그 와중에 빈속에 급하게 먹어서 토사곽란으로 죽은 장정들까지 발생하였다. 젤리(엿) 공장의 경우 일단 만들어는 두었으나, 생산능력에 비해 소비한 것으로 기록된 쌀의 양이 6배가 넘었고, 자동차 250대를 구입했다더니 20대밖에 안 산 거였고, 생선을 산다더니 장부상 기록의 1% 정도만 구입한 등등이 있다.

여담으로 국회 조사를 통해 밝혀진 횡령액수는 주로 대구의 국민방위군 사령부에서 유용된 것으로 전국 각지의 교육대에서 얼마나 빼돌려졌을지는 불명이다. 또한 횡령된 금액 중 상당액이 당시 국회에서 여당 노릇을 하던 신정동지회에 유입되었다고 한다.

참고로 국민방위군 사건을 민간업자와 일부 군인들의 연계로 벌어진 거대한 군납비리 사건으로 이해하는 사람도 간혹 있는데, 군납(軍納: 인가를 받은 민간 업자가 군에 필요한 물자를 납품함)이라는 말은 군에서 민간 업자의 납품이 이뤄지고 대금을 받는 과정 까지가 군납이며 이 과정에서 비리가 벌어졌다면 군납비리 라고 하는데, 국민방위군 사건 전반에서 군납비리가 차지하는 비중은 거의 없다시피 하다. 국민방위군 사건은 대부분 민간업자 까지 갈 필요도 없이 자기들이 부대내의 장부조작과 횡령으로 예산과 물자 다 해쳐먹었으며, 정부에서는 아예 국민방위군이 살아남기 위해 최소 한도로 필요한 쌀과 동계피복을 보급 해줄 개념조차 상실한 상태였다(...). 군의 물품과 예산을 어떻게 분배하고 사용할 것인가 등은 군 내부의 군수(軍需:군사물자) 문제이며, 군 예산과 군수물자를 횡령하여 마음대로 유용한 국민방위군 사건은 군수비리라고 할 수 있다. 실제로 책임소재가 파악되어 처벌받은 사람들도 전부 국민방위군 간부들이지, 민간업자 등의 존재는 아예 없다.

국민방위군의 참상이 곳곳에서 목격되면서 사회문제가 되자 사건 수사가 진행되었고 관련자들이 군사재판에 회부되었다. 하지만 재판으로 선고된 형량이 너무 낮자 사회적으로 비판 여론이 확산되었고 이승만은 신성모를 국방장관에서 물러나게 하고 이기붕(이 새끼도 만만치 않은 놈.박마리아가 아내)을 장관에 임명했으며 참모총장을 이종찬으로 교체하였다. 이종찬 참모총창은 고심 끝에 적용법이 바뀔 경우 일사부재리의 원칙이 해당되지 않는다고 판단하고 재심을 명하여 국민방위군의 주요 간부 5명에게 사형을 선고, 정부에 대한 민중들의 불신풍조를 불식시키는 차원에서 본래 비공개인 군사재판을 공개로 돌리고 방청객을 위한 스피커까지 설치하여 재판의 공정성을 알리려 했다. 그리고 당시 사령관 김윤근을 이승만이 빼돌릴거라는 소문이 돌아 이들은 대구 근교야산에서 공개처형된다. 이렇게 이례적인 조치가 반복되었다는 점에서 그 자유당 정권에서조차 이 사건이 얼마나 심각하게 여겨졌는지 알 수 있다. 그 결과 이승만 다음 세력자였던 신성모가 세력을 잃고 사건 관련자들을 엄벌하여 인기가 급상승한 이기붕은 후계자로 부상합니다.

 
동시대의 비리 사건으로 유야무야 넘어간 중석불사건이 있습니다.
 
출처/ 엔하위키를 거의 다 배낌. (http://mirror.enha.kr/wiki/%EA%B5%AD%EB%AF%BC%EB%B0%A9%EC%9C%84%EA%B5%B0%20%EC%82%AC%EA%B1%B4)
쓴 이유/ 부산 임시정부 기념관 갔다가 빡쳐서
하이퍼링크는 제가 임의로 걸어놓은 것과 원래 있던 것이 있으며,
저의 임의 하이퍼링크는 엔하에 없는 사건은 위키 것을 대체하여 링크를 걸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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