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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 10.고구려와 백제의 항쟁과 멸망(ver 0.1)
게시물ID : history_17596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무량수
추천 : 18
조회수 : 1987회
댓글수 : 6개
등록시간 : 2014/08/07 01:48:05

지금부터 슬픈(?) 결말로 달려가는 이야기를 하려고 합니다. 왜냐면 고구려와 백제 멸망에 대한 이야기기 때문이죠. 굳이 슬플 이유는 없지만, 그래도 해당 시기에 살았던 사람들은 슬프지 않았을까 싶어서요. ㅡㅡ;;


고구려와 중국대륙 국가들과의 싸움 이야기를 먼저 하도록 하죠. 5세기에 커다란 제국을 만들었던 고구려는 6세기에 들어서면서 많이 위축됩니다. 앞선 글을 통해서 이야기했던 신라의 확장 때문이었는데요. 그 강력했던 고구려가 왜 신라에게 이렇게까지 밀려서 올라갔는지는 정확하게 알 수는 없습니다. 다만 확실한 것은 고구려의 영향권 아래 있던 신라가 고구려의 영토를 열심히 치고 올라갔다는 것입니다. 그 바람에 고구려는 한강을 중심으로한 지역을 빼았기고 동쪽으로는 함경도까지 밀려 올라가게 됩니다. 이것이 551년 쯤의 상황이었지요.


그런데 고구려가 상대해야 할 상대가 신라만 있었던 것이 아닙니다. 서쪽에 있는 중국대륙의 국가들이 호시탐탐노리고 있었거든요. 중국 대륙에 수많은 국가들이 있던 5호 16국 시절에는 이 나라 저 나라와의 외교를 통해서 나름 균형을 맞추고 있었습니다. 문제는 이 정신없던 중국 대륙을 589년에 수나라가 통일하면서부터 입니다.


광활한 중국 대륙을 통일한 만큼 강력한 수나라가 들어서자 고구려는 북쪽에 있던 돌궐족과 손을 잡게 됩니다. 돌궐은 수나라와 당나라 때까지 가장 위협적인 라이벌(?)이었습니다. 적에 적은 아군인 법이니까요. ^^;; 그래서 598년인 영양왕 시절에 고구려는 수나라의 요서지방을 먼저 공격하게 됩니다. 요서지방은 수나라나 고구려 모두에게 있어 중요한 전략적 요충지였거든요.


수나라의 문제는 수군과 육군 모두 합쳐 30만명 정도의 대군을 이끌고 고구려를 치러 옵니다. 하지만 자연적인 현상이 고구려를 도웁니다. 수군은 서해상에서 폭풍을 만났고, 육군도 홍수에 휩쓸리고 이런 저런 질병으로 고생하다가 돌아갈 수 밖에 없었습니다.


수나라는 저 엄청난 공격의 실패에도 불구하고 621년에 다시 고구려를 공격해 오는데요. 문제 다음에 황제가 된 양제가 직접 이전 공격보다 많은 100만 대군을 이끌고 고구려 침략을 시도합니다. 이 공격도 수나라 입장에서는 잘 안풀리게 되죠. 수나라의 육군은 요동성(요양)을 함락시키지 못해서 진군을 못하고, 수군은 대동강을 거슬러 왔지만 평양성을 공격하다가 패하고 맙니다. 안되겠다 싶었는지 양제는 30만명의 군대를 별동대로 조직해 직접 평양성을 공격하러가죠. 하지만 압록강과 살수(청천강)을 건너 왔다가 성과없이 고생만 하다 철수하던 중에 을지문덕 장군이 이끄는 고구려군의 공격에 전멸하고 맙니다.


수나라는 100만명 이라는 엄청난 수의 병사를 두 번이나 동원만큼 그 후유증이 컸는데요. 이런 무리한 공격의 감행으로 수나라에서는 내란이 일어나고 결국 멸망하게 됩니다.



수나라가 망하자 당나라가 중국 대륙을 통치하는 국가로 들어섭니다. 당나라가 세워진 초반에는 고구려와 나쁘지 않은 관계를 이어나갔습니다. 왜냐면 당나라가 처음 세워질 때만 하더라도 잠재워야할 세력들이 내부적으로 완전히 정리가 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당나라 태종이 즉위하면서 적대적으로 변했는데요. 황제가 바뀐 탓도 있지만 그만큼 당나라가 내부적으로 안정이 되었다는 뜻도 됩니다. 이에 고구려는 국경선 부근에 천리장성을 쌓기 시작합니다. 천리장성은 북으로는 부여성(농안)에서부터 남으로는 비사성(발해만)으로 이어지는 긴 산성입니다.


642년에 문제가 일어납니다. 이 천리장성의 감독을 맡고 있었던 연개소문 때문인데요. 연개소문이 군사를 이끌고 평양으로 돌아간 것입니다. 그러더니 당시 왕이었던 영류왕과 자신과 반대 성향의 대신들을 모두 죽이고 보장왕을 새로운 왕으로 세워 버립니다. 그러면서 자신을 대막리지라는 지위에 올려놓고 독재정치를 시작하죠.


한편 당나라는 고구려에게 신라를 공격하지 말라는 요구를 해옵니다. 사실상 전쟁을 하자는 뜻이지요. 이 요구에 따르지 않자 당나라는 연개소문이 영류왕을 죽인 책임을 묻겠다면서 645년 당 태종이 직접 군대를 이끌고 옵니다. 하지만 당 태종은 요동성 몇개를 점령한 후 안시성(영성자)을 포위해 60여일을 공격했지만 함락시키지 못해서 철수 하고 맙니다.



이렇게 고구려가 중국 대륙에서 건너온 수나라와 당나라를 연달아 상대하는 동안 백제는 배신한 신라에 대해 지속적으로 공격을 이어갔습니다. 비록 백제의 부흥을 꿈꾼 성왕이 관산성에서 전사했지만, 614년에 즉위한 의자왕이 그 뒤를 잘 이어서갔기에 신라를 향한 공격은 더 거세질 수 있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의자왕을 백제를 멸망으로 이끈 망나니로만 알고 있지만 즉위했을 당시에 의자왕은 그런 이미지와는 달랐습니다. 해동증자라는 칭송을 받을 정도로 형제들과 사이가 좋고 국가 발전에도 힘을 쓴 왕으로 평가를 받았습니다. 그런 그였기에 신라의 대야성을 비롯한 40여개의 성을 빼앗을 수 있었던 것이지요. 그 때문에 신라가 고구려에게 도움을 청하기 위해 김춘추를 보내게 만든 것이죠.


고구려에 도움요청하러 갔다가 거절당하고 오히려 구금당했던 김춘추는 진덕여왕이 즉위한지 2년째 되는해인 648년에 당나라로 건너갑니다. 김춘추의 당나라 방문은 나당동맹이라는 결실을 얻어오게 된 것입니다. 이후 신라는 끊임없이 사신을 보내 당 한반도에 공격해오도록 재촉합니다.


660년은 신라에는 무열왕이 등극한지 7년이 지난 상황이고 백제는 의자왕이 20년동안 통치하던 시점입니다. 이 때 비로소 당나라는 소정방에게 13만의 대군을 주고 산동반도를 거처 서해를 건너 백제로 진군하게 합니다. 다른 한편에서는 신라의 김유신이 5만의 군사를 이끌고 백제를 공격을 합니다. 무슨 이유인지 모르지만, 이 당시 의자왕은 환락에 젖어 있었고 귀족층과도 사이가 많이 벌어져 있었다고 전해집니다. 그래서 당나라와 신라의 공격에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 밖에 없었다고 합니다.


이런 어려운 상황에서 백제의 장수 계백이 결사대 5000명을 이끌고 황산벌에서 김유신과 대치해 김유신의 발목을 잡습니다. 수적 열세에도 5만명의 군대를 네 차례나 방어했지만 결국 계백의 결사대는 무너질 수 밖에 없었지요. 바다로 공격해 온 당나라군도 백강 연안에서 승리를 거둬 신라와 군세를 더해서 사비성을 공격하게 됩니다.


의자왕은 태자 효를 대리고 웅진성(공주)로 피하고 둘째 아들 태가 이들을 사비성에서 방어하면서 싸우게 합니다. 하지만 셋째 아들 륙이 항복하고 전의가 상실되자 둘째 아들 태도 항복하게 됩니다. 어쩔수 없이 의자왕도 결국은 항복해 백제는 660년, 의자왕이 즉위 한지 20년만에 사라지고 맙니다.


이렇게 되었다고, 수 백년 이어져온 국가의 유민들이 그냥 있지는 않았겠지요. 나름 부흥운동을 했고 꽤 큰 성과를 이루기도 했습니다. 왕족이었던 부신과 승려 도침이 주유성(한산)에서 군사를 일으키자 흑치상지가 있던 임존성 및 200여개의 성이 호응합니다. 이에 복신은 일본에 있던 왕자 풍을 데려와 왕을 삼고 당나라 군이 있던 사비성을 공격하지요. 하지만 신라와 당의 원군이 오자 부흥군들은 임존성으로 물러났는데요. 이 과정에서 내분이 일어나죠. 부흥운동을 이끌었던 이들끼리 서로죽고 죽이게 되죠. 결국 이 내분을 기회로 신라와 당군은 백제부흥군의 본거지인 주류성을 함락시키고 임존성까지 함락시키면서 백제 부흥운동은 663년에 끝나게 됩니다.



백제가 멸망하자 신라와 당은 고구려를 향해 공격을 집중하게 됩니다. 백제가 멸망한 661년에 당나라는 소정방과 계필하력 등을 고구려를 공격하게 했고, 신라는 이들에게 군사와 군량을 보급했습니다. 당나라 수군이 대동강을 거슬러 올라가 평양성을 포위하고 6~7개월을 공격했지만 연개소문의 강력한 방어에 막혀 참패하고 철수합니다. 육군 쪽도 압록강에서 연개소문의 아들 남생의 군대에게 저지되어 진격을 못하지요. 이렇게 당나라가 철수할 수 밖에 없게되자 신라군도 평양성 가까이에 군대를 몰고 갔다가 돌아올 수 밖에 없었습니다.


이렇게 열심히 방어하던 고구려에서는 연개소문에 대한 불만이 커지고 있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고구려의 지배를 받던 거란족과 말갈족이 당나라 밑으로 가면서 위태로워집니다. 665년 연개소문이 죽자 이 분란의 불씨는 폭발하게 됩니다. 연개소문의 죽음으로 장자 남생이 대막리지가 되었는데요. 이에 불만을 품은 동생 남건과 남산이 남생을 몰아내고 남건을 대막지리 자리에 올립니다. 남생은 국내성으로 달아났고, 당에 구원을 요청합니다. 뿐만 아니라 연개소문의 동생인 연정토는 12성을 가져다가 신라에 바치며 투항하면서 고구려는 자체적으로 분열됩니다.


667년에 당나라는 이 상황을 놓치지 않고 다시 고구려를 침략하는데요. 이세적이 이끄는 당나라 군대는 요동 지방의 성들을 차라로 함락시키고 압록강을 건너 평양성을 포위합니다. 여기에 신라의 김인문도 군대를 이끌고 당나라와 합세해 평양성을 공격하지요. 이에 668년 평양성이 함락당하고 고구려는 멸망합니다. 이후 당나라는 평양에 안동도호부를 설치해두고 설인귀에게 2만의 군사를 주어 지키게 합니다.


고구려도 백제와 마찬가지로 나라가 망하자 부흥운동을 시작합니다. 특히 검모잠은 보장왕의 서자인 안승을 왕으로 세우고 한성(재령)을 근거지로 했는데요. 670년 고구려의 멸망 후 당나라와 적대 관계가 된 신라와 손을 잡게 됩니다. 신라는 안승을 금마저(익산)에 머물게 하고 고구려 왕에 봉하고, 신덕왕으로 임명해 고구려 유민들을 모아 당나라 세력을 한반도에서 내쫒는데 이용합니다.



이상이 고구려와 백제가 멸망하게된 이야기의 요약입니다.


참고로 한 책은


2010년 검정을 통과한 천재교육의 고등학교 한국사

2010년 검정을 통과한 비상교육의 고등학교 한국사

2002년 제작된 고등학교 국사

1996년 제작된 한국사통론 4판

2004년 제작된 한국인을 위한 중국사


이렇게 입니다.



다음은 고구려와 백제를 멸망 시킨 신라가 한반도에서 당나라 세력을 몰아내는 이야기와 발해의 건국 이야기를 해보도록 하겠습니다. ^^

부족하거나 보충해야 되거나 혹은 잘못된 것이 있다면 댓글을 달아주시기 바랍니다. ^^

제 개인 블로그에 동시에 올리고 있습니다. 링크된 글은 위 내용과 똑같습니다.
http://myahiko.tistory.com/15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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