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전 발발 전
1597년 9월 14일, 임준영이라는 부하가 이순신에게 보고를 합니다.
“적선 이백 여 척 가운데 쉰다섯 척이 이미 어란 앞바다에 들어왔다.”
"...(왜군들이)여러 배들을 모아 조선 수군들을 모두 몰살한 뒤에 한강으로 올라간다고 했다."
[보라색: 전라우수영, 빨간색:어란 앞바다 인근지역]
이에 이순신은 신중히 생각한 뒤 전령선을 우수영으로 보내어 피난민들을 타일러 곧 뭍으로 올라가라고 하였습니다.
→이는 곧 피난민들이 우수영쪽에 자리잡고 있으며, 그들이 해안가에 머무르지 말고 육지로 들어가 침입에 대비하라는 뜻으로 비춰집니다. 동시에 이순신은 우수영과 거리가 떨어져 있으나, 어란 앞바다쪽의 정찰이 용이한 지역에 머무르고 있다는 추정을 가능케 합니다. 따라서 위 우수영과 어란진 사이 어딘가에 진을 치고 있었을 것입니다.
9월15일, (난중일기 번역문 그대로 옮김)
"맑다.
수가 적은 수군으로써 명량을 등지고 진을 칠 수 없다.
그래서 진을 우수영 앞바다로 옮겼다.
여러 장수들을 불러 모아 약속하면서 이르되, “병법에 반드시 죽고자하면 살고 살려고만 하면 죽는다고 했으며, 또 ‘한 사람이 길목을 지키면 천 사람이라도 두렵게 한다’고 했음은 지금 우리를 두고 한말이다.
너희 여러 장수들이 살려는 생각은 하지 마라. 조금이라도 명령을 어지면 군법으로 다스릴 것이다”고 재삼 엄중히 약속했다.
이날 밤 신인이 꿈에 나타나, “이렇게 하면 크게 이기고, 이렇게 하면 지게 된다”고 일러 주었다."
→우수영 앞바다로 진을 옮겼다고 하니, 아마도 명량 앞 넓은 바다쪽에 있다가 물길이 좁은 우수영쪽의 해협으로 후퇴한 것이 아닐까 생각 됩니다. 덧붙여 병력이 적으므로 명량을 등질 수 없어 우수영으로 병력을 옮겼다고 합니다. 병법에 대한 언급부분과 지형의 조건을 볼 때, 다들 아시다시피 좁은 해협을 적은 수의 병력으로 틀어막고 해전에 임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해전발발
9월16일, (난중일기 번역문 일부 옮김)
"맑다.
아침에 별망군이 나와서 보고하는데, “적선이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이 곧장 우리 배를 향하여 옵니다”고 했다.
곧 여러 배에 명령하여 닻을 올리고 바다로 나가니 적선 330여 척이 우리의 여러 배를 에워쌌다..."
→여기서 '에워쌌다'라고 했는데, 번역한 사람의 해석에 의존하여 저 표현의 구체성에 대해 생각을 해본다면, 적들이 다가왔다 정도로 이해하는게 정황상 타당할 것으로 생각 됩니다.
"...군관들이 배 위에 빽빽이 서서 빗발치듯이 쏘아대니, 적의 무리가 감히 대들지 못하고 나왔다 물러갔다 하곤 했다.
그러나 적에게 몇 겹으로 둘러 싸여 앞으로 어찌 될지 한 가진들 알수가 없었다.
배에 있는 사람들이 서로 돌아보며 얼굴빛을 잃었다..."
→적이 원거리에 있을 때 분전하였으나, 결국 수가 많다보니 일정 수준의 배는 접근을 허용하였던 것으로 보입니다. 이전의 해전에 대한 난중일기의 기록을 보면 '전시가 어찌될지 알수가 없다'와 같은 의미의 표현들은 거의 없다시피 한 것으로 보아, 당시 상황의 긴장감이 어떠했는지를 유추해 볼 수 있습니다. 또한 대장선이 분전하는 동안 나머지 휘하장수의 배들은 대장선 뒤쪽으로 멀리 떨어져 있었습니다. 이러한 내용은 영화 명량에서도, 불멸의 이순신에서도 묘사가 되었었습니다.
"...나는 배를 돌려 바로 중군장 김응함의 배로 가서 먼저 그 목을 베어 효시하고 싶었으나, 내 배가 뱃머리를 돌리면 여러 배들이 차차로 멀리 물러날 것이요, 적선이 점점 육박해 오면 일은 아주 낭패다..." →김응함은 영화에도 나왔지만 이순신의 휘하 장수입니다. 그는 겁을 먹고 후방쪽에 빠져있었고 이순신은 김응함을 비롯한 휘하 장수들에게 답답함을 느끼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동시에 자신의 배를 후퇴했을 시, 그에 대한 경우의 수에 대해서도 고민을 하고 있습니다. 아마도 이런 고민의 부분들은, 영화 명량에서 그가 초요기를 먼저 올리지 않고 홀로 3척의 배와 분전함으로써 휘하장수들의 합류를 유도했던 장면으로 묘사된 게 아닐까 생각됩니다.
"...김응함을 불러 이르되, “너는 중군장으로서 멀리 피하고 대장을 구하지 않으니, 그 죄를 어찌 면할 것이냐. 당장 처형할 것이로되 적세 또한 급하므로 우선 공을 세우게 한다"고 하니, 두 배(김응함과 안위의 배)가 곧장 쳐들어가 싸우려 할 때, 적장이 그 휘하의 배 세 척을 지휘하여 한꺼번에 개미 붙듯이 안위의 배로 매달려 서로 먼저 올라가려고 다투었다. 안위와 그 배에 탔던 사람들이 죽음을 각오하고 어지러이 싸우다가 힘이 거의 다하게 되었다.
나는 배를 돌려 곧장 쳐들어가 빗발치듯 어지러이 쏘아대니 적선 세 척이 몽땅 다 엎어지는데, 녹도만호 송여종, 평산포대장 정응두의 배가 줄이어 와서 합력하여 적을 쏘았다..." →결국 안위와 김응함을 비롯한 휘하장수들이 하나둘 합류하여 싸움이 본격적으로 시작되는데, 적장의 지휘하에 배 3척의 적군병력이 안위의 배로 등선을 시도했다 합니다. 이는 이전의 해전기록들을 볼 때 매우 낯선 전투경험입니다. 대체로 이순신은 귀선 등을 통해 적의 접근을 차단하는데 힘 쓰는 한편, 화포의 사거리를 활용하여 배의 격침을 통한 인명사살을 꾀하는 전략을 보였습니다. 이는 판옥선의 장점과 아다케의 단점을 동시에 이용하는 전략이었습니다. 그러나 명량해전에서는 적어도 적의 접근을 수차례 허용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다만, 이는 적군이 등선을 여러번 시도한 것이지 대다수가 등선에 성공했다는 의미로 보이진 않습니다.
이유를 살펴보면, 우선 명량해전에서의 아군에 대한 손실 내용을 살펴볼 때 아군 전반에 대한 구체적인 언급은 적지만, 대장선에서 5명의 사상자가 있다고 했습니다. 전투 내내 대장선이 일선에서 선전한 것을 고려하면, 사상자 수가 많지 않음을 알 수 있습니다. 안위가 전투 중반즈음부터 합류한 것을 고려한다면, 그의 배에 대장선보다 많은 사상자가 있을지는 의문입니다. 즉 영화에서 본 것 처럼 치열했던 백병전이 있었다면, 대장선에서의 사상자는 터무니없이 적습니다. 그러므로 기록으로 볼 때, 전투의 치열함은 등선을 막느냐 허용하느냐에 있지 않았을까 생각 됩니다. 다음으로 명량해전 당시 일본의 군선은 판옥선으로의 등선에 적합하지 않았던 것으로 보입니다. 당시 일본의 군선은 대선인 아다케, 중선인 세키부네가 있었습니다. 일본 군선과 조선의 군선을 비교한 표를 살펴보면,
[위: 임진왜란시 전투함선, 아래:전투함선 크기와 탑승병력 비교] (조성진 2009)
이렇습니다. 아다케의 경우 높이는 판옥선과 비슷하여 세키부네에 비해 등선이 비교적 용이할 것으로 보입니다. 문제는 명량해전 당시에 아다케의 참전비율입니다. 그런데 최근 KCI등재학회 연구지들을 살펴보면, 당시 일본은 명량부근이 조류가 빠르고 항해가 위험한 것을 고려하여 대선을 중선으로 바꾸어 타고 이 해협을 돌파하고자 했다고 합니다(參謀本部 1924; 李烔錫, 1974; 제장명, 2008). 그러므로 명량해전 당시 일본수군은 대장선을 제외하면 세키부네 위주의 편대를 짰을 것으로 보이는데, 그렇다면 저 위의 그림을 볼 경우 세키부네에서 판옥선으로 등선하기가 쉽지만은 않았을 것입니다. 더욱이 조류가 세다면 더 어려웠겠지요. 여담으로 조류가 셌다면, 조총을 사용하기도 용이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당시 조총의 제원에 대한 연구들을 살펴보면 최대사거리 200m, 유효사거리 50m였다고 합니다(활은 조총보다 사거리가 깁니다). 배가 많이 흔들렸다면 조총의 사격 정확도는 낮았을 것이며, 원거리무기의 이점을 약화시켰을 것입니다. (영화에서 적장 부하가 조총을 쓰는 것을 두고 한 네티즌은 바실리;영화 에너미 엣더 게이트의 주인공 냐고 조롱했었는데, 당연히 비현실적인 묘사라고 할 수 있겠으나, 저러한 묘사는 극적인 장면에 대한 연출인데 이러한 것을 두고 사실적인가 검증을 요구하는 관람객이 있다면 저는 그 관람객의 태도에 의문이 듭니다.) 게다가 오익창이란 의병장은 조선수군에게 솜이불을 모아 철환을 만들어 주어 조총에 대한 조치를 취해줬다고 합니다(노승석 2012). 이렇게 볼 때 접근 시 조총의 사용이 힘들다면 등선을 시도하는 군사의 엄호가 용이치 않았을 것이며, 배의 크기도 등선에 적합하지 않았으므로, 일본수군은 거의 판옥선에 등선을 성공하지 못했을 것이란 판단이 듭니다.
어쨌든, 안위가 위험에 쳐하자 이순신 본인은 포위를 풀고자 안위 주변의 적선들을 마구 요격했다고 합니다. 배가 많이 흔들리는 상황에서 아군에게 피해를 주지 않고 오로지 적선에게만 포격을 했다면, 그렇게 먼거리에서 포격을 한 것으로 보이진 않아 보입니다. 이런 설명들은 당시 아군 주변에 적선들이 어지러이 엉켜있었던 상황을 연상케 합니다.
"...항복해온 왜놈 준사란 놈은 안골포의 적진에서 투항해 온자이다..."
→'준사'라는 일본장수는 실제 영화에서도 나옵니다. 그런데 갑자기 준사에 대한 언급은 왜 했을까요?
"...(준사가)내 배 위에서 내려다보며, “저 무늬 있는 붉은 비단옷을 입은 놈이 적장 마다시다”고 하였다.
나는 김돌손으로 하여금 갈구리를 던져 이물로 끌어 올렸다.
그러니 준사는 펄쩍 뛰며 “이게 마다시다”고 하였다.
그래서 곧 명령하여 토막으로 자르게 하니 적의 기운이 크게 꺾여 버린다..." →준사는 항왜(왜인인데 조선에 투항하여 왜와 싸운자들을 말함)였으므로, 일본군의 장수를 알아 보았습니다. 여기서 마다시는 바다속에 빠져있던 모양인데, 이는 그가 안위의 배에 접근했다가 이순신의 포격을 받고 침수된 탓으로 보입니다. 아무튼 준사는 그 장수를 '馬多時'라고 부릅니다. 이 마다시에 대해서는 '佐藤和夫' 라고 주장하는 사람과, '來島通總'주장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내도통총은 '구루지마'라고 합니다. 구루지마가 맞다면, 영화에서 구루지마역 류승룡이 자신의 형제(이순신에게 죽음)를 상기하며 분노했던 장면은 어느 정도 자연스러운 전개일 수 있습니다. 저는 마다시의 정체에 대해 학설을 소개할 뿐, 그가 누군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중요한 것은 한창 전투에 바쁜 찰나임에도 굳이 적을 건져올리는 수고로움을 감내할 정도로 마다시는 상징적인 직급을 가졌던 장수라는 점입니다. 그리고 여기서부터 전황이 기울기 시작합니다.
"...이때 우리의 여러 배들이 일제히 북을 치며 나아가면서 지자포ㆍ현자포 등을 쏘고, 또 화살을 빗발처럼 쏘니 그 소리가 바다와 산을 뒤흔들었다.
적선 서른 척을 쳐부수자 적선들은 물러나 달아나 버리고 다시는 우리 수군에 감히 가까이 오지 못했다.
이것은 실로 천행이다..."
→접근을 시도한 적군들을 정리한 뒤, 대포를 쏘아 맞힐 정도의 거리에 잊는 적군들을 격퇴시키면서 전황을 반전시켜 나갑니다. 이전 해전들도 마찬가지지만 명량해전에서도 화포는 큰 역할을 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여담으로 일본의 배에 화포가 없었는지 묻는 사람들이 많은데, 여러 논문들을 살펴보면 대체로 일본군은 접근전 위주의 전술을 들고 나왔다고 합니다. 여러가지 이유가 있겠으나 이 점이 궁금하다면, 우선 최근 역사다큐 '그 날'에 출연한 일본교수의 인터뷰, 다음으로 불멸의 이순신에서 정유재란 당시 일본수군이 화포장착에 대해 고민하는 장면들에 대한 묘사를 참고해 보길 바랍니다. 상식적으로 생각해보면, 아다케는 속도를 추구한 배로 단면 'V'자형의 첨저형 배입니다. 많은 수의 화포는 첨저형배의 복원력(배가 기운 뒤에도 수평의 각도로 균형을 잡는 능력)을 떨어뜨렸을 것이며, 일본배들은 화포의 발포 후 반발력을 견딜만한 내구도를 가지고있지 못했던 것 같습니다.
아무튼 적선 '서른 척'을 부쉈다고 합니다. 이 글의 서두를 살펴보시면, 적선이 330여척 출몰했었다고 했습니다. 전투의 마지막에는 30척을 쳐부쉈다고 했습니다. 즉 난중일기에 따르면 적선 330여척이 출몰했고, 이 가운데 30척을 부순셈입니다. 사실 학자들 사이에서도 이에 대해 의견이 분분합니다. 이를 정리한 표를 참고해보면,
사료에 나타난 양국수군의 세력 (제장명, 2008)
사료마다 언급 기록이 각각 다릅니다. 즉 논쟁의 발생은 사료마다 기록이 다름에 기인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여기서 이순신이 직접관여한 기록을 살펴보면(사실 다른 기록들은 전해 듣거나 후대에 기술된 것이기 때문에 신빙성에 의심을 갖고 접근해야 합니다), 이순신이 선조에게 올린 장계와 난중일기입니다. 난중일기에 적세력은 330여척, 장계에서는 130여척이라고 합니다(어떤 사람들은 선조가 이순신을 미워하여 기록을 얕잡아 수정했다라고 하는데, 정작 선조수정실록에서 일본수군세력은 왜 증가되어 있는지 의문입니다. 물론 이마저도 난중일기와의 기록과는 다릅니다)
확실한 것은 이 표의 내용이 사실이란 것과, 이 표의 내용을 크게 벗어나 판단할수록 설득력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논쟁에 관심있는 사람들은 초점을 분명히 알고 있어야 합니다. 출전한 배의 숫자는 논쟁거리이나 격파된 배의 숫자는 30척이란 점을. 물론 험한 조류를 고려한다면 적의 배들은 자신들끼리 좌충우돌하면서 많은 어려움을 겪었을 것이고, 실질적으로 30척이상의 배들이 적지 않은 손실을 입었을 것으로 추정은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저는 이런 상황(조류때문에 매우 어지러운)에 대해 대체로 영화에서는 잘 묘사했다고 생각합니다.
흥미로운 것은 이순신이 장계를 올릴 때 항상 구체적으로 기록을 했다는 점입니다. 예시를 들면 누가 몇 명의 수급을 베었고, 또 어떤 이유로 수급 베는 것을 미루고고 배를 잡는데 초점을 두었으며(방답첨사 이순신에 대해 기록할 때), 몇 척의 배를 격추하였는지 등의 기록을 통해 미루어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명량해전에 대한 장계는 '비교적' 이전 해전기록에 비해 구체적이지 못한 인상을 줍니다. 이는 이순신이 후방에 물러나 아군의 전열을 진두지휘했던 이전의 해전 상황과 달리 명량해전에서는 굉장히 급박한 상황속에서 전장을 지휘했던 것이 아닐까 하는 추정이 들게끔 합니다. 이런 상황으로 인해 결국 이날의 기록 말미에 '천행이었다'라고 익숙치 않은 표현을 남겼던 게 아닐런지.
해전상황에 대한 임진왜란 기록은 여기까지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알아야 할 정황들이 몇가지 더 있습니다. '마하수'라는 의병장은 자신의 아들 둘을 데리고 명량해전 당시 피난선 십여 척과 전선에서 물러나 진을 벌이고 있다가 이공(이순신)이 포위됨을 보곤 이를 돕기위해 돌진하였다가 전사했다고 합니다(이충무공전서 권14). 또한 많은 피난민들은 이순신의 명령(적을 피해 도망가라)에도 명량 인근지역을 떠나지 않고 군량이나 군복을 조달하거나 피난선을 이용하여 아군의 세력이 강하게 보이기 위한 응원전을 펼치기도 했다고 합니다(난중일기 9월 17일; 제장명 2008). 이 기록은 좀 해석에 대해 의심의 여지가 있는데, 어찌됐건 타당성 있는 해석이라고 생각 됩니다. 영화에서는 이를 연상시키는 장면들이 여럿 있었습니다. 어떤 이들은 이러한 장면들이 너무 감성을 쥐어짜기 위해 왜곡한 것이냐고 지적한 사람들이 있는데, 감독이 저와 같은 내용을 찾아봤을지 저로서는 알 길이 없으나, 결과적으로 KCI등재학회지에 언급될 정도의 내용을 인용하여 보여준 셈이라고 한다면, 이를 심각하게 지적하고 있는 사람들은 이를 반증하기 위해 어떤 의견들을 세상에 내놓았는지 되묻고 싶습니다. 이 외에도 최근의 명량해전 당시 명량 인근 의병활동에 대한 연구들을 살펴보면, 의병들의 활동은 간접적으로 일본육군의 전라 남해안 일대 침투에도 상당한 압박을 주었을 것이란 생각이 듭니다.
해전 발발 후
이순신은 명량해전 이후 최종적으로 부안 앞바다까지 후퇴합니다. (글 쓰다 지쳐서...) 난중일기의 기록에 따른 후퇴상황은 엔하위키미러 항목을 인용했습니다. 난중일기 내용을 요약해서 말씀드리면, 이순신은 후퇴이후에도 초탐선을 보내 해남앞바다 인근을 정찰하기도 했고(이 때는 왜군들이 정찰에 확인이 되었다 안되었다를 반복하는데 이는 명량 패배이후 여전히 세력은 득세하나 함부로 해상진출을 꾀하지는 못했던 상황을 보여주는 것으로 생각됨), 법성포(신안 앞바다)에서는 육지를 약탈하고 있는 왜군들에 대해 기록을 남기기도 하였습니다. 이러한 기록은 이순신의 분전에도 불구 육지방면에서는 전라남도 일대에 대한 일본의 침투가 간헐적으로 성공했음을 보여주는 것으로 풀이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