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을 살아내는 것조차 힘든 순간들이 있다.
언덕을 올라 한 구석탱이에서 몸을 누이고 싶지만,
야속한 중력이 몸뚱이를 끌어내리려는데
그것을 사투할
자동차를 굴릴 돈도, 택시를 탈 돈도, 버스를 탈 돈이 없어
생존을 가속할 수도없이, 가속만이 상류층으로 올라설 수 있는 시대의 억울한 낮은 위치에서,
그 마저도 국민을 신용점수화하여 관리하는 나라에서,
그 어떤 기회조차도 저당 잡힌채
삶을 마감해야하는 순간들이 있다.
얇은 퇴직 권고서 한 장 받기 위해 몸과 마음을 바쳐도
생존을 응원받을 수 없는 사회에서
우리는 어떠한 희망을 가져야 하는가?
그리고
어떠한 사회는 우리 개인의 삶을 인정해주고 응원해줄 것인가?
이러한 주제의 사회를 우리는 건설할 수 있는가?
우리는 어떠한 사회 건설을 위한 담론을 주고 받고는 있는가?
개인의 역할만 하고 죽음을 받아들이는 사회인가?
굳이 개인은 사회를 위해 삶을 헌납해야하는가?
개인의 삶은 사회와 함께 할 수 밖에 없다.
왜냐하면 사회는 개인을 계속 밀어내려고 하는 속성이 있기 때문이다.
모든 개인을 담을 수 있는 사회는 없으며
사회에 속하고자 하는 개인은 그 사회의 시스템을 받아들일 수 밖에 없다.
미쉘 푸코의 권력관계에 대한 인사이트는 사회 권력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이는 개인이 존재한다는 것에서부터 출발한다.
이것은 매우 현실에서 자주 확인할 수 있으며, 정치적으로도 해석되고 개인들도 이미 그렇게 살고 있다.
(사회는 개인에 대항하는 시스템과 힘을 가질 수 밖에 없으며
개인은 사회를 이길 수 있기에는 너무나 힘이 약하다.
이런 상황에서 개인은 시스템화되어 있는, 고정적인 권력에 대하여 개인의 요동이라는 행위로 존재를 증명한다.
국가가 개인을 통제하려 할때 개인은 그 국가를 떠날 수 있으며, 대항할수도 있고, 조직된 힘을 보여줄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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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본주의 사회는, 특히 신 자본주의 사회는 개인들의 능력을 철저히 활용하고 있다.
자본이 없는 개인은 그 사회에서 생존하기 힘들기 때문이다.
젊은이들은 개인의 비전과 능력으로 존재감을 드러내고 싶어하지만,
고도화된 기득권 구조들은 젊은이들을 인턴으로 머물게 하며 "사회 초년생" 증명서를 발급해준다
물론 그들의 능력을 10분 활용해먹기도 한다.
즉 사회의 구성원으로써 역할을 기대하기보다 한자리를 주고 기간안에 능력을 취하고나서는 보증서를 끊어주고 관계를 끝낸다.
한국도 그렇지만, 자본주의의 정도가 심한 나라일 수록 이 시스템은 공고하다.
인간이라는 동물적 에너지 소비 구조에따라, 즉 인간은 에너지를 생산해낼 수 없는 존재다.
에너지 소비체인 인간은 사회를 구성할 수 밖에 없고 혼자서는 존재하기가 쉽지 않다.
많은 물자가 필요하며, 그 물자역시 혼자서 개발하기는 쉽지 않다.
구성되는 사회에서는 어떻게 존재해야하는가?
이 물자들의 개인 삶에 지원을 사회 시스템은 자본주의와 공산주의라는 위대한 약속들을
마치 실현될 수 있을 것처럼 이야기 한 시기가 19세기와 20세기였다면,
20세기와 21세기는 그 약속들이 증명되는 과정이었다.
두 개의 약속 모두가 한계성을 드러냈고, 특히 자본주의는 빚과 이자를 재발행함므로써 개인에게 책임을 떠넘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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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흐름에서 개인은 어떻게 존재해야하는가?
답이 없어보이는 사회에서 개인의 존재는 생존할 수 있는가?
먼저, 개인은 개인의 존재의 당위성을 생각할 수 있어야한다.
개인의 존재를 무너뜨리는 자본론 기반의 사회에서 어떻게 자신의 존재를 스스로 받아들일지 고민해야한다.
이 고민이 없이는 사회가 이야기하는 계급의, 종교의, 자본의 시스템 속에 속박당할 뿐이다.
개인이 존립할수 있어야 사회가 존재할 수 있기에, 사회가 의무로 책정하는 교육이라는 것은 이 고민을 도울 수 있어야 하며. 개인의 능력을 착취하는 교육이 되어서는 안된다.
개인 존재에 대한 고민에 대해 데리다는 이항대립이라는 도구를 제시하였고,
개인 존재에 대한 개념을 만드는 것에 큰 도움을 주는 것은 수많은 철학 사고실험으로 증명되었다.
그리고 개인 존재의 당위성은 또한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의 관계에서도 존재할 수 있어야한다.
여기서 관계들에 대해서 좋다, 나쁘다라는 태도를 가질수록 사회 관계성은 빠르게 이념화되며, 적을 만드는 도구가 된다.
즉, 관계 사이에서 개인의 존재성은 사회를 받아들이거나 바라보는 것에 넓은 그릇이 될 수 있어야 한다.
질 들뢰즈는 수많은 존재들과 사회에 식물의 뿌리가 수평으로 퍼지는 듯한 "리좀" 개념을 제시하였고,
다양한 관계성에게서 존재성을 위치할 수 있게하는 깨달음을 주고 있다.
여기서 양비론은 이 개개인의 리좀을 갉아먹는 도구가 되며,
극단주의가 심한사회는 개인의 존재를 부정하는 사회가 되게된다.
즉 건강한 사회는 다양한 존재를 받아들이는 넓은 그릇을의 사회라고 말할 수 있다.
사회 역시 리좀의 토대위에서 발전되어 나가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이러한 사회 자체가 사회가 가진 한계성을 벗을 수 있어야 한다.
그래야 개인의 존재는 멈추어진 존재, 즉 시스템에 순응만 한 존재가 아닌
혁신같은 성격의 것을 이끄는 주체적 존재가 되는 것이다.
새로운 시도를 할 수 있는 사회가 되어야 개인의 삶은 고정되지 않고 부품화되지 않는다.
미쉘푸코는 개인과 권력의 구조와 사회의 구조에 대한 분석을 통해
사화의 변화를 지속해서 요구하고 사회를 발전시키는 "새로운 고대인"의 역할을 개인에게 주문하였다.
생존은 단순한 것이 아니고
넓은 시야를 가져야만 개인의 자본을 들었다놨다하는 이 시대에,
민주주의가 위협받으며 하나의 독재 부품으로 전락하는 시기에,
다시 한번 개인의 "존재"와 "실존"이 스스로에게서도 요구되는 이 시기에,
이러한 논의가 잘 요약된 치바 마사이의 "현대 사상 입문"이라는 책을 추천핟다.
출처 | 현대사상입문, 치바 마사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