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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살과 자본주의, 그리고 계엄 사회에서의 존재.
게시물ID : phil_17579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Guybrush
추천 : 0
조회수 : 718회
댓글수 : 0개
등록시간 : 2024/12/04 13:04:04

유시민은 숭고한 죽음 - 자살을 이야기했다. (매불쇼 2024.11.27)

강신주는 자살에 대한 가치 합당성을 이야기 했다. (http://todayhumor.com/?lovestory_95831)

숭고한 죽음과 두려움의 극복을 통해 자살의 정당성이 논의되었는데, 

현대 대한민국 사회는 오늘 (2024.  12.3-12.4) 대한민국의 계엄령 선포와 함께

개개인의 생존이 노출되어야할 만큼 개개인의 노력을 요구하고 있다. 

오랫동안 주창되어온 신자본주의 사회 하에서의  회사, 조직에서의 피로감 모두, 번아웃 사회는 물론,

사회의 부조리함을 개인이 맞서야함까지 요구된 오늘 이었다. 

사실 민주주의는 이렇게 성장하기도 해왔다. 

IMF 이후 부자되세요가 광고 멘트로 나온 시점에도 일반 대중은 낮에 회사를 잘릴지도 모르는 상황에도 최선을 다해 자신을 성과로 몰아붙이고 나서도, 

밤에는, 신자본주의가 본격화된 이명박 정권 하에서 광우병 이슈 뒤에 누적되어온 공적 시스템의 효율화와 이권화라는 명제에 항거하며, 

민주주의를 외치러 미네르바가 되어 또한 인터넷으로도 나아갔다.

그리고 오늘, 여의도로 나갈 수 밖에 없게 된 상황에서의 노력과 별반다르지 않다.

즉, 개인들이 주체가 되어 나서야 국정을 바로 잡아야 하는 순간들은 역사의 전통처럼 늘 있어왔고,

국민 개개인이 어쩌면 피로감으로 물들때도 있었고

위정자들은 이 피로감을 십분 활용해오기도 했다.

그렇기에 자살을 할 수 밖에 없을 정도로 삶을 무겁게 만드는 사회에서 자살의 당위성이 존재하는 듯 보인다.


 

그러나. 이러한 자살은 전태일의 숭고함이 더해진 자살이라고 하더라도 

사회는 개인의 삶을 극단으로 몰아붙여왔고, 자살이라는 형태로 항거하게 만든 압력을 충분히 주었기에 타살이 아닐 수가 없는 것이다.

이러한 해석을 두고 정치적으로는

전태일을 받아들이는 사회 또한 한 쪽의 사회주의에 경도된 것이 아니냐는 신자본주의 쪽의 주장일 수도 있겠으나

그러한 주장은 전혀 민주주의가 아니다. 

다수의 다양한 뜻을 존중한채 합리적인 결론을 도출해 낼 수 있거나 과정이 있는 곳이 민주주의이지, 

양비론에 그치는 사회는 민주사회라고 하기에는 미성숙된 사회인 것이다. 

(아직까지 한국은 양비론이 먹히고 있다.)

신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전태일의 죽음을 사회주의 관점에서 수용할 수는 없다.

모두가 자본의 노예로써 기능을 다하고, 자본의 여유가 없을때 인간은 성과를 더욱 발휘해야 하기 때문이다. 

사회주의는 그러한 착취에 대항하고 신자본주의는 착취라는 논리를 받아들인다면 존재할 수 없기 때문이다.

 

노벨 수상자 한강의 소설들의 시각으로는, 그리고 수많은 실존주의 철학에서조차도,

불에 타들어가는 전태일의 죽음을 죽음자체만으로 볼 수 없다.

불에 타면서도 살아서 발버둥치는 마지막까지의 생의 의지로써의 관점에서 

그의 작품세계에  특히 '채식주의자'와 '회복하는 삶', 그의 시 '조용한 날들 2'에서도

밀려오는 구조와 시간과 공간의 권위앞에서 "살아있음" 을 느끼는 작품들이다.

2024년 한국은, 성공의 공식이 정해져있는듯 보이는 신자본주의 사회에서 다양한 삶이 살아 있음이 필요없고

다양한 의견이 오가는 사회가 아닌 획일화된 사회로 - 한병철이 이야기하는 타자의 추방이 보편화된 사회로 가는 듯 보였다.

 

통치방식에 다른 소리를 내는 사람들이 있다고 해서

폭도 세력으로 규정하고 국가전체를 계엄령을 내렸다.

각기 다른 삶을 살고 있는 모든 국민에게, 같은 무게를 할당하고 - 마치 북한처럼 - 삶의 의지를 박탈하는

국민 신용 점수제도 어쩌면 개개인에게 자본주의사회에서 점수화된 계엄이다. 

그냥 저냥 살기에도 힘들기 때문에 자살을 선택할 수 밖에 없다.

 

여기서 발터 벤야민과 한강은 되물음 한다.

죽음은 충분한 가치가 있는가?

 

마지막 말라가는 순간까지 자신의 생을 느낄 수 있는가?

(생을 주장한다면 사회에 숭고함이 더해줄 수 있다. 생을 느낀다면 실존을 이야기한다.)

가치와 존재를 느낀다면, 자살을 선택할 수 있는가?

그러한 자아는 사회적 추방을 느끼면서 죽어가는 자신을 발견하며 웃을 수 있지 않을까?

살아만 있다면, 어떠한 곳에서든 생을 느낄 수 있다면, 사회와 국가는 그 사람을 추방 할 수 있는가?

오히려 사회와 국가는 통제를 좋아하기 때문에 살아 있음을 느끼는 사람들을 추방하려 하는것 아닌가?

그러한 사회와 국가는 죽은 사회이지 않을까?

통제하는 개인만 존재하고 나머지는 죽은 이들이니까 말이다.

왜 죽어야 하지?

민주국가에서?

죽음과 삶 사이에서 그냥 생존하는 존재이면 안되는 건가?

 

한국 사회는 표지판부터 네비게이션, 심지어 화장실 문구까지 

개개인에게 수많은 지시사항들이 적혀있다.

그냥 왼쪽 도로, 오른쪽 도로, 2시 방향 도로, 8시 방향 유턴. 이런것만 알려줘도 되는거 아닌가?

개개인에 행동을 안내문으로도, 매뉴얼로도, 신용점수로도 요구하고 경고했으니 나머지는 네 책임이다 라고 해석되게 만들면

개개인의 무게가 더욱 늘어나서 자살을 선택하게 한다면, 

개개인의 자살은 죽은 사람 책임이 되면 되는 것일까?

우리는 왜 삶을 가만히 놔두지 못하는 것인가?

한국은 왜 조금만 어긋나도 타인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인가?

이승만 만세, 박정희 만세, 전두환 만세, 박근혜 만세, 윤석렬 만세를 외치지 않으면 이적행위가 되는것인가?

그렇기에 윤석렬 만세를 외치지 않는 세력은 체제 전복 조장 세력이라면

4.19, 5.18이 부정되는 것이 당연한 사회가 되는 것이다.

즉, 다양한 국민의 소리를 전할 수 있어야 하는 국민의 대표를 무시하는 행위 - 계엄령 선포, 집회/시위의 금지 행위, 성공의 시스템화 - 는

민주주의의 행위를 추방하는 행위가 되는 것이다.

민주사회에서의 타자의 추방 행위는 민주사회 스스로를 포기하는 위기를 불러들이는 것이다.

몇몇이 모의해서 (윤석렬 및 충암고 세력) 국민들 몇몇에게 (김어준, 이재명, 조국)  "체제 전복"죄를 적용하기 위해 계엄을 내리는 행위는 파시즘 그 자체의 사회인 것이다.

 

그런면에서 김수영 시인은 획일화된 사회에서, 가장 "생"을 외친 시인으로써, 

경도되어가는 사회를 비판해왔다.

(살아있는 동안, 요즘 같은 문화의 힘이 세계화 되었다면 노벨상은 당연했으리라.)

그리고 생을 이야기하며

생의 숭고함을 오히려 노래했다.

그러기에 강신주와 유시민은 비극적인 해석에서 그쳐버린 것이다.

 


P.S 한강의 시 2편을 인용해 본다.

아래 두 시에서 무겁고 아픈 생존이 자살보다 숭고하고 빛나는 것임을 느낄 수 있다.

'파란 돌' 에서는 삶의 가치,

'조용한 날들 2'에서는 항거할 수 없는 권력앞에서에서의 개인의 실존을 이야기한다.

 

 

<파란 돌>

 

10 년 전 꿈에 본

파란 돌

아직 그 냇물 아래 있을까

 

난 죽어 있었는데

죽어서 봄날의 냇가를 걷고 있었는데

아, 죽어서 좋았는데

환했는데 솜털처럼

가벼웠는데

 

투명한 물결아래

희고 둥근

조약돌들 보았지

해맑아라.

하나, 둘, 셋

 

거기 있었네

파르스름해 더 고요하던

그 돌

 

나도 모르게 팔 뻗어 줍고 싶었지

그때 알았네

그러려면 다시 살아야 한다는 것

그때 처음 아팠네

그러려면 다시 살아야 한다는 것

 

난 눈을 떴고

깊은 밤이었고,

꿈에 플린 눈물이 아직 따뜻했네

 

10 년 전 꿈에 본 파란 돌

 

그 동안 주운 적 있을까?

놓친 적도 있을까

영영 잃은 적도 있을까

새벽이면 선잠 속에 스며들던 것

그 푸른 그림자 였을까

 

10 년 전 꿈에 본

파란 돌

 

그 빛나는 내로

돌아가 들여다보면

아직 거기 

눈동자처럼 고요할까

 

 

 

<조용한 날들 2>

 

비가 들이치기 전에

베란다 창을 닫으러 갔다

 

(건드리지 말아요)

 

움직이려고 몸을 껍데기에서 꺼내며 달팽이가 말했다

 

반투명하고 끈끈한 

얼룩을 남기며 조금 나아갔다

 

조금 나아가려고 물컹한 몸을 껍데기에서

조금 나아가려고 꺼내 예리한

알루미늄 새시 사이를

 

찌르지 말아요

 

짓이기지 말아요

 

1초 만애

으스러뜨리지 말아요

 

(하지만 상관없어, 네가 찌르든 부숴뜨리든)

 

그렇게 조금 더 

나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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